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황궁에서 가장 큰 연회홀인 태양홀이 개방되었다. 수백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3층 높이까지 솟은 높은 천장이 압도적인 연회홀이었다.
가장 중심부 앞쪽에는 황좌를 에워싼 연단이 계단식으로 이어지고 그 아래에는 귀족들을 위한 테이블이 늘어서 있다. 태양홀의 내벽은 이름처럼 황금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마감되었고 각각의 벽에는 거대한 기둥과 연결된 세 개의 아치형 입구가 있었다.
천장의 정 중앙에 높이 솟은 반구형 돔에는 태양을 형상화한 황금빛 스테인드글라스가 조명과 함께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났다.
아시카는 아까부터 홀 안쪽을 곁눈질하며 티 나지 않게 주위를 살폈다.
‘어디 가신 거야?’
분명 들어올 때는 함께였는데 이븐은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웨이브는 출장을 핑계로 공식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마이헬러 후작 또한 와병을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마이헬러 후작이 연회에 참석한 것이다. 연회 중반 즈음,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에 나타나 지금껏 귀족들에게 주어진 테이블을 지키고 있었다.
아시카의 불안한 시선이 마이헬러 후작과 마주쳤다. 움찔,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후작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녀를 향해 올려 보였다.
아시카는 반사적으로 외면했다.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후작의 여유로운 태도가 오히려 불안을 부추겼다. 알고 있기에 한발 물러나 지켜보는 듯한 느긋함.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드루쉬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대신 엄청난 소문에 휩싸이겠지.’
그래서 가능한 한 드루쉬아를 피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반대로 드루쉬아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고. 아시카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외줄 타기를 하는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 아직 무기와 방패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전쟁터 한복판에 떠밀린 기분이었다.
수도에 돌아온 뒤 아시카는 마이헬러 후작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쫓았다. 정보상인, 잔느와 연결된 용병들, 그녀가 관리하는 상단과 거래처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나오는 것이 없었다. 관례적인 행적 외에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영지의 소문이나 사업, 그 아래 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마이헬러 후작은 그저 부유한 은둔 귀족일 뿐이었다.
‘그게 오히려 말이 안 되지.’
지나치게 깨끗할수록 숨겨진 것이 많다는 의미였다.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던 아시카는 바로 옆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슬쩍 어깨가 부딪히고 화들짝 놀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딴 데 팔려서.”
유독 높은 톤에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 이런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레이디 이그레인이셨군요.”
아시카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마도 상대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반가움은 아닐 것이다.
“레이디 슈베른?”
글레노아였다. 옆에 있는 남자가 아시카에게 인사하며 알은 채를 해왔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글레노아에게 쏠렸다.
“이런 곳에 와야지만 레이디 이그레인을 만날 수 있군요.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는데 한 번도 답장을 주지 않으셔서 속상했어요.”
“그랬나요? 저는 받은 게 없는데. 서신 담당자에게 한번 확인해봐야겠네요.”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코랄과 관련된 연락은 웨이브가 철저히 잘라냈던 걸 기억한다. 글레노아의 연락 또한 받아줄 이유가 없었고.
아시카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차분히 대꾸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으셨죠?”
“생각해보니까 그때 감사 인사를 못 했더라고요. 제게 좋은 충고를 주셨었는데.”
그게 과연 감사한 일이었을까. 활짝 웃는 글레노아의 얼굴에서는 분명한 의도를 읽기가 어려웠다.
“그 인사, 지금 받은 걸로 하죠.”
대화를 길게 끌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글레노아와 마주치자 연회홀 어딘가에 있을 또 한 사람이 생각났다.
‘분명 코랄도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급격히 피로가 몰려온다. 당장 연회장을 떠나고 싶었지만 우선은 이븐의 안전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찾으시는 사람이 있나 보죠?”
글레노아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진작부터 아시카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레이디 슈베른, 파트너분께서 기다리고 계시네요. 그럼 저는 이만.”
글레노아의 인사까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서로 반갑게 인사할 사이도 아니었고. 자리를 옮기던 아시카의 시선이 문득 연회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아, 찾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이븐이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또 다른 의문.
‘뭘 보고 있는 거지?’
이븐이 바라보는 곳으로 아시카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그곳은 황족들이 모여있는 가장 높은 상석이었다.
황태자의 탄신연회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상석에서 황좌를 지키는 황제와 황후만이 다소 무료한 얼굴로 인사를 청하는 귀족들을 받아주었다.
인사가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여유롭게 앉아있던 황후가 황태후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황태후 폐하, 오랜만에 나오셨는데 자리가 즐겁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귀부인들을 따로 불러 편한 자리를 마련해드릴까요?”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내 사는 곳이 황궁에서 좀 멀어야지요. 아무도 걸음 하지 않은지 한참 되어서 사람들이 영 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태자비가 수시로 왕래하지 않습니까. 아직 어려서 부족한 게 많은 아이이니 가르침 주시면 잘 따를 겁니다.”
황태후의 눈가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황후의 얼굴은 꽃처럼 화사했다. 한때는 입안의 혀처럼 굴던 레이디 싱클라델트가 이제는 황태후를 내려다보는 거만한 황후가 되었다.
현재 황후의 가문인 싱클라델트 공작가는 황태후를 지지하던 가장 큰 세력 가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레이디 싱클라델트는 황태후의 어린 시녀 중 하나였다.
처음 아들의 배우자를 선별할 때 황태후는 입맛대로 부리고자 한미한 마제스 백작가의 레이디를 황후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황후가 된 클레멘 마제스는 황제가 모친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도왔고 이를 위해 번번이 황태후와 반목했다.
이에 황태후는 클레멘을 내치고 대체할 후보로 레이디 싱클라델트를 낙점했다. 그러나 레이디 싱클라델트는 황후자리를 차지한 뒤 태도가 돌변했다. 황태후를 궁 밖으로 내보내는 데 가장 앞장선 것이 황후와 그 가문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황후 클레멘을 폐하는 과정에서 황태후는 아들과 심하게 충돌한 뒤였다. 더 싸웠다가는 그나마 남아있는 황제의 신뢰마저 잃을까 봐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야만 했다.
‘애지중지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황태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불렀다.
“어째 오늘따라 계속 목이 타는구나.”
“가을이라 불을 피운데다가 참석자가 많아서 실내가 좀 덥습니다, 폐하.”
시녀는 때마침 시원하게 보관해두었던 와인을 따라 내밀었다.
“시원한 물은 없느냐? 목이 마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 다시 가서 준비해오라 이르겠습니다.”
“아니, 됐다.”
어째 하나같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오래도록 저를 보필해온 시녀도, 아침에 유독 목이 타는 음식을 내준 하녀장도 마찬가지였다.
황태후는 받아든 잔을 단숨에 들이켜 비웠다. 평소보다 시큼한 끝맛이 영 거슬렸다.
“오늘은 술맛도 성에 안 차나. 오랜만에 궁에 왔는데 어째 손님보다 못한 대접이야.”
“폐하, 와인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음료를 찾아다 드릴까요?”
“아니, 그보다….”
황태후는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순간 술기운 탓에 눈에 착시가 일어난 줄 알았다.
“저, 저기….”
“왜 그러십니까, 폐하?”
“네 눈에도 저 여자가 보이느냐?”
“누구 말씀입니까?”
“저기 저 여자. 드레스가 왜 하필 청보라색이야!”
“아니, 폐하. 저건 그냥 흔한 보라색이옵니다.”
시녀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여자가 황태후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아니야, 저 여자… 얼굴, 얼굴이 보이느냐?”
표정이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황태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여자의 시선은 정확히 황태후에게 향해있었다. 분명 다른 색의 눈동자인데 그 속에서 지나치게 익숙한 사람이 느껴졌다.
“너… 너는….”
황태후는 체통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아찔할 만큼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눈앞에 다가오는 여자가 현실이 아닌 꿈인 양 모든 감각이 비현실적으로 멀어진다. 윙윙거리는 귓가에 어젯밤 악몽 속에서 여자가 속삭이던 말들이 맴돌았다.
「이제 시작이야, 일레르나. 네가 쌓아 올린 거짓과 탐욕의 탑은 내가 밑바닥에서부터 무너뜨려 줄게.」
여자는 가만히 황태후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분명한 조소였다.
보고 또 봐서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악몽 같은 비웃음. 수십 년 동안 악몽 속에서 황태후를 비웃고 저주하며 시시각각 목을 조여오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아아아악! 이비스!”
황태후는 성난 사자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앞을 가로막은 테이블에 몸이 부딪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챙그랑, 챙.
사납게 휘젓는 손길에 테이블 위의 식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반쯤 정신이 나간 황태후는 놀란 귀족들을 밀쳐내며 달려나갔다.
“저, 저런!”
“세상에! 어쩜 좋아. 광증이 있으시다더니 진짜였나 봐.”
“누가 말려야 하지 않아요?”
경악한 귀족들이 수군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리둥절해 있기는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회가 한창인 홀 중앙에서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비스! 저주받을 이비스! 끝내 네가 나를 망치려느냐.”
황태후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 여자가 웃었다. 감히 너 따위는 하찮다는 듯 깔깔 웃으며 등을 돌렸다. 적어도 황태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려던 황태후는 제 드레스 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잡아라! 저 여자를 잡아! 저 여자가… 여자가!”
“진정하십시오. 폐하!”
가까이 있던 귀족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황태후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아니라 저 여자를 잡으라니까! 어디 갔느냐. 조금 전 그 여자는!”
황태후는 몸을 일으킨 뒤에도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주위를 에워싼 귀족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튀어나올 듯이 커진 눈동자, 경악으로 벌어진 입술, 감히 황태후의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가장 놀란 사람은 황태후를 일으켜준 상대였다.
“…마이헬러 공자? 왜….”
눈앞에 있는 상대는 에르윈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고 다시 황태후를 살폈다.
에르윈의 눈앞에 있는 연로한 여인은 황태후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짙은 검갈색이었던 황태후의 눈동자 색이 달라졌다.
한쪽은 청록색, 또 한쪽은 금색에 가까운 황금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