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11화 (111/153)

#111.

에르윈은 저와 꼭 같은 오드아이를 지닌 황태후를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위를 에워싼 귀족들 모두 두 사람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이게 무슨….”

“세상에 황태후 폐하의 눈 색이….”

충격에 빠진 사람들의 속삭임. 음악 소리가 멈춰버린 홀 안에 감도는 침묵.

황금안과 청록안의 오드아이는 마이헬러 혈족만의 특징이었다. 청보라빛 눈동자가 아크펠라의 상징이듯 어떤 방법으로도 위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피의 증거.

황태후는 뒤늦게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서 불길함을 읽었다.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제 눈을 더듬었다. 스스로 볼 수 없는 제 눈을 그렇게라도 확인하려는 양.

‘내가 약을 안 먹었나? 그럴 리가. 아냐.’

뒤늦게 말리기 위해 다가온 시녀들이 황태후의 눈동자를 확인하고 얼어붙었다.

“폐, 폐하….”

“왜 그래? 다들 왜 이러는 거야?”

황태후의 시야가 자꾸만 흐릿해졌다. 마치 물결 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저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도, 뒤늦게 달려오는 아들의 모습도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이건 악몽이다. 평생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악몽. 권력의 최고 정점에 앉은 순간 그녀의 정체가 까발려지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그런 악몽.

“뭣들 하느냐! 당장 어머니를 모셔가지 않고!”

황제조차 모후를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황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황급히 자리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태후는 사방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헤맸다.

“아냐, 이건 꿈이야.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황태후는 저를 잡으려던 시녀를 거칠게 내쳤다. 뭐가 잘못된 건지 알아야 한다. 해명을 해야 한다. 이건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폐하를 모시라 하지 않았느냐!”

황후의 시녀들까지 동원되어 황태후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황태후는 거칠게 저항했다.

“아냐, 아니라니까!”

황태후는 저를 잡으려던 시녀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연로한 여자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센 저항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황태후는 이미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귀족들이 귀엣말을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눈에 보였다.

‘황태후께서는 대공가의 핏줄이 아니야.’

‘마이헬러 후작가의 사생아였어.’

‘불륜으로 태어난 더러운 피의 증거.’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아아아악!”

* * *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지켜보던 사람들만큼이나 아시카도 충격을 받았다. 황태후가 대공가의 혈족이 아닌 마이헬러의 사생아였다니.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븐은 이걸 위해 오늘 참석한 거야.’

눈동자 색을 바꾼다는 연금술사의 약. 그리고 변해버린 색을 원래대로 돌린다는 약. 어떻게 약을 먹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이븐을 밖으로 내보내야 해.’

아시카는 사람들의 이목이 황태후에게 집중되어있는 사이 밖으로 향했다. 홀을 빠져나가기 직전 마이헬러 후작의 시선이 황태후가 아닌 저에게 향해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연회홀을 나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다급히 달려가는 시종들이 보였다. 황궁의 근위 기사들도 함께 인 걸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아시카는 여러 개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문득 그녀의 등 뒤로 다급히 달려오는 여자가 있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저를 아시나요?”

“네, 말씀을 전달해달라고 들었어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분이 2층의 레이디 전용 휴게실로 와달라고요. 급하다고 하시네요.”

이븐이었다. 이븐 혼자서는 조용히 황궁을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아시카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휴게실을 향해 달렸다.

황제 일가가 모두 연회홀에 있어서인지 2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은 사람을 시켜 마차에 있는 여분의 드레스를 가져와 갈아입히고.’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황태후에게 쏠린 탓에 이븐을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휴게실에 숨어있다가 귀족들이 빠져나갈 때 묻어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마이헬러 후작이 봤을까?’

이븐이 연회홀에 머물렀던 것은 잠깐이었다. 마이헬러 후작은 멀리 있었기에 뒷모습만 봤을 가능성도 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시카는 휴게실 문을 열었다.

“헉.”

그러나 그곳에서 아시카를 기다린 것은 예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놀라서 다시 나가려는 순간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악!”

비명을 지르려던 입술은 커다란 손에 의해 짓눌렸다. 떠밀린 몸이 그대로 벽에 부딪히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안녕, 매정한 나의 전 약혼녀.”

“흐읍, 읍!”

“약혼 2년 동안에도 이렇게 친밀한 접촉은 해본 적이 없는데. 이거 기뻐해야 하나?”

형형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것은 코랄이었다.

“원래 이렇게 서두를 계획이 아니었는데. 연회홀에서 난리가 났다며?”

아시카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코랄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코랄은 그마저도 단숨에 잡아챈 뒤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여 온몸으로 짓눌렀다.

“아악!”

코랄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양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몸부림쳐보려 해도 체중으로 짓눌려 저항하기가 어려웠다.

“곧 근위 기사가 움직이고 연회홀이 폐쇄될 거야. 그런데 나는 기사들이 깔린 황궁 한복판에서 너를 데리고 나갈 거고. 아직도 모르겠어?”

아시카는 입을 틀어막힌 채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게 가능할 리 없다. 납치라니. 그것도 기사들이 깔린 황궁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 황궁 사람들을 매수하고 고위 귀족 납치가 가능하게 만들 사람 말이야. 네가 왜 그분의 눈 밖에 났는지 모르겠다만, 덕분에 나는 기회를 얻었지. 너를 차지할 기회.”

번들거리는 회색 눈동자는 아시카가 알던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변질되어버린 감정은 분노와 집착, 그뿐이었다.

“흐으, 읍!”

“윽.”

아시카는 도리질을 치며 있는 힘껏 코랄을 몸으로 밀어냈다. 코랄이 중심을 잃고 몸이 휘청이는 찰나 간신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하. 이거, 정말.”

코랄은 도망치는 그녀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시카는 쓰러질 듯 걸음을 옮겨 휴게실 안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휴게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소파와 테이블을 두고 코랄이 문을 가로막고 서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걸 깨달은 코랄이 쫓는 걸 멈췄다.

“파혼할 때도 느꼈지만, 당신 참 당돌해. 겁이 많아서 내가 입술만 들이밀어도 벌벌 떨던 여자가 어떻게 사람을 납치해서 파혼까지 밀어붙일 생각을 했을까.”

“하아, 하…. 가까이 오지 마.”

아시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보석으로 장식해 틀어 올린 머리칼이 반은 쏟아져 흐트러졌고 옷매무새도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새카만 눈동자만은 빛을 잃지 않았다. 노기 어린 검은 눈동자가 코랄을 노려보았다.

“내가 무서워서 떨었을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싫어서였어. 네 시선만 받아도 징그럽게 몸서리가 쳐져서.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해?”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제법이야. 남자가 생겼다더니 진짜인가 봐?”

아시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드루쉬아가 이런 놈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싫었다. 그러나 부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코랄에게는 충분한 답이 되었다.

“하. 2년이나 나를 물 먹이더니, 다른 놈이랑 붙어먹었어? 양심도 없네, 내 약혼녀는.”

“어차피 당신과는 결혼할 일 없었어.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이지. 그러니까 그만둬. 이런다고 나를 데리고 뭘 할 수 있지? 납치?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이그레인은 제국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녀를 쫓을 것이다. 죽여서 어딘가에 파묻어버리지 않는 한 아시카를 숨길 방법은 없었다.

협박에 가까운 아시카의 말에도 코랄은 비죽비죽 웃었다.

“원래대로면 어려웠겠지. 그럴 엄두도 못 냈을 거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재미난 얘기를 들었거든.”

자신만만한 얼굴로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가 제국에서 살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며?”

확신 어린 어조에 아시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켕기는 게 있긴 한가 보네. 듣기로는 네가 납치되어 사라지든 죽어 없어지든 별로 상관없다고 하던데?”

“나는 이그레인 소공작이야. 나를 건드는 순간부터 당신과 오클레인 후작가는 이그레인과 싸워야 할 거야.”

이그레인뿐인가. 드루쉬아 또한 결코 코랄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아니라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서 그녀를 찾아내고 범인을 찾아 산산조각내려 들 터였다. 분명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후회가 되었다. 드루쉬아가 수차례 그녀에게 했던 부탁이었다. 제발 저를 믿고 기대어달라고. 도와주겠다고. 제 손을 잡으라고. 그 간곡한 도움의 손길을 내내 뿌리쳐온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이야.

“큭.”

코랄은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언제나 제 위에서 내려다보던 여자가 구석에 몰려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 즐거웠다.

“이그레인과 탈리온. 둘이 손잡으면 무적일 것 같지? 그런데 어쩌나. 당신의 바람대로는 안 될 텐데.”

아시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오클레인 공자, 누구의 지시를 받은 거지?”

“앞으로 제국에 파란이 일 텐데, 내 곁에서 그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설마…, 마이헬러 후작이야?”

연회홀을 떠나기 직전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후작이 떠올랐다. 이븐의 정체를 알고 오랫동안 집착해온 남자. 어쩌면 아시카의 비밀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를 상대였다.

코랄의 얼굴이 움찔하더니 아시카에게 걸음을 옮겼다.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신 형님, 진짜 마차사고로 죽은 것 맞아?”

소식을 들었을 때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을 했었다.

“머리 굴려봐야 소용없어. 앞으로 당신이 머리 쓸 일은 없을 거야. 몸 쓸 일만 남았지.”

쿡쿡, 흘리는 웃음이 비열하고도 음흉하다. 아시카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형님을 죽이고 얻은 게 소후작의 자리야? 그래? 그래서 마이헬러 후작과 손을 잡았어?”

“아아, 조용하던 당신이 좋았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졌지?”

“후작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후작의 정체를 안다면… 악!”

코랄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도망치려던 아시카의 손을 낚아채고 주머니 속에서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거 알아? 이 약이면 너를 내 인형으로 만들 수 있다더라. 못난 형님이 뭉개고 있던 자리도, 오만하게 굴던 너도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되는 거야.”

아시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인형의 사술!’

연금술사의 약이다. 하마터면 드루쉬아를 완전히 무너뜨릴 뻔했던 약. 드루쉬아조차 약에 취해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지 않았나.

“그만, 오클레인 공자. 코랄!”

코랄은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리기 위해 입속으로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아시카는 잡히지 않은 손을 휘저으며 있는 힘껏 코랄의 손을 물어뜯었다.

“으악!”

“놔! 이 정신병자!”

놀란 코랄에 의해 몸이 확 떠밀렸다.

“이게 정말!”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아시카의 뒷덜미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강한 충격을 받은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시야가 뒤집히고 머리가 단단한 바닥에 또다시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아시카의 의식도 그대로 뚝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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