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희미하게 들려온 것은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 작은 소리가 암전되었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급한 숨소리와 이어지는 비명.
“헉.”
“꺄아아악!”
누굴까. 누구인데 저리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는 걸까.
아시카는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끊겨 버린 의식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아서 느껴지는 감각조차 거의 없었다.
“흐읍.”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하게 밀려드는 감각은 비릿한 피냄새였다.
“사람이 죽었다!”
“근위병, 기사들을 불러와!”
다급한 발소리와 절그럭거리는 소음은 기사들의 갑옷이 내는 소리였다. 점점 더 많은 감각이 깨어나면서 비틀린 팔의 통증이 격하게 몰려왔다.
“흐… 누가… 좀….”
목이 졸린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주변의 소란이 커지는 가운데 아시카는 제 몸이 기울어진 채 바닥에 쓰러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기울어진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닥을 흥건히 적신 붉은 웅덩이였다. 역하게 코끝을 찌르는 것은 웅덩이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였다.
“흡.”
아시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드레스에 배어드는 붉은 피와 허벅지 아래를 덮은 물컹한 감각. 불과 조금 전까지 진저리쳐지게 그녀를 위협하던 남자가, 숨이 끊어진 채 제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밀어내고 싶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아시카는 너무 놀라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꽉 다문 입술이 덜덜 떨려서 턱까지 경련을 일으켰다.
“아시카!”
완전히 넋이 나가 있던 그녀를 일깨운 것은 목소리였다. 구원처럼 들려온 드루쉬아의 목소리.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살인사건 현장입니다.”
“사람이 다쳤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거 아냐!”
“사망자는 하나입니다.”
앞을 가로막는 근위 기사 셋과 당장 안으로 들어오려는 드루쉬아, 그 뒤로 경악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시카의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시카, 괜찮아? 아시카, 나 좀 봐.”
끝끝내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드루쉬아를 향해 잠시 망설이던 근위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휴게실 문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여기는 황궁입니다, 탈리온 공작님. 황궁에서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실 겁니까?”
“그래서 황제 폐하의 기사는 지금 공작가를 능멸하는 건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곤경에 처한 레이디를 방치하고 뭘 하자는 거지?”
“오클레인 공자가 살해당했고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 레이디 이그레인입니다. 수사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레이디 이그레인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라도 하려고? 자네 눈은 장식인가? 여기 어디에 무기가 있어!”
그의 말대로였다.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는 휴게실 바닥에는 시신과 아시카만 있을 뿐, 검이나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버럭 내지르는 고함 소리에 아시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루쉬아가 황궁의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검을 당장 치워버리고 안으로 달려들 기세였다.
아시카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드루쉬아를 바라보았다.
“…르쉬아… 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턱을 힘주어 다물었다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괜, 괜찮… 아.”
그러니까 싸우지 마.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마. 아시카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드루쉬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적을 살피고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그런데 그사이 누군가 아시카를 겨냥해 일을 벌이고 말았다.
드루쉬아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이것이 정녕 폐하의 뜻이란 말이지.”
이그레인에게 조금의 융통성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충격에 빠진 아시카를 전시하듯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이.
불과 얼마 전 연회홀에서 일이 벌어졌다. 제국 전체가 들썩일 만큼 엄청난 사건이.
황제는 제 출생에 치명적인 오점을 안게 되었고, 선황제와 황태후가 주도한 과거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대공령의 반역을 입증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다름 아닌 황태후였기 때문이다.
당시 제국은 가문의 멸문을 감수하고 황제에게 진실을 고한 황태후의 결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상대가 황태후였기에 신뢰했고, 그녀가 내세운 증거와 증언이 있었기에 일사천리로 모든 처리가 끝났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황태후가 대공가의 핏줄이 아니었다. 이 충격적인 진실이 어디까지 파문을 일으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고위 귀족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것도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우글거리는 황궁 안에서.
그래서 근위 기사들은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귀족들이 이 사건을 보도록, 더 크게 떠들어대도록.
“잘 알겠네. 폐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드루쉬아는 앞을 가로막은 근위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느리게 다가오는 손이 뭘 하려는지 몰라서 기사는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드루쉬아의 손이 검을 쥔 기사의 손을 움켜쥘 때에야 비로소 뭘 하려는지 알았다.
드루쉬아에게 잡힌 손에 으스러질 듯 고통이 밀려들었다.
“윽.”
손이 잡혔을 뿐이었다. 그래서 기사는 물러나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러나 갑옷을 입지 않아도 드루쉬아의 체구는 컸다. 보통 남자들보다도 훤칠하게 큰 키에 커다란 골격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고요한 분노가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사내. 버티고 버텼지만 검을 쥔 손가락뼈 마디마디가 으스러지는 것 같아서 끝내 손을 놓고야 말았다.
챙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사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으허, 헉.”
기사는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나머지 손으로 움켜쥐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대는 감히 탈리온에게 검을 들이댄 책임을 져야 할 거다.”
그것이 누구의 뜻이든 간에.
“또 나를 막으려는 자가 있나?”
입구를 가로막았던 나머지 기사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수사관이 올 때까지 현장을 지키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수사관은 황궁 안의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궁 안에서의 일은 근위 기사들에게 우선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억지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기사들은 감히 탈리온을 상대로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 드루쉬아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내내 그에게 못 박혀있던 까만 눈동자가 동요했다. 겁에 질린 새까만 눈동자는 사냥꾼에게 잡혀 죽음 직전에 이른 사슴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시카…. 다 괜찮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응?”
차츰 거리를 좁혀오며 드루쉬아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다정하게 라니. 지독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위로가 가득한 목소리를 전했다.
“흐으….”
차마 울지도 못하고 서러운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그 마음을 아는지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었다. 그 사소한 손길에 마음이 놓였다.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확인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가를 덮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눈 감고 있으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아시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가리던 따뜻한 체온이 사라지고 그녀의 하반신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게감이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질척이는 소리와 피비린내가 더욱 진동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상상하지 않기 위해 아시카는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등과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피범벅이 되어버린 몸이 붕 뜨면서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단단한 팔이 피에 흠뻑 젖어버린 아시카를 품에 가두었다. 아무도 더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안고 근위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탈리온으로 공식 서한을 보내도록 해. 이그레인과 나 또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억눌린 분노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흥미롭게 상황을 구경하던 귀족들이 드루쉬아의 흉흉한 시선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드루쉬아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아시카를 안고 빠르게 멀어져갔다. 두 사람이 궁을 나서는 동안에도 더는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 * *
웨이브는 저녁에 저택으로 돌아와서야 소식을 듣고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아시카는?”
“탈리온 공작이 공작저로 모셔갔습니다. 수도 저택의 기사들뿐 아니라 대공령에 있는 기사들에게도 소환령을 내린 모양입니다.”
대외적인 행사에 아시카 혼자 참석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황실이 호시탐탐 이그레인을 노려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웨이브는 정치에 뜻이 없었다. 선대 공작은 그래도 황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웨이브는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평생 사라져버린 이비스의 흔적을 쫓느라 바빴고 아시카를 위해서도 황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애썼다. 한때 아시카가 황태자비로 내정될 뻔했던 경험 이후로는 더더욱 황실을 멀리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예 접점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황실을 멀리하고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 것이 이럴 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웨이브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그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온순했던 손녀는 탈리온 공작과 사랑에 빠졌고, 평생 외면해왔던 대공령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도 모자라 폐쇄되었던 대공성이 열렸다고 하더니 이제는 황태후의 출생이 뒤집어지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왜 하필 아시카에게 이런….’
실은 알고 있었다. 아시카는 파란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아시카가 연관되어 있었다.
드루쉬아의 말대로였다. 이그레인 혼자서는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혼을 서둘렀던 건데.’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시카는 이제 쉽게 제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웨이브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보좌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리고 아까부터 공작님을 뵙기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찾아왔나?”
“네. 어떤 귀부인께서 공작님을 알고 계시다고. 레이디 이그레인 문제로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공작님이 안 계셔서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더니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누군지는 모르고?”
“이븐 시클레어 남작 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아시카의 주변 인물은 대부분 공적인 관계였고 최근에 특이사항이라면 유통 권한을 직권으로 나눠준 상단이 추가된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보고에서도 나온 적 없는 이름이었다.
“응접실로 모시게.”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이 시간까지 저를 기다릴 정도면 아시카와 가벼운 관계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