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늦은 시간에도 온 집안이 깨어있었다.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는 이들도, 아직 듣지 못한 이들도 숨 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에 잠들지 못하는 상황. 응접실로 가는 웨이브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응접실 문을 열어 줄 때도, 응접실 문을 등지고 있는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웨이브의 정신은 온통 황궁에서 벌어진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로 꽉 차 있었다.
웨이브는 차를 들고 따라 들어오는 하녀에게 손짓하며 응접실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시클레어 부인?”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나로 틀어 올린 풍성한 적금발의 머리칼과 드레스 목깃으로 가린 가녀린 목선, 체형에 꼭 맞는 드레스 아래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이 드러났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짧은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웨이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하녀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동시에 웨이브가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하다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서서히 돌아보는 여자의 시선이 그에게 닿는 순간,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 버린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여자.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끝끝내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던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제 발로 이 자리까지 걸어들어왔다.
웨이브는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깊게 그늘진 커다란 눈매와 그린 듯이 아름다운 이목구비, 사람을 묘하게 홀리던 눈빛은 색이 변했어도 여전했다.
“…나가….”
목이 졸린 듯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웨이브는 손을 들어 하녀에게 손짓했다.
“당장, 나가라.”
“예? 예, 공작님.”
영문을 모르는 하녀는 난데없는 지시에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웨이브는 이븐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찰나라도 눈을 떼면 사라져버릴까 봐.
“…어떻게….”
“미안해요. 너무 늦게 찾아와서.”
이븐의 표정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서늘하고 무감한 시선이었다. 그 오랜 세월 애타는 가슴을 끌어안고 살아온 것은 오로지 웨이브 혼자였던 양.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이래….”
웨이브는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어떻게….”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던가. 또 얼마나 긴긴 시간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가. 웨이브는 참담한 마음에 소리 없이 흐느꼈다.
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혈족 아크펠라 대공가. 그런 대공가의 상징은 신의 형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적녀 이비스였다.
달빛이 부서지는 시린 순백의 머리칼과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청보라색의 눈동자, 사람의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에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대공령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도 수많은 남자들이 이비스를 흠모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인접한 영지에 있던 웨이브는 그런 운 좋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열 살 무렵 처음으로 만나 열병처럼 사랑을 앓았고, 황태자비가 되었다는 소식에 포기했다. 그러나 성년이 되는 동시에 파혼당한 이비스의 운명에 모두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웨이브는 부모의 반대로 청혼서조차 보내지 못했던 여린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대공가의 마지막을 눈치채고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가 대공령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어서 웨이브는 대공성 인근 숲을 뒤졌다. 오래된 성에는 무수히 많은 비밀통로가 있으니 분명 누군가는 빠져나왔을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다시 이비스를 만났다.
그녀를 원하던 수많은 청년 중 하나였던 웨이브는 그렇게 이비스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었다.
이그레인 영지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오가기를 반년, 이비스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처음으로 대공가를 멸문으로 몰아넣은 음모가 대공성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으리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이비스를 이그레인 공작저로 데려갈 방법을 모색했다. 외모를 바꿀 수 있다는 연금술사를 찾아 제국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작 부부의 눈을 피해 그 모든 일을 진행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정략혼이 진행되었다.
이비스와 아이들을 두고 결혼할 수는 없었다. 웨이브는 공작 부부에게 이미 여자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고 그때부터 일이 커졌다.
설마 웨이브의 행적을 쫓아 누군가 이비스를 찾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비스와 작은 아들이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기사가 큰아들인 란체만을 데리고 이그레인 영지까지 도망쳐왔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난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탈리온과의 정략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탈리온과의 혼맥은 오래가지 못했다. 네오렌의 여동생이자 웨이브의 아내가 된 반느는 첫 아이를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살해당했다.
그때 웨이브는 깨달았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황실과 깊숙이 연결된 누군가가.
웨이브는 숨는 쪽을 택했다. 탈리온과 외부에 철저히 벽을 세우고 아들 란체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그렇게 평화로운 세월이 흘렀다.
란체는 웨이브가 정해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시카를 얻었고 과거사는 이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시카의 모친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란체는 혼자가 되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다시 엮이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댐 공사를 핑계로 왕래하던 가운데 다시 혼맥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웨이브의 아들 란체와 네오렌의 딸 젤로시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있었다. 과거사는 과거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웨이브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또 그 사고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대형 참사였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손잡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어쩌면 아시카가 아크펠라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제껏 해왔던 대로 모든 것을 덮어두고 숨는 것이었다.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에는 웨이브, 그가 있었다. 웨이브가 품었던 치기 어린 사랑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래서 이비스를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
왜 하필 그녀를 사랑했을까. 왜 그리 필사적으로 그녀를 구했을까. 한때의 감정에 휩쓸려 저지른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평범하게 공작위를 물려받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비스는 내연녀가 되지 않았을 테고, 제 아이들은 그리 억울하고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오렌의 자식들과 여동생 반느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치기 어린 사랑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문제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그렇게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도 평생 이비스의 흔적을 쫓았다. 혹시 추적자가 따라붙을까 봐 제국 안과 밖을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
원망이나 미련보다 더 큰,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 평생 그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 여자의 그림자는 그토록 크고 강력했다.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수십 년간의 행적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아름답지만 빛을 잃어버린 이븐의 눈동자가 깊이 침잠한다.
사랑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었던 그때, 한결같은 남자의 마음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시작은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 끝에서는 놓고 싶지 않았던 남자. 구원자였고 연인이었으며 그녀의 아이들의 아비이기도 했던 사람.
“고마워요. 그동안 대공령 사람들을 도와줬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웨이브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 하지 못한 말이 그뿐일까. 쌓이고 쌓여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마음인 줄 알았는데, 오랜 그리움은 그 긴 시간마저 뛰어넘어버렸다.
사실은 웨이브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있다 한들 웨이브에게도 아들 란체에게도 짐이 되는 상황. 죽음을 위장하고 떠난 그녀의 처지를 모르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한없이 원망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웨이브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변한 것이 없군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참으로 기이했다. 나이가 들어 주름진 제 손과 40여 년 전 그때 그 모습에서 멈춰버린 여자의 얼굴이 확연해서.
“…오래된 귀족 가문들은 암암리에 말하곤 했지요. 대공성에는 황제도 범접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 이븐은 여전히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성이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입니까?”
두 아이를 낳으며 함께했어도 이븐은 웨이브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대공성의 비밀이나 황제와 마이헬러 후작가에 얽힌 이야기도. 웨이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벌어지는 모든 비극을 속수무책으로 감당해야 했었다.
“처음부터 선황제가 대공성을 폐쇄한 것도 그것 때문입니까?”
여전히 대답해주지 않는 여자가 야속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또 다른 비극이 아시카마저 집어삼키게 되는 겁니까?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이비스?”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대답을 외면하려던 것이 아니라는 듯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나는 신에게 묶인 몸이에요. 그는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웨이브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과거에도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대공성의 비밀이었다.
“대공성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은 맞아요. 그러나 황제나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그것은 한때 축복이었으나 이제는 재앙이 되어버린 힘의 근원. 이 제국은 병들어가고 있어요.”
“무슨… 말입니까?”
“대공령에서 병이 번지고 있어요. 각화병이라고 부르는 희귀병이죠.”
“선황제가 대공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저주를 받았다는 그 병 말입니까?”
“그 반대예요. 그건 이미 황족의 핏줄에 내려오는 병이었어요. 정확히는 황족의 피를 타고 이어지는 신의 저주겠죠.”
“그럼, 황제가 대공성을 찾아간 이유도….”
“신벌이니 신을 만나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선황제는 신방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잠들어 있던 존재가 깨어나는 순간부터 대공령은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선황제는 각화병으로 고통받다가 이른 나이에 죽었죠. 현재의 황제는 병이 진행되지 않았는데도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무능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국정을 돌볼 기력이 없다는 말이 맞을 거예요. 트리델리아 황족은 자멸하고 있어요.”
대공령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재앙은 점점 퍼져서 결국 제국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간 이븐이 대공령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