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옆방으로 이어진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내내 잠들지 못했던 드루쉬아는 예민하게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바닥에 닿는 나붓한 발걸음 소리가 느리게 다가왔다. 얼굴 위로 어둡게 그림자가 지고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드루쉬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를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와 창백한 낯빛.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이 하얗고 가녀린 여자를 더욱 위태롭게 보이게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카는 먹먹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만 보았다. 손을 내밀어 안아줘야 할까, 아니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아시카를 바라보며 망설이던 드루쉬아가 입을 열었다.
“낮에 이그레인에서 사람이 왔더군.”
아시카는 꼬박 하루 동안 앓아누웠고 그 핑계로 웨이브가 보낸 심부름꾼을 돌려보냈다.
“그냥 보냈는데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
가까스로 연 입술에서 퍼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을 못 자겠으면 주치의를 불러줄까?”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하다며 탈리온 공작가의 주치의가 지어준 약도 소용없었다. 불안이 극에 달한 그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약 같은 건 없었다.
“르쉬아….”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애처롭다.
“내가 뭘 어떻게 해줄까? 응? 아시카.”
드루쉬아는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의 체온이 닿자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그녀가 찾는 마지막 피난처. 아시카는 그의 손을 감싸 가만히 입술을 문질렀다. 움찔 반응하는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는다.
아시카는 그의 손을 당겨 제 허리에 얹으며 몸을 기울였다. 긴 검은 머리칼이 커튼처럼 얼굴 위로 드리운다.
잠시 긴장하던 드루쉬아는 다가오는 입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보드라운 입술이 살며시 문지르며 그의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음….”
할짝, 할짝 작은 혀가 감겨들며 그녀의 몸이 그의 위로 올랐다.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인데도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길에 맥없이 떠밀려 쓰러졌다.
서툰 입맞춤에도 드루쉬아의 몸에서 열이 올랐다. 그의 손이 아시카의 허리께를 매만지다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얇은 침의 아래로 말캉한 가슴살이 손에 닿는다.
“흡….”
가슴을 움켜쥐는 감각에 아시카의 입에서 신음이 새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어설프게 엎드려 있는 그녀의 몸을 커다란 손이 매만졌다. 침의 아래로 파고든 한 손이 허벅지를 쓸고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하아… 안아줘, 르쉬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몸이 아래로 확 당겨지면서 시야가 반전되었다. 순식간에 드루쉬아는 그녀를 아래로 눕히고 제 몸으로 짓눌렀다.
“후, 아시카. 진짜….”
이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억눌러왔던 욕구가 순식간에 발끝까지 치달았다.
아시카는 모를 터였다. 매 순간 얼마나 그녀를 원해왔는지. 오로지 욕망뿐이라고 오해할까 봐 선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써왔는지. 그러니 도피를 위해 갈구하는 행위라도 좋았다.
얇은 침의는 드루쉬아의 손에 단숨에 벗겨졌다. 반사적으로 아시카의 손이 가슴을 가리기 위해 올라가자 커다란 손이 잡아채 아래로 내렸다.
“쉿. 괜찮아. 가만히 있어.”
욕망으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달래듯 귓가에 속삭였다. 다정한 목소리인데도 아시카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뜨거워진 손길이 허리와 아랫배를 매만지다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나 남은 얇은 속옷 속으로 굵은 손가락이 파고들어 지분거린다.
보드라운 속살에 닿는 거친 손끝의 감각.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제 살 위로 미끄러지는 저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애가 타서 발끝이 곱아들고 밭은 숨이 차올랐다.
“르쉬아….”
애태우는 손길에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이 그의 아래를 더듬었다. 바지 아래에 불뚝 솟아오른 단단한 덩어리가 스쳤다.
“아시카, 잠깐….”
드루쉬아의 만류에도 아시카는 그의 허리끈을 풀어버렸다. 조급한 손길이 밖으로 드러난 그의 아래를 단숨에 움켜쥐었다.
“윽.”
“기다리기… 싫어.”
붉게 벌어진 입술이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속삭였다. 참고 있던 드루쉬아의 인내심을 뚝 잘라버리는 소리였다.
“후우… 나도.”
들들 끓어오르는 열기에 꽉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찬가지야.”
작은 손에 끌려간 그의 중심이 질척하고도 따뜻한 틈새에 닿았다. 묵직한 부피감이 제 자리를 찾아 미끄러지는 동안 아시카는 숨을 멈췄다.
천천히 밀려드는 묵직한 둔통과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강렬한 감각.
아시카는 밭은 숨을 토해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느리고도 강렬하게 퍼져나가는 그것이, 온몸으로 부딪혀오는 감각이 그가 토해내는 진심처럼 느껴져서.
창백했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땀이 배어 나와 검은 머리칼이 엉겨 붙었다. 아까보다 생생히 살아있는 얼굴이었다.
드루쉬아는 억눌린 숨을 뱉으며 얼굴을 아래로 기울였다.
“아시카, 사랑해.”
그를 바라보던 새카만 눈동자가 젖어 들어간다. 파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 위로 드루쉬아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금세라도 울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그 울음마저 제가 모두 삼켜주고 싶어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강렬한 쾌감보다 더 진한 감정의 파도에 잠식당하는 기분. 아시카는 밀려드는 감각의 회오리에 저를 내맡기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어딘가에 흠뻑 함몰되어있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담요를 덮고 있는데도 느껴지는 허전한 감각. 제 몸에 감겨있던 보드라운 체온이 사라졌다.
‘아시카.’
잠이 확 달아났다. 드루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옷을 챙겨입고 옆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아.”
환한 햇살을 받으며 창문가에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창밖으로 향해있는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 윤기가 흐르는 긴 검은 머리칼.
활짝 열려있는 창문으로 스산한 가을바람이 흘러들어온다. 커튼이 휘날리면서 아시카의 머리칼도 함께 바람에 흐트러졌다.
“그러다 감기 걸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아시카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드루쉬아는 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안겨드는 몸이 싸늘하다.
“이것 봐. 몸이 차잖아. 또 앓아누우면 어쩌려고 그래.”
아시카는 대답 대신 더 몸을 밀착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과 따뜻한 체온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평화로운 침묵 사이로 노크 소리가 파고들었다.
“공작님, 일어나셨습니까?”
집사의 목소리였다. 아시카는 화들짝 놀라 드루쉬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르쉬아. 놔 줘.”
“옷 다 차려입었잖아. 뭐가 문제야?”
탈리온 공작저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암암리에 숨겨온 두 사람의 관계를. 그런 와중에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은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틀 전 피범벅이 된 아시카를 데려왔을 때부터 공작저에는 비상이 걸렸다. 아시카를 이그레인이 아닌 탈리온 공작저로 데려온 것은,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드루쉬아는 마지못해 버둥거리는 아시카를 놓아주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렸다. 조금 전 드루쉬아의 방문 밖에서 기다리던 집사가 목소리를 듣고 아시카가 있는 방 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보좌관 칼프와 아시카의 시중을 도맡은 미아도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어?”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전 아가씨 옷 단장을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필요 없으신 모양이네요.”
미아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칼프는 왜?”
드루쉬아의 시선이 옮겨가자 긴장된 표정의 칼프가 입을 열었다.
“귀족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시카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귀족원이 왜 갑자기 소집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설마 하는 가정이 떠올랐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드루쉬아는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르쉬아, 무슨 일이야?”
“어제부터 귀족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드루쉬아는 물끄러미 아시카를 바라보았다. 더는 상처받을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이미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고 있었다.
“귀족원이 왜?”
“오클레인 후작가에서 고발을 준비하고 있거든. 귀족원 회의에 탄원서를 넣었어.”
아시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피해자였다. 코랄에게 잡혀서 어디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뻔한. 그런데 고발이라니?
드루쉬아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말도 안 되는 억지인 걸 모두 알아. 아는데.”
고위 귀족이 살해당했고 유일한 피의자는 아시카 하나뿐. 오클레인 후작은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아마도 그 뒤에는 황제가 있지 않을까. 이 문제를 크고 시끄럽게 오래 끌수록 황태후의 문제는 뒤로 밀려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해도 너를 엮을 방법은 없어.”
문제는 귀족원이 황제를 등에 업고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는 온전히 아시카가 짊어지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혼의 소공작이 연루된 희대의 추문과 가문의 명예에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될 이그레인 공작가.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황태후에 관한 불미스러운 소문을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황제가 있었다.
드루쉬아는 그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아시카를 노리는 것이 누구든 이그레인과 탈리온 모두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차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는 고요한 적의가 들끓었다.
아시카는 깨달았다. 드루쉬아가 진심이라는 것을. 한순간의 욕정이나 말뿐인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설 생각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보며 드루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얘기하도록 해.”
겁을 줄 생각이 아니었는데. 파리하게 질려있는 아시카의 낯빛이 안쓰러웠다.
“르쉬아.”
달싹이던 입술이 열리며 얼굴만큼이나 긴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 말이 있어요.”
아시카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드루쉬아가 문을 향해 손짓했다. 모두 자리를 피해달라는 의미였다.
문이 닫히고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아시카는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드루쉬아를 제 수렁 속으로 함께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코랄은 이미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코랄이 알고 있다는 건 그 뒤에 있는 마이헬러가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시카가 숨겨왔던 비밀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상황.
이미 한 번 겪어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에게 미래가 없으면 어쩌지.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가. 나 하나가 아닌 모두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거라면.’
“아시카.”
홀로 잠겨 든 암울한 생각 속으로 다정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무슨 얘기든 해도 돼.”
그러니 떠나겠다는 말만은 하지 말라고, 차마 하지 못한 말을 긴장된 표정으로 드러내었다. 드루쉬아는 한 걸음 더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