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08화 (108/153)

#108.

본채에서는 아까부터 사용인들이 밖으로 나와 은근슬쩍 저택의 정문을 살펴보았다. 방문객을 알리는 하인이 정문과 본채를 오간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였다.

“오늘 안에는 들어올 수 있을까?”

“마차 뒤에 기사들 보여? 작정하고 밀고 들어오면 못 막을걸?”

“에이, 아무리 그래도 명망 있는 가문에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굴겠어?”

“손님을 문전박대하고 계시는 공작님은 어떻고?”

하인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동료에게 속삭였다.

“사전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으니까 그렇지.”

“그것도 나름이지. 저쪽이 어디 가서 문전박대당할 가문은 아니잖아.”

오늘 들어온다, 아니다, 쫓겨날 것이다.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사용인들은 슬그머니 저희끼리 내기를 걸었다. 그렇게 또 얼마가 지나고 마침내 정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어, 어. 들어온다. 들어와!”

“어이쿠, 기사단장님 난리 나셨네.”

마차가 정문을 통과하는 동시에 저택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본채 앞에 대기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마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커다란 마차 뒤로 세 대의 마차가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첫 번째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손님을 맞이한 것은 펄번이었다. 펄번의 표정은 기가 막힌 듯도 했고 반쯤은 체념한 듯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그레인의 기사단장 펄번 콜테른입니다.”

“반갑지도 않으면서 반가운 척하지 마.”

드루쉬아가 펄번의 곁을 지나면서 툭 뱉었다. 펄번은 드루쉬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자꾸 이러실 겁니까? 공작님이 이러시면 난처해지는 건 아가씨뿐입니다.”

“산이 있으면 넘어야 하고, 벽이 가로막았으면 문을 만들어야지. 고지가 눈앞인데 손 놓고 있으면 누가 길을 만들어주나?”

“하, 말은 잘하십니다.”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잘해.”

“공작님, 적당히 하십시오.”

펄번은 어금니를 사려 물며 드루쉬아의 뒤를 쫓았다. 그러는 사이 짐꾼들이 마차 안에서 커다란 궤짝을 들어 현관 앞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냥 궤짝이 아니라 고가의 장미목으로 제작된 것들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은 조명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빛을 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보통은 고위 귀족이나 재력 가문에서 결혼 예물을 보내는 등 특별한 때에만 사용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거기다 각각의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제국 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특수한 수입 원단과 장식, 소품, 액세서리와 같은 연회 참석을 위한 준비 물품이었다.

탈리온이라는 이름에 경계하던 사용인들이 홀 한가운데 줄줄이 늘어놓는 궤짝들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중에는 훈련장에서 막 달려온 미아도 있었다.

누구도 선뜻 선물상자를 살펴보지 못했다. 선물을 들고 온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거 모피 아냐?”

하녀 하나가 옆에 있던 동료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처럼 살짝 열린 궤짝 안에서 하얀 모피가 밖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뚜껑이 덜 닫혀있네요?”

아무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미아가 걸음을 옮겨 상자 뚜껑을 슬쩍 들어 보였다. 순간 안에 담겨있던 순백의 덩어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헉.”

“모피야. 그것도 완전한 하얀색.”

“저게 어디서 온 물건이야?”

눈이 많지 않은 제국에서는 겨울에도 하얀 털을 지닌 짐승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때문에 흰 모피가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중에 가져다 놓은 것 중에는 긴 상자 하나에 뚜껑 두 개가 나란히 달린 장궤도 있었다. 워낙 부피가 커서 성인 남자 둘이 함께 들어야 하는 장궤는 주로 결혼 선물을 담아 보낼 때 쓰는 물건이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사용인들이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저희도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중인가 하는 의문이 조용한 가운데 오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웨이브는 밖에 나오지 않아서 이 엄청난 양의 선물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 대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시카가 말을 잃고 홀 한가운데에서 멈춰섰다.

“아시카.”

그녀를 발견하고 드루쉬아는 거침없이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가을 하늘처럼 쨍하니 파란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의 빛을 내며 가까워진다.

“…이건 대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뭘 하려는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기세가 강렬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하지 못했다. 도망치려 했다가는 당장 사지를 꽁꽁 옭아매서 잡아끌고 갈 것만 같은 집요함이 그녀를 향한 시선 속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장 잡아먹을 것처럼 다가오던 남자가 딱 한 걸음 앞에서 멈춰섰다. 그것이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인 양.

아시카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알 수 없는 희열로 번뜩였다. 짙푸른 색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이었다.

“저기….”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긴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드루쉬아는 빠르게 아시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과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 하얗게 드러난 목선, 단정하게 앞을 여미고 가슴께에서 리본을 묶은 드레스, 손등을 덮은 옷소매의 자잘한 레이스까지 하나하나 다 뜯어보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서 멈췄다.

“손은 왜 그래?”

마침내 드루쉬아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쓰는 것이 뭔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아시카는 살짝 피가 맺힌 손끝을 감싸 쥐었다.

“종이에 베었어요.”

실은 드루쉬아가 왔다는 말에 놀라서 허둥대다가 손을 다쳤다. 손가락 끝에 난 작은 상처였는데 그걸 따져 물을 줄이야.

‘뭐야, 흠집이 있나 살펴보는 거였어?’

마침내 성에 찰 만큼 샅샅이 살펴봤는지 드루쉬아의 시선이 다시 아시카의 얼굴로 올라왔다. 조금 전보다는 숨통이 트이는 시선이 이번에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느냐고, 왜 그러느냐고 묻지 못한 것은 파란 눈동자가 습해 보였기 때문이다.

“…르쉬아.”

그 한 번의 부름으로 울 것처럼 젖어 들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입술을 당겨 환하게 그려지는 미소가 생소하면서도 잘 어울려서 또다시 심장이 술렁거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고 아시카는 시선을 피했다.

“크흠, 흠. 저… 손님께선 응접실로….”

둘 사이의 긴장을 깨트린 것은 웨이브의 보좌관이었다. 숨죽인 사용인과 기사들을 대신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 응접실. 그래.”

내내 아시카에게 달라붙어 있던 진득한 시선이 간신히 떨어졌다.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은 나란히 보좌관의 뒤를 따라 2층의 응접실까지 가게 되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기다리던 웨이브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차게 굳었다. 아시카와 드루쉬아가 함께 있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손님맞이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잠시뿐, 상대에게 의자를 권하지도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시카, 손님을 맞이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그만 여기서 나가라는 완곡한 지시였다.

예전 같으면 온순하게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 조부의 뜻을 거스르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아시카가 대답을 망설이자 드루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그레인 공작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인사를 드루쉬아는 천연덕스럽게 미소까지 지어가며 입에 올렸다.

웨이브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그의 입장에서 드루쉬아는 불한당 같은 침입자였다. 예고 없이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생떼를 쓰는 침입자.

아시카조차 며칠 만에 보는 웨이브의 얼굴이었다. 일부러 날을 그렇게 골랐는지 내내 자리를 비웠던 웨이브가 마침 귀가한 날 드루쉬아가 찾아온 것이다.

“별고가 없었는데 덕분에 별고가 생기려 하오. 그러니 내 손녀는 일단 보냈으면 좋겠소.”

“아니요. 당사자를 제외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든 그건 내 선에서 정리해야 할 문제요.”

“아시카가 아직도 온실 안의 화초처럼 마냥 보호가 필요한 아이인 줄 아십니까?”

직설적인 일침에 의자 손잡이를 움켜쥔 웨이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드루쉬아에게 반박하는 대신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아시카. 내 말 들었느냐?”

“…죄송합니다, 조부님.”

망설이던 아시카는 거절의 뜻을 드러내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웨이브의 노기 어린 시선은 아시카가 아닌 드루쉬아에게 향했다. 뭘 어쨌길래 저 온순하던 아이가 제게 반항을 하느냐,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무려 한 달이었다. 아시카가 집을 나가 자취를 감췄던 것이. 저돌적으로 파혼을 추진하면서 웨이브를 놀라게 하더니, 강제로 결혼을 밀어붙이자 집을 나가버렸다.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저 강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

어리고 온순하게만 봤던 것이 실은 본모습이 아니었던 걸까. 제 핏줄이지만 참으로 속내를 알기 어려운 아이였다.

아시카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웨이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라.”

“네.”

아시카는 조용히 대답하며 웨이브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드루쉬아는 자리에 앉는 대신 아시카의 뒤에 섰다. 마치 호위 기사처럼, 거기가 제 자리라는 양.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웨이브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서 이리 무례한 방문을 한 이유는?”

다소 무례하게 여겨질 말투에도 드루쉬아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때보다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그레인 공작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이미 협조는 충분히 하고 있지 않소? 탈리온 공작이 말하는 협조는 설마 혼맥을 말함인가?”

“거기까지 허락할 의사가 있습니까?”

“르쉬아!”

아시카가 뒤를 돌아보자 드루쉬아는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감싸 쥐었다.

“이그레인 공작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이그레인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혼맥이든 뭐든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동맹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 드루쉬아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웨이브는 미간을 좁히며 드루쉬아의 의도를 가늠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앞으로 벌어질 일? 지난번과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오? 그때도 말했을 텐데? 두 가문의 관계는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이그레인 공작님.”

대화가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완고한 웨이브는 드루쉬아와 아시카 누구에게도 빈틈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대공성이 열렸습니다.”

“뭐?”

웨이브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아시카는 두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설마 드루쉬아가 그 얘기까지 꺼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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