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05화 (105/153)

#105.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무렵이었다. 집무실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식사 시간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집사는 집무실 앞에서 망설였다.

‘오늘 점심도 안 드셨는데.’

잠이 든 거라면 지금이라도 깨워야 할 듯싶었다. 집사가 막 문손잡이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벌컥,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이쿠, 공작님.”

문이 열리는 동시에 드루쉬아가 튀어나왔다. 불쑥 밖으로 나온 그는 집사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집사는 놀란 표정을 노련하게 지웠다.

“그렇지 않아도 깨워드릴까 했습니다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나 반응이 없었다. 집사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전에 없이 희게 질려있었다. 크게 벌어진 눈동자와 반쯤 넋이 나간 얼굴, 벌어진 입술에서는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공작님?”

“…아시카는?”

뜬금없는 질문에 집사는 가만히 눈을 껌벅였다.

“레이디 이그레인이요? 당연히 이그레인 저택에 계시겠지요.”

“레이디 이그레인? 부인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 집사.”

“부, 부인이요? 아니 그 새 결혼까지 하셨습니까?”

설마 수도를 떠나 있었던 것이 그런 이유였던가. 요새 드루쉬아의 행보가 심상치 않아서 이상하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아,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요!”

레이디 이그레인이 공작부인이라니. 집사의 얼굴에서 노련한 표정이 무너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집사,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공작님. 이 사실을 언제 알리실 생각이었습니까? 식은요? 식도 올리지 않고 신부를 들이신 겁니까?”

“이게 무슨….”

복도를 둘러보던 드루쉬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낯설고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몸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리고 그대로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공작님! 어디 가십니까?”

연로한 집사가 그 뒤를 쫓았다.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보았다.

드루쉬아는 그대로 내달려 단숨에 4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있는 방이었다.

드루쉬아는 빠르게 걸으며 넓은 방의 벽면을 훑어나갔다. 마침내 방을 한 바퀴 다 돌고서야 집사를 돌아보았다.

“액자 어디 갔어?”

“액자요? 무슨 액자 말씀입니까?”

“초대 가주님의 초상화가 있는 액자. 청보라색 보석이 박혀있는 거.”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공작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선황제께서 가져가서 아직 돌려받지 못했잖습니까."

“허.”

드루쉬아의 입에서 황망한 한숨이 흘렀다.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아시카가 이그레인 저택에 있다고?”

“아마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드루쉬아는 다시 방을 박차고 나갔다.

“공작님!”

노집사는 이제 체통이고 뭐고 잊었다. 반쯤 정신 나간 것처럼 구는 제 주인을 따라 그도 저택을 가로질러 달렸다.

“당장 말을 내와!”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쩌렁하니 저택을 울렸다.

“공작님, 레이디 이그레인에게 일단 서신이라도 보내신 뒤에….”

“각하, 어디 가십니까?”

서류작업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칼프가 때아닌 소란에 밖으로 나왔다. 드루쉬아는 말을 준비하는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구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뒤따라 달리던 집사가 대신 칼프에게 대답했다.

“이그레인 공작저로 가신답니다.”

“거긴 왜요? 이그레인 공작님을 만나시려고요?”

“레이디 이그레인을 찾으신다고.”

“거기 안 계십니다. 아까 지시대로 마차를 보내서 저택에는 안 계실 겁니다.”

칼프의 설명에 드루쉬아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차를 보내? 어디로? 아시카가 어디로 갔다는 말이지?”

짙푸른 눈동자가 칼프를 노려보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 잡아먹을 듯 형형한 눈동자였다.

“그야 안가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앞장서.”

“네?”

“어디가 됐든, 아시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사나운 외침에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집사와 칼프, 마구간지기와 밖에 나와 있던 사용인들까지 움직임을 멈추고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까칠한 성정이라 심술궂게 굴기는 해도 함부로 소리를 질러대지는 않던 주인이었다. 모두 당황한 가운데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것은 칼프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마차로 움직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자네, 마차를 준비해주게.”

마구간지기는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마부를 부르러 달려갔다.

“집사는 각하의 외투를 가져다주게.”

얼떨떨한 얼굴의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 본채로 돌아갔다.

“몇 시간 전에 마차를 보내서 지금은 이동 중일 겁니다. 안가에 먼저 가서 기다리시면 만날 수 있습니다.”

서늘한 날씨에도 드루쉬아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혹은 호되게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드루쉬아는 제 얼굴을 거칠게 쓸며 욕설을 뱉었다.

저택을 나설 때까지 칼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차분하게 자리를 지켰다.

드루쉬아는 따라가겠다는 애거나이트를 물리치고 칼프만을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중심가를 지나 아마노이아 거리로 접어들었다.

아마노이아 거리는 대규모 신전과 사제들의 거주지가 있는 곳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고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과 건물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거리였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기에 좋은 그런 장소.

마차는 단출하게 지어진 하얀 건물을 앞에 두고 길 건너편 건물 모서리에 멈춰섰다.

“저기는 별장이 아닌데?”

“보통 사제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곳입니다. 이그레인 공작저와 가까우면서도 호위가 숨어있기 용이한 장소를 찾으라고 해서 여기를 택했습니다.”

칼프의 설명에 드루쉬아의 표정이 알 듯 모를 듯 구겨졌다.

“여기 배치된 인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드루쉬아가 마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건물 주변에는 나무가 우거져서 그늘이 깊었다.

삐익.

드루쉬아가 휘파람을 불자 그늘에서 불쑥 사람이 튀어나왔다. 누렇게 물들어가는 나무처럼 나무색의 옷을 입고 정리되지 않은 머리칼이 덥수룩하다. 어느 모로 봐도 상대는 기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분단장님, 안녕하십니까!”

“자네가 왜 여기 있어?”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드루쉬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반갑게 웃던 상대가 부리부리한 눈을 치뜨며 되물었다.

“아니, 분단장님. 제국 밖으로 나가려는 걸 억지로 끌어다 앉혀놓고 무슨 말씀입니까?”

드루쉬아의 얼굴이 알듯 말듯 기묘하게 변했다. 곱씹고 또 곱씹던 끝에 다소 혼란스러운 기억 한 조각을 찾아냈다.

“아… 그래 맞아.”

기사단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과거 파병군 시절 제 휘하에 있던 이들 중 쓸만한 이들을 찾아서 반강제로 데려왔다. 그게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걸까.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해파리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건 좋은데 영 지루합니다.”

남자의 넉살에도 드루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오묘하게 변해가는 얼굴에서는 속을 읽기가 어려웠다. 생각에 골몰한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가 얼굴을 쓸기를 반복했다.

건강하게 혈색이 돌았던 얼굴은 병자의 그것처럼 창백했고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났다. 결국 생각에 빠진 드루쉬아 대신 칼프가 입을 열었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경계근무에 인원이 부족하면 제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뭐, 지금 같아서는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은데….”

“그만 자리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그럼 이만. 분단장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남자는 드루쉬아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다가 고개를 까딱이고 자리를 떠났다.

드루쉬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닫혀있는 마차의 문을 노려보기를 잠시,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섰다.

순간 커다란 체구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칼프가 손을 내밀었지만 드루쉬아는 도움을 받는 대신 마차의 벽면을 잡고 머리를 기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처럼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결국 칼프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드루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건물 쪽을 확인했다.

“저기… 저 마차인가?”

한가로운 거리 한복판,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게 생긴 마차라서 언뜻 보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금세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드루쉬아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마 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드루쉬아는 숨조차 멈추고 마차에서 나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쿵, 쿵 심장이 온몸을 울릴 만큼 크게 요동치는데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먼저 마차에서 나온 사람은 키가 훤칠하게 큰 적금발의 여자였다. 잔느였다.

그녀가 내민 손을 하얗고 가녀린 손마디가 휘감는다. 가로등불 아래 선명하게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마차 밖으로 드러났다.

드루쉬아는 넋을 놓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뜨려 하나로 묶은 새카만 머리칼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하얀 얼굴. 차게 보이지만 실은 한없이 따뜻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건물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안쪽으로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곳곳에 포진한 호위들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안으로 밖으로 철저한 호위에 둘러싸여 있는 여자는 아시카였다.

“아하, 하….”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던 몸에서 피가 휘돌았다. 들들 끓어올라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희열을 느꼈다.

살아있다. 그녀가 살아있다. 살아 숨 쉬는 실체가 되어 눈앞에 있었다.

“아하하하!”

드루쉬아는 웃었다. 너무 기꺼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희에 가득 찬 웃음 소리는 어두운 밤거리를 울리고 긴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들었다.

달빛이 먹구름에 가려지고 밤하늘은 더욱 짙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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