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나일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아시카를 맞이했다.
“아가씨, 제게 해줄 얘기가 있지 않아요?”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될까? 이븐을 먼저 만나고 싶은데.”
완곡한 거절. 한두 마디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중이라도 거짓말은 안 돼요.”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그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일은 낡은 나무문 앞에서 멈춰섰다.
“여기예요.”
“잠시만 단둘이 얘기 좀 할게.”
“아가씨.”
“모든 얘기는 나와 하도록 해.”
나일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방문 너머 이븐은 잠기운 하나 없는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사제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작고 단출했다. 침대 옆으로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벽에는 선반 하나가 고작이었다. 아시카는 조용히 의자를 끌어와 침대 앞에 두고 앉았다.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던 이븐이 그제야 돌아보았다. 아시카가 봐왔던 그 어떤 보석보다 선명한 청보라빛 눈동자 속에 촛불의 빛이 흔들린다.
아시카는 변해버린 이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충격이나 거부감 같은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넌 놀라지 않는구나.”
사포로 긁는 것 같은 깔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어디까지 알고 있니?”
질문의 의도가 분명하다. 아시카는 조금 머뭇거리다 목걸이의 원래 주인이 이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봤어요. 대공성에서.”
이븐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오르자 아시카는 말을 덧붙였다.
“말 그대로예요. 신방… 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갔다가 봤어요. 대공성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아….”
이븐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뱉었다.
“신석을 지금 가지고 있니?”
메마른 목소리가 황량하다. 모든 감정이 삭아버려 더는 토해낼 것이 없는 사람처럼.
“지금은 없는데, 필요하시면 가져다드릴게요.”
어차피 원주인은 이븐이었다. 원한다면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지난번 아트샵에서 봤었다. 보석에 금이 가 있더구나.”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목걸이의 주인이니 이븐은 더 잘 알지 않을까.
“환각을 봤어요. 처음 제가 아트샵에 갔을 때 했던 얘기. 그게 사실은 꿈이 아니라 환각이었어요. 환각을 한 번씩 경험할 때마다 보석이 깨지는 것처럼 심한 균열이 생기더군요. 그게 원래 신석의 힘인가요?”
이븐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신석이 힘을 다하면 빛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과거 황실도 그 힘을 사용해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고 신석이 제빛을 잃었다지. 그런데 아크펠라의… 신석은 다른 것들과 달라. 원래 하나였으나 대공성이 지어질 때 한번 쪼개졌다고 해.”
그래서 초대 가주는 쪼개진 조각들을 모아 펜던트 하나에 담아 목걸이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힘이 작동하는 방식은 아무도 모른단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다만 시전자의 강렬한 염원에 반응한다는 정도만 알뿐이지.”
시전자의 강렬한 염원. 아시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환각 속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그것은 누구의 염원이었을까.
“혹시 탈리온의 신물이 어떤 건지 알고 계세요?”
“탈리온은 초대 가주의 액자에 신석을 박아두었어. 아무런 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지.”
첫 번째 꿈에서 본 보석은 탈리온의 것이 맞았다. 그리고 아시카가 발견했을 때 그 보석은 완전히 깨져있었다.
“아….”
아시카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든 것은 꿈이 아니었던 걸까. 단순한 환각이나 경고가 아니었던 걸까. 깨닫는 순간 온몸의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선 채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아시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고 이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선황제가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았을 텐데, 본적이 있니?”
“…네. 황궁에서 우연히.”
“아무도 쓸 수 없으니 애물단지 취급했나 보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이븐은 그저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시카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넌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거지?”
“알고는 있지만 이름을 몰라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반역으로 사라진 가문의 이름이었다. 현재의 황태후를 제외하고 아크펠라의 혈족 중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비스 슈피넬 아크펠라. 대공령이 온전했다면 아크펠라의 이름은 네가 물려받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내내 서늘했던 청보라빛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모든 감정이 풍화되어 사그라들었다는 건 착각이었나 보다. 이븐에게는 아직 남은 감정이 있었다.
분노. 미쳐버릴 것 같았던 생을 끈질기게 잡고 놓을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여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저물지 않는 아름다움이 축복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몸서리가 쳐졌다.
“조모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냥 이븐이라고 부르렴. 누가 들으면 둘 다 미쳤다고 하지 않겠니?”
아시카는 맞잡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비정상적인 상황이기는 했다. 누가 들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
“대공성의 환각 속에서 이븐 말고 아는 얼굴이 한 명 더 있었어요.”
“정신 나간 제르뵈를 봤구나.”
불과 얼마 전 기억을 떠올리고 이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광기 어린 남자의 시선이 아직도 제게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요? 마이헬러 후작하고? 무려 40년 전의 일인데….”
설마설마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부친을 쌍둥이처럼 닮은 아들이라던가.
“나도 있는데 마이헬러 후작이라고 가능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
아시카의 바람과 달리 이븐은 비현실적인 현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지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겠니, 아시카?”
마이헬러 후작은 이븐에게 집착하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크펠라와 탈리온의 나머지 혈통을 끊어놓으려 할 것이다.
아시카는 시선을 떨구고 맞잡은 손을 불안하게 매만졌다.
“조부님께서는 여차하면 저를 해외로 내보낼 계획이신 것 같았어요.”
이븐이 나직이 실소를 흘렸다.
“그 사람답구나. 그래, 그럴 거야. 한 번 실패했으니 두 번은 시도하지 않을 테지.”
이븐을 이그레인 공작저로 데려가기 위해 오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계획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이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이븐을 추적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어차피 이븐은 제대로 살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니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을 상대로 웨이브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은 도피였다.
“저는… 원치 않아요. 도망가고 싶지 않아요.”
아시카가 고개를 들고 이븐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동자는 아름답고도 단단했다.
“어쩌면 너는 나보다 그 사람을 더 많이 닮은 것 같구나.”
검은 눈동자와 조용한 듯 단단한 표정도, 겁이 많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모한 선택을 하게 되는 점까지.
“네 피의 근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과도 같아. 웨이브의 선택이 너를 위해서는 가장 안전한 길일 수도 있어.”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 모든 것이 여기에 있어요.”
이븐은 어둑한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시카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길게 늘어뜨린 순백의 머리칼과 핏기없는 하얀 얼굴이 유령처럼 창가에 흐릿하게 맺힌다.
아시카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에. 그녀가 감내해왔을 긴긴 시간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동안 아시카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이븐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부탁을 했으면 하는데.”
“말씀하세요.”
“우선 나일에게 심부름을 좀 시키고 싶구나. 내 말은 도통 듣지를 않아서.”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데요?”
“아트샵 지하 연구실에서 몇 가지 챙겨와야 할 것이 있어.”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건물이 화재로 불타서 뭐가 남아있는지도 몰라요.”
“연구실은 남아있을 거야. 그렇게 설계가 되어있기도 하고. 그간 내 연구실을 드나들어서 나일은 설명해주면 알 거야.”
그제야 아시카도 수긍했다. 이븐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현재의 모습부터 바꿔야 했다.
“네, 나일에게 일러둘게요.”
“그리고.”
이븐은 잠시 입을 다물고 아시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시카는 이븐을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대공성의 마지막 날을 직접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태도였다.
경계하기보다 오히려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는 시선. 신석을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었길래 이렇게 간절하게 저를 보는 걸까.
자신의 선택이 부디 답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븐은 입을 열었다.
“얼마 뒤면 황궁에서 황태자의 탄신연회가 있을 거다.”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긴 세월 그녀와 대공령의 백성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상대는 아직도 건재했고, 정작 진실을 아는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서 싸울 방법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적을 불구덩이 속에 끌어내리려면 저도 그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끌어내려야 하는 상대가 있었다.
이븐의 창백한 입술이 열리고 냉기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황궁에 데려가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