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09화 (109/153)

#109.

“어떻게… 아시카, 너도 알고 있었던 게냐?”

“조부님.”

“그래, 지난번이겠구나. 네가 대공령에 갔을 때. 대공령이 아니라 대공성에 다녀온 거냐? 정말로?”

아시카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네가 미쳤구나. 거기가 어디라고 가!”

“조부님께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셨으니까요. 확인이 필요했어요.”

대체 뭘 확인하려 했느냐고, 말하려던 웨이브는 입을 닫았다. 계속된 회피. 내내 숨겨왔던 진실을 앞에 두고 또다시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웨이브는 아시카의 시선을 피하며 오래도록 묻어둔 진심을 입에 올렸다.

“제국의 어느 누구도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결합을 원치 않아.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서로 미워하고 손가락질하는 게 나아.”

“그래서였습니까? 이제껏 양쪽 가문의 분쟁을 방관하신 이유가?”

“탈리온 공작, 섣부른 치기로 평화를 깨지 마시오. 공작께서는 절대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해.”

“그러니까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제국의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그걸 몰라서 이 지경이 된 줄 아시오!”

웨이브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드루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그레인 공작님과 저희 조부님, 두 분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웨이브가 미간을 찡그렸다.

“두 분 모두 오래된 비밀을 가슴에 안고 침묵과 방관이 최선이라는 착각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아시카를 지키고 싶다면 제가 내미는 손을 잡으셔야 합니다.”

웨이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시카조차 놀라서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아시카, 너….”

당황한 시선이 아시카와 드루쉬아를 번갈아 오갔다. 평정을 가장했지만 웨이브의 검은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카조차 드루쉬아가 뱉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동요를 알아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쥔 손에 부드럽게 힘이 들어갔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 아시카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당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와주세요, 조부님. 대공령에 관한 모든 자료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세요.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도요.”

아시카의 당당한 요구가 더는 놀랍지 않았다. 착잡하고도 혼란스러운 표정이 웨이브의 복잡한 심사를 드러낸다.

응접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시카는 긴장된 얼굴로 웨이브의 대답을 기다렸고 드루쉬아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요구보다 아시카의 판단이 우선이라는 양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웨이브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놀라고야 만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웨이브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비밀 서고의 열쇠는 집사에게 받아가거라.”

“아….”

허락이 떨어질 줄 몰랐던 아시카는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기사단에 대한 명령권은 일부만 인정한다. 펄번에게 말해두도록 하지.”

애당초 가주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아시카가 기사단을 지휘한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정말 급박한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아시카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짤막한 답을 내리고 웨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저기, 드릴 말씀이….”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조부님.”

웨이브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듯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시카가 뒤따라가려고 일어났지만 드루쉬아가 잡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이미 충분히 양보하신 것 같은데.”

아시카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정작 드루쉬아는 웨이브에게서 얻어낸 것이 없었다. 어떤 약속이나 담보도 받아내지 못하고 아시카를 지지해준 것이 다였다.

“조부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었어요?”

“설마. 내가 이그레인에 온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야.”

“르쉬아,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왜 아니야? 그게 아니면 우리가 뭔가 다른 얘기를 해야 하나?”

아시카의 말문이 막혔다. 드루쉬아가 당장 질문을 쏟아내면 곤란한 것은 그녀였다. 그걸 아는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그가 쏟아낼 무수히 많은 질문에 대해 답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드루쉬아는 그녀가 예상한 어떤 질문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하얀 천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실은 이걸 주려고 왔어.”

“아.”

아시카의 목걸이였다.

“그런데 보석이 또 깨졌어. 물론 내가 깨 먹은 건 아니야.”

“알아요. 그렇게 쉽게 깨지는 보석도 아니고요.”

아시카가 목걸이를 집어 들려고 하자 드루쉬아가 목걸이 쥔 손을 뒤로 물렸다. 의아한 시선에 그는 또 웃었다. 그 웃음이 벽을 세우려던 그녀의 마음을 자꾸만 뒤흔든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손바닥을 펼쳐 잡은 뒤 손수건 채로 그 위에 얹어주었다.

“목걸이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거고, 내가 주려던 건 이거야.”

“손수건… 이요?”

“그냥 손수건이 아니야. 잘 봐.”

아시카는 목걸이를 한 손에 들고 손수건을 펼쳤다. 그리고 이내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르쉬아, 이건….”

“보여? 여기 적힌 두 개의 이름.”

아시카와 드루쉬아의 풀네임이 나란히 적혀있는 손수건.

두 남녀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은 전통적인 청혼 선물이었다. 이는 귀족이나 평민의 구분 없이, 가문의 조건이나 협의와 상관없이 오로지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순수한 청혼의 의미였다.

청혼을 수락하면 결혼식 당일 손수건을 혼약의 제단 위에 올려놓고 맹세를 하며, 청혼을 거부할 경우 불태워버린다.

이건 진짜 청혼이었다. 드루쉬아가 아시카에게 직접 하는 청혼.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지. 청혼서를 보내기 전에 이걸 먼저 줬어야 했어.”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아시카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쿵쿵 울리는 진동과 함께 얼굴에도 열이 오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가 차게 식었다. 이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드루쉬아는 얼마나 큰 위험을 짊어지게 되는 걸까. 한껏 부풀어 오르던 마음이 푹 꺼지고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드루쉬아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어떤 대답도 독촉하지 않은 채.

아시카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행복했던 찰나의 감정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쓰디쓴 현실뿐.

“이건… 르쉬아, 받을 수 없어요.”

“아시카.”

“조부님 때문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그래요. 미안해요.”

분명한 거절에도 드루쉬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 드루쉬아는 실망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며 눅눅하게 젖어 드는 새카만 눈동자. 당장 울 것만 같은 아시카의 얼굴이 그의 심장을 자근자근 저며내는 느낌이었다.

“그런 눈을 하고서, 나를 원치 않는다는 되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지.”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조금 더 짙어진 푸른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 이러면 대답이 될까?”

아시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를 진심. 그러나 드루쉬아가 이렇게 제 속내를 모두 내보일 줄은 몰랐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녀가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드루쉬아는 재차 속삭였다.

드루쉬아의 태도가 뭔가 달라졌다. 종잡을 수 없는 그녀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답답해하던 태도도 사라졌다.

푸른 눈동자가 이글이글 끓는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 잡아먹을 듯이 아시카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내려앉을 때까지 아시카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뜨겁고 다소 조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며 말캉한 혀가 밀려들어 왔다. 달큰한 타액과 향취가 엉키는 순간 드루쉬아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굳어있던 작은 혀를 휘감아 강한 힘으로 빨아들이면서 그녀가 내쉬는 숨결마저 집어삼켰다.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타액을 모조리 훑어 마시고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혀로 들쑤셨다.

“흐… 으읍.”

거부하기는커녕 아찔한 감각이 등줄기를 따라 흐르고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거친 입맞춤에 반응했다. 그의 팔이 등허리를 파고들어 바짝 끌어당기고 목덜미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빈틈없이 꽉 맞물린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박동이 온몸을 진동하며 거세게 뛰었다.

일방적으로 시작했던 입맞춤은 어느새 서로를 갈구하는 몸짓으로 변해갔다. 아시카는 양팔을 그의 목에 감아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서로를 탐하는 질척한 소리와 달뜬 숨소리. 서로를 가로막은 외투마저 견디기 어려운 장애물인 것처럼 비벼대는 소리가 야하게 들려온다. 마침내 생명줄인 양 그녀를 탐하던 입술이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하아….”

끈질기게 뒤엉켰던 입술이 떨어지며 그녀의 뺨과 콧잔등,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촉, 촉. 격렬한 입맞춤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잘한 입맞춤을 얼굴 위에 퍼부었다. 소중한 상대를 애타게 그리듯 그렇게.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꽉 끌어당겨 안으며 자신의 품속에 가두었다.

“…이제 살 것 같아.”

뜨겁고 긴 숨을 토해내며 한 손으로는 아시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격한 호흡이 진정되도록. 자신을 추스르는 것인지 그녀를 달래려는 것인지. 그렇게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애틋해서 아시카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기대어오는 몸짓에서 느껴지는 안도감. 아시카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정수리 위로 긴 한숨이 내려앉았다.

“아시카, 이젠 내게서 도망가지 마.”

내가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줄 테니까.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나른하게 귀에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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