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아시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 남짓. 드루쉬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건물의 문을 지켜보았다. 당장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굳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각하, 시클레어 부인을 만나실 거라면 내일 다시 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지키고 있던 칼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굳게 닫힌 드루쉬아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칼프는 더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기를 또 얼마간, 드루쉬아가 마차 뒤로 몸을 숨겼다. 건물의 문이 열리고 아시카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드루쉬아는 숨조차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칼프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드루쉬아는 기사보다는 용병이나 암살자에 가까운 방법으로 마이헬러의 별채를 피해 없이 무력화시켰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가문의 기사들이 아닌 외부인들로만 습격조를 구성하고 무색무취의 독을 힘들게 구해 전방위적으로 풀었다. 이븐이 잡혀있던 곳이 본채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곳에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이 위험천만한 계획은 순전히 아시카의 부탁 때문이었다. 아니었다면 칼프조차 극구 뜯어말렸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계획에 성공하고 정작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애절하다 못해 번뜩이는 눈빛으로 지켜보면서도 끝내 만나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아시카를 태운 마차가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마차가 느릿하게 길을 따라가다 점차 속도를 올리는 동안에도, 길 끝에 다다라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드루쉬아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닫혀있던 건물의 문이 다시 열렸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나일이었다. 그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길 모서리에 멈춰있는 마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각하, 네드로프 공자입니다.”
칼프의 말에 드루쉬아가 돌아보았다. 내내 굳어있던 입매가 느릿하게 올라간다.
그제야 칼프는 깨달았다. 드루쉬아가 지금껏 기다린 사람은 아시카가 아니라는 것을.
드루쉬아는 마차 뒤에서 나와 건물로 향했다. 나일은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가만히 기다렸다.
“아가씨를 만나지 않았나요?”
나일은 인사도 생략하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루쉬아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목조목 뜯어보면서.
묵직하게 저를 옭아매는 생경한 시선에 나일이 몸을 움찔거렸다.
“브레나일 네드로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산하다. 은근히 스며들어 의식하기도 전에 조여오는 덫처럼. 드루쉬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난생처음 보는 것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나일은 불편한 기분을 억지로 털어내며 넉살 좋게 대꾸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시죠?”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서먹한 태도.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나일이 몸서리를 쳤다.
“뭐 잘 못 먹었어요?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시더니.”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반대였던 것 같은데.”
“공작님의 기분 탓이겠죠. 용건이 뭔가요? 이븐을 만날 작정이라면 안 돼요. 휴식이 필요한 분이에요. 최소한 하루나 이틀 뒤에 다시 오세요.”
여전히 드루쉬아의 시선은 나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집요하기까지 한 시선에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꽤 많이 싸고도네.”
형형한 눈동자 속에 이채가 어렸다. 적의도 호의도 아닌 집요한 태도에 불편함이 나일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가씨 부탁 때문도 있지만, 이븐은 제게도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근데 진짜 오늘 왜 이러세요? 다른 방법으로 절 괴롭히려고 작정하신 건가요?”
드루쉬아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담벼락 아래, 나무 위, 수풀 안쪽까지 훑어보고 손을 들어 신호했다.
사사삭, 바람이 풀숲을 스치고 가듯 순식간에 기척이 멀어져갔다.
비밀호위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드루쉬아가 나일을 돌아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 아마도 꽤 긴 얘기가 될 것 같아.”
“무슨 얘기요? 제가 공작님과 할 얘기가 있던가요?”
드루쉬아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유심히 상대를 살필 때면 마주 서 있기조차 불편해서 절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네드로프, 네드로프 자작의 장자.”
나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드루쉬아는 곱씹듯이 그 이름을 반복해서 입에 올렸다. 나일의 얼굴이 굳어지고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내 아이가 없던 네드로프 자작부인이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라던데. 올해로 스물이 되었지, 아마?”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 아시카의 나이가 스물둘이니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후계자로서 엄중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녀와 나일은 처한 상황부터가 달랐다.
“영지까지 확인하셨어요? 그렇게 제가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죠. 별로 숨길 일도 아닌데요.”
“파병군으로 영지를 떠난 것이 4년 전이라고 들었어.”
“란탈의 지소는 출생증명까지 확인하지는 않으니까요. 몸이 빨리 자란 편이라 접수하는 직원도 그냥 넘어가더군요.”
파병군은 원칙적으로 18세 성년이 넘어야 갈 수 있지만, 여러 이유로 나이를 속이고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허.”
드루쉬아는 짧게 탄식을 흘렸다.
열여섯 살. 기사로 교육받는 이들도 그 나이에는 종자 노릇밖에 하지 못한다. 그런 나이에 기사들도 부지기수로 죽어 나간다는 파병지에 자원했다.
열여섯 어린 소년이 왜 안정된 영지의 후계자 자리를 던져버리고 위험천만한 파병지로 가게 된 걸까.
“압박이 있었나?”
드루쉬아의 질문에 나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아니면, 그 반대라서 견디기 힘들었던 건가?”
순간 나일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생각보다 더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솔직한 얼굴이었다.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전처럼 편하게 나일이라고 부를지, 네드로프 공자라고 부를지. 아니면…. ”
드루쉬아는 잠시 말을 끊고 나일의 표정을 살폈다. 다음에 이어질 말에 다가올 반응을 기대하면서.
“아니면 내가 몰랐던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까?”
순간 나일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무슨….”
황급히 수습해보려 했지만 손은 이미 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본능적인 경계였다.
“표정 관리를 해야겠어. 누가 물어볼 때마다 그렇게 정색하면 누구라도 의심하게 될 거야.”
여유로운 어조였으나 나일을 살피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바짝 얼어있던 나일은 충고 아닌 충고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우린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지도 몰라.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비밀이라든가. 두 눈뜨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억울한 분노라든가.”
모르고는 할 수 없는 말들이 드루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일의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의문.
과연 어디까지 알고 떠보는 걸까.
“아니면 내게 제대로 된 예우를 원하는 건가?”
움찔, 검 손잡이를 쥔 나일의 손이 반응했다. 살벌한 기세가 쏟아져나온다.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드루쉬아를 베어버릴 기세였다.
검조차 지니지 않았으면서도 드루쉬아는 여유로웠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어.”
나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지. 어떤 최악을 가정하고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침묵하는 나일의 등 뒤로 불 꺼진 건물이 보였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나일은 알 것 같았다.
황태후를 제외하고 몰살당했다고 알려진 아크펠라의 혈족이 남아있다.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한 피의 흔적을 드러낸 채.
거기에 제국의 양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가문인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엮여있었다. 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언제든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상황. 드루쉬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발을 빼려거든 지금 빼야 할 텐데요.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건가요?”
“나는 이미 불구덩이 속에 있어. 산채로 활활 타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고요하게 가라앉은 파란 눈동자가 깊고 어두웠다.
“억울하게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떨어진 인간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분노로 세상을 불태워버리고 싶을까? 그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까? 모조리 불구덩이 속으로 끌어내려 같이 태워죽일까?”
담담한 어조로 한 서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가 끔찍한 말들을 뱉어냈다.
“아니. 모두 아니야.”
평온을 가장했던 목소리에서 열기가 들끓었다. 그것은 분노보다도 더욱 강렬한 바람.
“구하고 싶어지더군. 내가 잃어버린 모든 이들을.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을. 그걸 위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설령 그것이 반역이 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드루쉬아의 태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명백한 적의.
“그런데 너는? 목적 없는 분노로 뭘 할 수 있지? 문제 소년처럼 가출해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고 억울함이 나아지던가? 화를 쏟아내고 싶거든 확실하게 들이받아야지. 그것도 제대로 된 상대에게.”
마침내 나일이 검을 쥔 손을 놓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표정, 경계 어린 눈동자. 그러면서도 전에 없던 기대감이 스쳐갔다.
“제대로 된 상대?”
“말했지. 우린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 거라고. 지금 내 손을 잡지 않으면 네드로프까지 멸문하게 될 거야. 어쩌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서 관심이 없으려나? 그렇지는 않을 텐데?”
나일이 헛웃음을 흘렸다. 버텨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반응할 수 있는 거라고는 허탈한 웃음뿐이었다.
“아비가 지어준 이름이 없으니, 지금의 이름이 내겐 전부야. 그러니 원래대로 하지?”
“이제 좀 대화가 되겠군.”
드루쉬아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였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억눌린 분노로 눈동자에서 푸른 안광이 뚝뚝 떨어졌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이름 없는 황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