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04화 (104/153)

#104.

찰박, 찰박.

작은 나룻배에 떠밀린 물살이 호숫가에 부딪혔다. 실은 나룻배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작은 배였다.

파라솔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하얀 얼굴이 나룻배를 주의 깊게 살폈다.

“이건 뭐야. 어디서 훔쳐 온 물건이야?”

“훔쳐 오다니. 빌려온 거라고.”

어디서부터 배를 끌고 왔는지 얇은 여름 셔츠에는 물이 잔뜩 튀었다. 태양 빛을 닮아 섬세하게 나풀거리던 짧은 머리칼도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드루쉬아는 머리칼을 걷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아시카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 나룻배를 노려보았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좀이 쑤셔서 하루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드루쉬아의 성정을 잘 아는 탓이다.

“물에 뜨기는 해? 호수 한복판에서 가라앉고 그러는 거 아냐?”

얼마나 낡았는지 검은 얼룩이 군데군데 보이고 사람 둘이 올라앉으면 꽉 찰 만큼 작았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나뭇잎이 동동 떠다닌다고 착각할 만큼 어설픈 물건이었다.

“왜 그렇게 나를 못 믿어? 너 그러다 기사단장에게 잡혀간다? 뭐 당장 영지로 끌려가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헉. 여기까지 왔어?”

“별장 근처에서 너를 찾고 있더라. 뭐 여기도 금방 찾아오지 않을까?”

“싫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망설임은 사라졌다. 아시카는 냉큼 배에 올라탔다. 작은 배는 가벼운 아시카의 체중에도 출렁거려 몸이 휘청거렸다.

“얼른 앉아.”

드루쉬아의 손짓에 아시카는 파라솔을 접고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놓여있던 노를 낑낑거리며 들어 올리는 걸 보고 드루쉬아가 혀를 찼다.

“그 나뭇가지 같은 팔뚝으로 뭘 하려고? 이리 내.”

“하나보다 둘이 하는 게 빠르잖아.”

“그것도 균형이 맞을 때 얘기지. 넌 얌전히 햇빛이나 가리고 있어. 살타서 들어가면 관리 못 했다고 또 혼날 거 아냐.”

드루쉬아는 불퉁하게 말을 뱉고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어, 간다.”

어설퍼 보였던 나룻배는 신기하게도 안정감 있게 물 위를 미끄러졌다. 배가 작고 얇은 탓인지 잔잔한 수면 위를 둥둥 떠 있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호수 반대편에 가면 저녁때까지는 안 돌아오는 거야. 알지?”

“응, 응. 이번에 잡혀가면 한 달은 못 올 거야. 예절 교육받으러 수도에 가야 하거든.”

“그거 꼭 수도로 가야 해? 교사를 데려오면 되잖아.”

“어차피 데뷔하려면 수도로 가야 해서 분위기를 미리 익혀야 한대. 영지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가면 촌구석에서 왔다고 따돌린다더라.”

“누가 감히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상대로 그런 유치한 짓을 해?”

“넌 수도에 없잖아.”

“이그레인과 탈리온은 하나야. 너와 내가 하나이듯. 그러니까 너를 따돌린다는 건 나를 무시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야.”

아시카는 말문이 막힌 듯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파란 눈동자가 시원스레 휘었다. 드루쉬아는 웃음을 참으며 툭 뱉었다.

“너 얼굴 빨개진다?”

“더, 더워서 그래.”

“귀도 빨개지고 목도 빨개지는데?”

“햇볕이 뜨겁잖아.”

드루쉬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더 놀리고 싶지만 저러다 얼굴이 타버릴까 걱정도 되었다.

노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수건을 물에 적셨다. 젖은 손수건을 가져가자 아시카의 얼굴이 움찔 놀라며 물러났다.

“뭐 하려고?”

“가만히 있어 봐. 식혀 줄 테니까.”

“이리 줘. 내가 할게.”

“싫어. 내 손수건이야.”

“누가 뺏어간다니?”

“여하튼 이건 내 거니까 내가 할 거야.”

투덕거리는 사이 서늘한 손수건이 아시카의 뺨에 닿았다. 불퉁한 어조와 달리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아시카는 가만히 눈을 감고 다정한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드루쉬아의 손길이 조금 느려지는 것도 같았다.

“좋아?”

“으응. 좋아.”

“그래서 나도 좋아?”

당황했는지 아시카의 입술이 꼭 닫힌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여름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드루쉬아의 손길이 멈췄다고 생각한 순간, 뜨거운 여름 바람보다 더 뜨거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습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입술을 덮고 하나인 것처럼 꼭 맞물렸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찰랑이던 물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고 머리에 휘감기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미끄러지는 달착지근한 감각만이 생생할 뿐.

촉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에서 조금 전보다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좋아, 아시카.”

달콤한 목소리에 아시카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난 아무 대답 안 했는데?”

“그래도 알아.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니까.”

앳된 얼굴의 드루쉬아가 싱그럽게 웃는다.

첫 입맞춤이었다. 간질간질 심장을 매만지는 감정이 낯설고, 뜨거운 여름 볕만큼이나 달아오르는 열기가 낯설었다.

수줍게 웃던 아시카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르쉬아.”

“왜? 내가… 뭐 잘못한 거야?”

드루쉬아의 얼굴도 따라서 굳어졌다. 예고 없는 행동에 아시카가 화가 난 것이 아닌가 해서.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 엉덩이가 젖었어.”

드루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둘의 시선이 나란히 아래로 떨어졌다.

“헉.”

“이런, 배가 새나 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드레스 밑자락이 흥건하게 젖을 만큼 물이 새들어왔다.

아시카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은 배라서 성급히 일어났다간 더 빨리 가라앉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 물 퍼낼 거 없어? 손으로라도 퍼낼까?”

드루쉬아는 물이 차오르는 바닥과 호수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음, 그 전에 가라앉을 것 같은데?”

“그럼 어쩌라고!”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아시카 혼자 애가 닳았다. 드루쉬아는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더니 간단하고도 현실적인 답을 내놓았다.

“아시카 미안한데… 헤엄쳐서 돌아가자.”

“뭐어?”

이럴 줄 알았다. 어디서 쓰지도 못할 배를 끌고 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넌 상관없겠지만 난 드레스잖아.”

아시카의 시선이 배가 출발했던 호수가로 향했다. 다리에 휘감기는 드레스를 입고 저기까지 헤엄을 친다고? 아시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리야, 무리.”

그렇다고 드루쉬아에게 저까지 달고 헤엄치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뭘 망설여. 드레스를 벗으면 되잖아.”

“여, 여기서?”

“그럼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수는 없고, 내가 끌고 갈 수도 있지만, 거리가 좀 멀다. 둘 다 빠져 죽을 수도 있겠는데. 어쩔래?”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고 드루쉬아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다급한데 드루쉬아의 시선은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느새 그의 손끝이 그녀의 입술에 닿아 가만히 미끄러졌다.

“예쁘다.”

하얀 얼굴에 터질 듯이 붉은 입술은 아무리 밉게 다물어도 예쁘기만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엉거주춤 쪼그려 앉아 있는데 벌써 발목까지 잠겼다. 이 판국에 얼굴이나 감상하고 예쁘다 소리나 하고 있다니!

“배 가라앉기 전에 옷부터 벗는 게 낫지 않아?”

드루쉬아의 태도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간질거리는 시선으로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더니 또 금세 현실을 일깨웠다.

“저기, 뒤로 좀 물러나 봐.”

아시카는 드루쉬아에게 떨어지라고 손짓했다.

얼굴은 뜨겁고 심장은 정신없이 뛰어대고 온몸이 깃털에 뒤덮인 것처럼 간질거렸다. 그런데 당장 처한 현실은 물속에 빠지기 일보 직전.

아무리 둘 사이가 가까워도 아시카는 철저한 예법 교육을 받으며 자란 레이디였다. 그녀가 망설이자 한 걸음 거리에서 드루쉬아가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우리 사이에 예의 차리다 물에 빠져 죽을래?”

“너, 정말.”

“이러다 가라앉겠다. 나 혼자 먼저 갈까?”

“르쉬아!”

“얼른 벗으라니까.”

이제 배 밑바닥은 반쯤 물에 잠겨있었다. 두 사람이 얌전히 있는 탓에 천천히 가라앉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터였다.

“나 일어날 거야. 중심 잘 잡아.”

“알았어.”

“보지 마. 눈 감고 있어.”

“알았으니까 서둘러.”

눈을 감으면서도 드루쉬아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얄미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당장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시카는 눈을 질끈 감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슴께에 둘러진 끈을 풀고 아래에서부터 걷어 올린 드레스를 훌렁 벗어버렸다.

여름이라 옷이 간단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래에는 허벅지를 간신히 가리는 브리프가, 위에는 가슴을 덮은 속옷만이 남았다.

“드레스 이리 내.”

“네가 와서 가져가.”

아시카는 양팔로 가슴을 감싸 가리고 드레스를 발로 밀었다. 잠겨가는 배 위에서 드레스가 둥둥 뜬다.

“내가 움직이면 배가 금방 가라앉을 거야. 그대로 뭍으로 헤엄치면 돼. 알았지?”

드루쉬아는 반쯤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차마 시선 둘 곳이 없는 차림이라 아시카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드레스 챙겨서 바로 따라갈게. 뒤는 보지 말고.”

아시카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루쉬아가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배가 균형을 잃었다. 아시카는 드루쉬아를 한번 돌아보고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 모두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형제가 없는 두 사람은 후계자 교육도 함께 받았다. 드루쉬아가 기사로서 받는 교육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중에 출발한 드루쉬아가 먼저 호수 가에 도착해 아시카를 기다렸다.

“손, 이리 내.”

“어푸, 후아.”

정신없이 헤엄쳐온 아시카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움켜쥐었다. 드루쉬아는 단숨에 그녀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으아.”

“아시카, 정신 차려.”

“어후, 물이….”

얼굴과 눈가에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새카맣게 긴 머리칼은 푹 젖어서 해초처럼 온몸에 휘감긴 채였다. 그 몰골이 기괴해서 드루쉬아는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빨리 옷부터 입어야겠다.”

드루쉬아는 허리에 감고 있던 드레스를 풀어 물기를 대충 짜냈다. 아시카는 머리칼의 물을 짜서 걷어내고 드레스를 받아 입으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외로 쉽지 않았다.

하늘하늘 얇은 여름용 드레스는 물에 푹 젖어서 서로 엉겨 붙었고 그냥 몸을 밀어 넣자니 척척 들러붙어 도통 입을 수가 없었다.

혼자 낑낑대는 아시카에게서 드루쉬아가 드레스를 빼앗아 손에 들었다. 그러나 헤매기는 드루쉬아도 마찬가지였다.

“옷 벌려봐. 다리 넣을 공간은 만들어 줘야지.”

“이거 너무 들러붙어. 막 잡아당겼다간 찢어질 것 같은데?”

너무 얇아서 만지기도 불안한 재질이었다. 드루쉬아는 드레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위아래를 접어 대충 모양을 만들었다.

“차라리 위에서부터 입는 게 낫겠다. 가만히 서 있어 봐.”

“이렇게?”

아시카는 가만히 팔을 가슴에 모으고 드루쉬아를 올려다보았다.

“팔을 올려야지. 그렇게 가리고만 있으면 드레스를 어떻게 다시 입어?”

아시카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에서 팔을 떼었다. 드루쉬아는 젖은 드레스를 간신히 벌려 아시카의 머리 위에 얹었다.

“앗, 차가워.”

젖은 드레스가 머리와 팔을 스쳐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급한 손길이 아까보다는 다소 거칠었다.

“그렇게 막 당기지 마. 진짜 찢어지겠….”

드레스에서 머리를 빼낸 아시카와 드루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짙푸른 눈동자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 눈이 마주치자 드루쉬아는 고개를 획 돌렸다.

“너도 부끄러워할 때가 있구나?”

아시카는 제 얼굴도 달아올라 있다는 걸 잊고 웃음을 삼켰다.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드루쉬아는 한 손으로 소매 구멍을 벌리고 한 손으로는 아시카의 손을 잡아 밀어 넣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애쓴 덕에 두 팔은 제 위치를 찾아 나오고 드레스 자락을 아래로 내릴 수 있었다.

간신히 드레스를 입고 나자 드루쉬아가 손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이 말해주는데.”

“이건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가슴께에 위치한 드레스 끈을 찾아 드루쉬아가 그녀의 등 뒤로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아니라?”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야.”

축축하게 젖은 드레스 위로 뜨거운 체온이 휘감겼다. 허리를 감아 당기는 팔에 끌려가면서 등 뒤로 단단한 가슴이 닿았다.

아시카는 말을 잃었다. 온몸을 적신 물기가 더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기였다.

“네가 너무 좋아서….”

간질간질 귓가에 내려앉는 달콤한 속삭임. 나도, 하고 작은 목소리가 대답한다.

너무 행복해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던 어느 날.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래서 더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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