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03화 (103/153)

#103.

그날은 웨이브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반갑게 문을 열었을 때 들이닥친 것은 정체불명의 자객들이었다.

그날, 이비스의 곁을 지키던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황제의 명으로 멸문해버린 기사 가문의 혈족들. 웨이브의 도움으로 대공령을 빠져나와 이비스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희생되었다.

이비스는 아이 둘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호위 기사와 달아났다. 작은 아이는 이비스가, 덩치가 큰 아이는 기사가 안고 달렸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녀는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저가 죽어야만 이 비극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걸.

두 사람은 각자 아이를 안은 채 흩어지게 되었고 추격자들은 예상대로 이비스를 쫓아왔다.

이비스는 아이를 안은 채 검에 찔렸다.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그녀의 가슴을 흥건히 적신 것은 뜨거운 피였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제 아이의 피. 자신의 심장에서 쏟아지는 피.

“아아아아악!”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새카맣게 연소되어 형태만 남은 시신들이었다. 적도 아군도 구분되지 않는 형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스산하게 흩어져버렸다.

아이의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비스는 망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헤맸다. 시신이 없는 아이가 어디엔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날의 기억이, 그 숲속에서의 애끓는 기억이 이븐에게는 현재가 되었다.

“…엄마가 안아줄게. 울지마, 내 아기….”

드루쉬아와 나일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잃어버린 제 아이를 찾는 여자를, 애끓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는 여자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제가 하죠.”

그래도 이븐을 가까이서 겪어온 것은 나일이었다. 드루쉬아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븐, 저예요. 나일. 시간이 얼마 없어요. 우린 여기를 나가야 해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일은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했다.

“도와주러 온 거니까 놀라지 말아요. 제가 안아서 데리고 나갈 겁니다. 알았죠?”

여전히 흐느껴 울 뿐, 이븐은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시카 아가씨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빨리 나가서 안심시켜 주셔야죠.”

정신 나간 듯 흐느끼던 여자의 눈물이 뚝 그쳤다. 드루쉬아는 이븐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아….”

“네, 아시카 아가씨요.”

눈물로 범벅이 된 여자가 후후, 하며 웃었다.

“…내 아이가 남긴 보물.”

나일과 드루쉬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망연히 얼어붙어 있는 두 사람 곁으로 일행이 다가왔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그만 나가시죠.”

“나일.”

드루쉬아의 채근에 나일이 정신을 차렸다. 이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제가 안을 테니까 놀라지 마세요. 알았죠?”

다정한 어조였다.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이븐은 나일이 뻗어오는 팔에 몸을 기대었다.

별채를 빠져나가는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뒤늦게 쫓아와 덤불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여자는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여자, 정체가 뭐야?’

샤프리의 시선 끝에 이븐이 모습을 보인 것은 잠깐이었다. 나일이 안아서 등을 돌리는 찰나의 순간 샤프리는 확실하게 보았다.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만사 관심 없던 마이헬러 후작이 납치한 여자. 어쩌면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대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백금발에 청보라빛의 눈동자. 제국 내에서 오로지 단 하나의 혈족에게만 전해진다는 피의 증거.

‘아크펠라 대공가의 여자야!’

* * *

어젯밤을 꼬박 지새우고 오늘도 내내 잠들지 못했다. 드루쉬아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집무실 의자에 앉아 칼프의 보고를 들었다.

“기사들을 안가에 배치하고 레이디 이그레인 주변에는 몸이 가벼운 녀석들 위주로 보냈습니다.”

“나일하고 충돌하지 않게 해.”

“그렇지 않아도 주의를 줬습니다.”

미리 준비된 안가로 이븐을 보내고 나일이 동행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호위들을 배치해놓은 터다. 생각보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예정보다 호위 인원을 배로 늘렸다.

“그 여자에 대해 알아본 건? 이븐 시클레어가 실존 인물이기는 해?”

“네. 20년 전쯤에 시클레어 남작이 죽고 홀로된 부인입니다.”

진짜 이븐 시클레어라면 서른 중반. 그러나 드루쉬아가 본 이븐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당시 남작가에서 일하던 사람이 확인해줬습니다. 적금발이었던 건 기억하는데 얼굴이나 다른 특징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하더군요.”

“허. 기억이 안 나?”

그럴 리 없다. 지난밤 처음 봤지만 한번 스치기만 해도 도저히 잊기 어려운 미모의 여자였다. 더구나 외형적인 특징은 제국 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백금발에 청보라빛 눈동자.

나일이 이븐의 얼굴을 알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오해할 뻔했다.

“이번에 아시카가 나를 제대로 놀라게 했어.”

충격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아크펠라의 혈족. 대공가의 직계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엄청난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나일에게 듣기로는 납치라고 했다. 마이헬러 후작은 정확히 여자를 찾아서 데려갔다.

‘분명 알고 한 짓이야.’

마이헬러 후작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여자는 자기가 표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당장은 아시카도 없는 안가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어서 돌아왔다.

“그라나티 백작에 대해 알아본 건?”

샤프리의 정혼 상대가 그라나티 백작이라는 걸 알았을 때 드루쉬아는 다른 의미로 의문이 들었다.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영지 일부가 국경지대와 인접해 있다는 것 외에는.

칼프는 작성된 서류를 건네며 준비된 내용을 차분히 읊었다.

“그라나티 백작령은 원래 맹수 사냥꾼이 많은 지역입니다만, 언제부턴가 용병이 늘었다더군요. 20년 전쯤만 해도 국경 근처에는 작은 마을 하나가 전부였는데 점점 늘어서 지금은 마을이 네 개랍니다.”

“거기가 꽤 척박한 곳인데 마을이 그렇게나 많다고?”

국경지대를 관리하는 만큼 탈리온은 제 영역이 아닌 곳에 대해서도 꾸준히 정보를 모아 왔다. 이민족과 분쟁이 가장 심한 곳을 탈리온이 지키고 있고 그라나티 영지는 제국의 국경지대 중 극히 일부와 맞닿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워낙 맹수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없어서 덩그러니 성탑 하나만 세워놓은 곳이었다.

“확실히 수상해.”

아무리 매정한 마이헬러 후작이라도 제 딸을 소문도 좋지 않은 남자의 세 번째 부인으로 보내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라나티 백작과의 혼맥으로 얻게 될 이익도 딱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라나티 영지에 사람을 보내. 특히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샅샅이 살피라고 해.”

마이헬러 후작이 노리는 것이 저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후작이 노린 것은 탈리온이 아닌 대공성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븐이라는 여자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어쩌다가 아시카는 그 여자와 연관된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무슨 의미지?’

「…내 아이가 남긴 보물.」

혼란스러웠다. 대공녀가 살아있다면 못해도 육십 중반의 나이. 대공녀 소생의 아이라면 말이 될 법도 하지만, 불임으로 황태자에게 파혼당하지 않았나.

여자가 약에 취해 찾아 헤매던 아이는 누구일까. 만약 이븐이 말한 아이가 살아있다면 대공가의 핏줄이 또 있다는 의미였다.

드루쉬아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도 밝혀지면 크나큰 파장을 일으킬 어떤 진실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는 그것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드루쉬아는 뻐근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령으로 사람을 보내서 조부님의 상태를 확인해봐. 언제쯤 수도로 오시게 될지도 알아보고.”

“네, 각하. 그런데 레이디 이그레인에게는 서신을 안 보내실 겁니까?”

“아시카에게는….”

나일이 이그레인 저택이 아닌 안가에 남았다. 말을 전해 줄 사람이 없으니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신보다는 직접 대면을 원하겠지. 안가로 데려갈 수 있는 마차를 보내도록 해.”

“네. 호위 몇과 함께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직접 서신을 적어 보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드루쉬아의 심사가 복잡했다.

어쩌다 이븐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나일에게 들었다. 몇 달 전 드루쉬아를 구한 것이 그 여자였다는 사실도.

‘연금술사라고 하더니.’

평범한 만남 뒤에 이런 비밀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시카는 여자의 정체를 몰랐을까?’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도와달라는 한마디면 드루쉬아가 나설 걸 알면서도 아시카는 부러 어려운 길을 택했었다.

‘나를 배제하려던 이유가 여자의 정체 때문이었다면?’

서신이 아니라 당장 달려가 아시카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식사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아니, 당장은 좀 쉬었으면 좋겠어.”

“네, 그럼 쉬십시오.”

칼프가 집무실을 나간 뒤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채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털어내며 잠가두었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아시카가 잊어버리고 간 목걸이가 있었다. 왜 이 물건이 생각났는지 모르지만, 홀린 듯이 그것을 꺼내 들었다.

“보석이 또 깨졌어.”

다섯 개의 보석 중에서 네 개가 깨졌다.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보석이 실금이 가득 차서 금세 바스라질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온전한 것은 가운데 박힌 보석 하나뿐.

“보석에 대해서도 알아보라고 해야 하나.”

별것이 다 신경 쓰이게 한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드루쉬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목걸이를 서랍에 넣으려던 손이 우뚝 멈췄다.

“설마?”

머리를 후려치는 깨달음. 순간적으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드루쉬아는 황급히 목걸이를 들어 다시 살펴보았다.

“그래. 내가 꿈속에서 본 것도 이런 거였어.”

단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흘려 넘겼다.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망상과 착각이 뒤범벅이 된 이야기일 거라고.

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아서 이상하게 여겼다. 본 적도 없는 탈리온의 신물이 왜 꿈속에 나왔는지. 그 짧은 장면이 왜 그렇게 또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것인지. 그리고 꼭 닮은 보석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지금껏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던 조각난 단서들이 공통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목걸이를 쥔 손을 떨구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맙소사, 아시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 목걸이는 사라졌다고 알려진 아크펠라 대공가의 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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