#115.
귀족원의 소집일이 정해지고 이례적으로 황제까지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사건은 더 큰 화제가 되었다.
드러난 정황으로는 정식 재판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아는 오클레인은 귀족원을 동원하는 강수를 두었고, 그 공격적인 행보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아마도 그 뒤에는 황제의 부추김이 있었으리란 추측과 함께.
대비할 틈도 없이 아시카는 일주일 만에 귀족원 회의에 불려가게 되었다.
황궁이 아닌 중심가에 있는 청사(廳舍)에는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수십 명의 귀족이 모여들었다. 긴급하게 소집된 만큼 영지에서 오지 못한 귀족들은 대리인을 보내서라도 가문의 자리를 지켰다.
차가운 회색조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안. 웅성거리며 회의실 문 앞에 모여있던 이들이 일제히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저기 봐. 진짜로 왔어.”
“세상에 겁도 없지. 심약한 레이디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그레인 소공작이 아닌가. 대리인을 보내기에는 가문의 체면이 있지.”
“결혼도 안 한 레이디가 면이 팔리는 건 어떻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나붓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가 있었다. 차분한 은회색 드레스는 목 끝까지 여몄고 검은 머리칼을 단단히 틀어 올려 한 점 빈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미혼 남녀가 많이 참석하는 무도회나 레이디들의 티파티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시카였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볼 수 없었기에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
“안 올 수가 있나. 고발당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야 할 텐데.”
“세상에 누가 겁도 없이 이그레인을 고발해?”
“폐하께서 뒤에 계시는데 뭔들 못 하겠어?”
“근데 그 얘기 들었어? 황태후 폐하 얘기 말이야.”
삼삼오오 가까운 귀족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아시카의 뒤를 따르던 잔느가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주변을 노려보았다. 귀가 밝은 탓에 듣기 싫어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대놓고는 한마디도 못 할 분들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평소라면 진정하라는 한 마디쯤은 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시카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저보다 먼저 화를 내주는 잔느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잔느, 호위 기사는 회의실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예, 압니다. 나오실 때까지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잔느는 아시카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시카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무리 심지가 굳건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
잔느를 밖에 세워두고 아시카는 열려있는 회의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어깨를 펴고 턱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처럼 앞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망설임 따윈 없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시카의 심장은 차게 가라앉았다.
긴 타원형의 공간을 중심으로 묵직한 나무 의자들이 빙 둘러있었다. 수십 개의 자리는 미리 와 있던 귀족들이 차지했고 복도와 달리 회의실 안은 조용했다.
웨이브는 진작부터 와서 회의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은 아시카가 대리로 참석했던 자리였다. 밖에서 떠들어대던 귀족들도 감히 웨이브 앞에서는 말을 올리지 못했다.
아시카가 들어오자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던 드루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아시카는 살며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불과 며칠 전, 그에게 쏟아냈던 엄청난 이야기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내내 드루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는 태도에 놀란 것은 오히려 아시카였다.
딱 한 번, 드루쉬아가 반응했던 것은 이븐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아시카가 경험한 이상한 환각보다 이븐이 아크펠라의 마지막 대공녀라는 사실을 더 믿기 어려워했다.
그리고 모든 사달의 원흉도 이 자리에 있었다. 아시카의 시선 끝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마이헬러 후작이 보였다. 옆에 세워놓은 지팡이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그녀를 주시하는 시선이 소름 끼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다.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몽 같은 대공성의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전해진 혈족뿐.
그 자리에는 이비스와 황제,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더 있었다. 이비스를 바라보던 탐욕스러운 청록색의 눈동자, 마이헬러 후작이었다.
“회의를 시작합니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아시카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저 멀리 상석에 있는 황제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오클레인 후작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만큼 골몰해 있었다.
“내 아들의 죽음에 이그레인 소공작께서는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회의에 참석하신 분들께 동의를 구합니다.”
코랄과 닮은 얼굴을 한 오클레인 후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에 맞서 일어난 것은 웨이브였다.
“이그레인의 이름으로 작성된 경위서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취합해 제출했소. 거기 어디에 고발할 근거가 있단 말이오?”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 이그레인 소공작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정신을 잃었다잖소. 실제로 목격자들은 쓰러진 두 사람을 발견했다고 했소. 현장에서는 무기조차 나오지 않았어.”
코랄은 목에 자상을 입고 죽었다. 그날 황궁의 기사들이 휴게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범인이 다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오클레인 후작은 수긍하기 어려웠다.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람이 죽었으면 살인범을 잡아야지, 왜 엉뚱하게 내 손녀딸을 걸고넘어져! 오클레인 후작께서는 이그레인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려는 건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웨이브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애당초 회의를 소집한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불충분한 정황만으로 고위 귀족을 이런 공개석상으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웨이브는 회의를 무마시키지 못하고 끝내 아시카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것에 분통이 터졌다.
“공모자인지 아닌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 이그레인 소공작은 법정에서 진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누가 감히 이그레인을 법정에 세워!”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귀족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귀족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흥분한 두 사람만이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황제는 흥미롭게 다툼을 지켜보았다. 급한 마음에 귀족들을 부추기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일이 재밌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이그레인은 이 일로 인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충분히 쓸만한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두 분은 진정하시고, 당사자의 얘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재를 위해 나선 것은 회의 진행자인 루테넌 백작이었다. 대표적인 중립 세력 중 하나로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아시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위 어느 곳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적의를 드러내는 오클레인 후작 한 사람만을 마주 보았다.
“제가 오클레인 공자에게 공격받은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클레인 후작께서는 알고 계세요. 그런데도 제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시나요?”
“그건….”
“공자의 잘못으로 파혼이 진행됐는데도 앙심을 품고 이그레인의 별장에 침입해 저를 공격했어요. 그때야말로 제가 공자를 고발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그냥 넘어갔다는 사실을 잊으셨나요?”
“그날 내 아들은 다쳐서 돌아왔소! 그러니 고발 대신 침묵을 택한 게 아니오! 이미 다 끝난 일이야!”
적반하장으로 소리치는 오클레인에게 아시카도 지지 않고 차게 대꾸했다.
“오클레인 공자는 똑같은 짓을 또 한 번 시도했어요. 레이디 전용 휴게실에서 작정하고 기다렸다가 저에게 약을 먹인 뒤 끌고 가려고 했지요. 저는 저항하는 와중에 정신을 잃었고. 그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레이디 이그레인이 아니면 누가, 대체 왜 내 아들을!”
“그건 황궁을 지키던 기사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어요?”
후작은 체통도 잊어버리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가 흥분할수록 아시카의 머릿속은 차게 식었다.
루테넌 백작이 상석에 앉아있던 황제를 슬쩍 곁눈질하고 다시 나섰다.
“오늘 결정해야 할 사항은 이그레인 소공작에 대한 고발 여부입니다. 미리 배포된 자료를 확인하신 분들께 의견을 구합니다. 고발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주십시오. 과반수가 넘으면 귀족원 회의는 오클레인 후작의 고발을 받아들여 이 문제를 정식으로 법정에 보내는 데 찬성하겠습니다.”
회의실 전체를 시선으로 훑었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흥미로워 이 자리에 참석했을 뿐, 실제로 이 문제가 법정으로 갈 거라고 생각한 이들은 없었다.
오클레인 후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코랄이 아시카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작위와 영지에 대한 욕심 때문인 줄 알았다. 장남이 사고로 죽고 코랄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 또다시 아시카와 엮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클레인 후작은 믿을 수 없었다. 제 아들이 아시카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이나 납치하려 했다는 이야기 모두 이그레인의 말뿐이었다.
제 아들이 그랬을 리 없다고, 음해가 있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저 여자가 있었다. 차고 시린 얼굴로 단 한 번도 제 아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아시카가.
제 아들이 죽었는데 원흉이 된 여자는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혔다. 그래서 황제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드시 살인범을 찾아 주겠다고, 죽은 코랄의 분풀이를 하도록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말이다.
“제 억울함에 동조해줄 분이 아무도 안 계신 겁니까!”
오클레인 후작의 외침에 마이헬러 후작이 회의실 안을 돌아보았다. 수십 명의 귀족 중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다만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흥미롭게 지켜볼 뿐.
오클레인 후작은 으득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예상했던 결과인데도 속이 쓰렸다.
“이그레인 소공작을 제국의 법정에 세울 수 없다면, 정의의 법도를 따르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힘에는 힘. 이그레인과 영지전을 치르겠습니다.”
침묵하던 귀족들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