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101화 (101/153)

#101.

“갑자기 건국신화 얘기는 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초대 가문은 셋이 아니라 넷이에요.”

그래야 아귀가 맞는다. 대공성에서 아시카가 겪은 이해할 수 없는 환각과 두 사람을 노린 의문의 자객들, 그리고 마이헬러.

“무슨 소리야? 그걸 어떻게 알아?”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어요. 마이헬러 공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데 당신처럼 흰자위가 흰색이 아니었어요.”

“착각일 수도 있잖아?”

뜬금없는 주장에 비해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나 아시카는 확신했다.

“아뇨. 분명 초대 가문은 셋이 아니라 넷이에요.”

그녀는 보았다. 대공성의 환각 속에서, 끔찍한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그게 마이헬러가 대공성을 침입한 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

“신방… 이라는 걸 찾고 있었어요.”

“신방? 신방이 뭐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마도 신을 부르는 어떤 장소가 아니겠냐고. 황제와 마이헬러 둘 다 신을 만나고자 했더라고.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지는 못했다. 그러려면 대공성에 얽힌 이야기를 모두 해야 한다. 거기에는 그녀가 감추고픈 치명적인 비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시카는 슬쩍 말을 돌렸다.

“노공작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드루쉬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그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샤프리를 부른 건 미안해요.”

그에게 있어 샤프리는 뼈아픈 배신의 증거였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접근했을 테니 샤프리는 드루쉬아 자신이 안일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신이 알고 있었다면 샤프리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겠지.”

당시 아시카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쓰러졌다. 내내 앓다가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처음부터 나에게 왔었어야 했어.”

드루쉬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시카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억눌러도 꾸역꾸역 감정이 새어 나왔다. 외면하려 해도 결국은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을.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어? 어떤 식으로든 당신은 나를 피해갈 수 없어.”

그러니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진심을 감추지도 못하면서 서로를 상처입히는 짓은 그만두라고. 드루쉬아는 절박한 시선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 * *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던 방에서는 탁한 냄새가 났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새로 가져다 놓은 침대 시트와 담요 모두 고가의 재질이지만 방안의 묵은 냄새를 지우지는 못했다.

이븐은 닫혀있는 창문틀을 손끝으로 꼼꼼히 더듬었다. 어느 구석을 밀어도 창문은 끄떡하지 않았다. 열지 못하도록 밖에서 고정된 모양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렇게 허망하게 잡히려고 긴긴 세월을 도망 다닌 게 아니었다. 이븐은 열리지 않는 창문을 내리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방심했어. 내가.”

수도로 옮겨온 지 십 년이 넘는 동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기에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놓고 있었다.

탁,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븐은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크크큭, 거리는 웃음소리. 사람의 모습보다 소리가 먼저 그녀에게 닿았다.

“있었어. 진짜로 살아있었어!”

빛 한점 보지 못했던 심해어가 수면으로 끌려 나와 느끼는 찬란한 고통처럼, 작렬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

뿌옇던 이븐의 시야에 간신히 사람의 형체가 잡혔다. 그 형체는 이내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꿈에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악몽 같은 사내의 형상이.

“으하, 하하. 이비스, 이비스, 나의 이비스!”

성큼성큼 사내가 다가온다. 창백한 이븐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렸다. 도망칠 곳도 없는데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에 목구멍에서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혜안과 노련함도 소용없었다. 마이헬러 후작을 마주한 순간, 기억은 단숨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 이제는 사라지고 없을 거라고 여겼던 한 남자의 집요한 탐욕.

“살아있었어. 그래 살아있고말고!”

마이헬러 후작은 발작적으로 웃어댔다. 온몸에 넘쳐나는 희열로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어있던 이븐이 가까스로 걸음을 떼었다. 뻣뻣하게 굳어진 다리가 문을 향해 나아가려는 순간 그녀의 머리채가 뒤로 확 꺾였다.

“아아악!”

정수리를 움켜쥔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팽개쳤다. 남자의 손을 떨쳐내기 위해 양손으로 있는 힘껏 할퀴어댔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너를 만나려고 지금껏 살아있었던 거야. 아무렴!”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광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제 손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닥에 후려쳤다. 사내의 괴력에 이븐의 몸은 태풍에 휩쓸린 마른 가지처럼 휘둘렸다.

“아악!”

마이헬러 후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대를 어쩌고자 함도 아니었다. 긴긴 시간 찾고 또 찾아 헤맸던 제 것이 도망치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제르뵈! 저주받을 제르뵈!”

“그래, 더 날뛰어. 소리쳐봐. 이비스, 아아, 이비스!”

넓은 방 안에 사내의 웃음소리가 쩌렁 하니 울렸다. 이븐의 악에 받친 비명은 그 웃음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거 놔!”

후작의 손을 뜯어내기 위해 이븐은 미친 듯이 할퀴어댔다. 그러나 살점이 뜯겨 나가면서도 마이헬러 후작은 정신없이 웃었다.

“아아악!”

이븐은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사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다리가 의자와 뒤엉키고 옆구리가 가구 모서리에 부딪혔다. 고통으로 비명을 지를수록 후작은 더 정신없이 그녀를 흔들어댔다.

마침내 더는 비명을 지를 수 없을 만큼 목이 쉬어버렸을 때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은촛대가 보였다. 이븐은 질질 끌려가면서 악착같이 그것을 손에 쥐었다.

“놔, 이 악마!”

퍽, 하는 충돌음. 이븐은 마구잡이로 은촛대를 휘둘렀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후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와중에도 손을 놓지 않아서 이븐은 미친 듯이 은촛대로 후려쳤다.

“으악!”

은촛대의 단단한 기둥이 후작의 얼굴을 후려쳤다. 순간 힘이 빠진 손아귀를 한 번 더 후려쳐서 떨쳐냈다. 이븐은 화드득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크흐, 흐.”

주저앉은 후작의 입에서 광기 어린 웃음이 새었다. 촛대에 긁혀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후작은 웃었다. 너무 기꺼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작 그 정도 위장을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았어? 네 얼굴, 네 속눈썹 한 가닥까지 기억하는 나야. 처음부터 달아나지 말았어야 했어.”

숨을 헐떡거리는 여자를 보고 후작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변해버린 눈동자와 변해버린 머리칼. 그러나 아무리 감춰도 그의 눈에는 보였다.

달빛이 쏟아지던 밤, 어둠조차 가리지 못하던 환영 같던 실루엣. 이 세계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창백한 백금발과 청보라빛의 눈동자를 지닌 신비로운 존재. 달빛 속에 녹아들어 있던 소녀의 형상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처음 본 순간부터 갈망했고 그래서 대공성을 원하는 황제를 부추겼다.

“설마 상상도 못 했지. 그 겁많은 이그레인의 애새끼가 감히 반역도의 핏줄을 빼돌렸을 줄이야.”

당시 웨이브의 나이가 불과 열아홉이었다. 어린 치기였다고 하기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대공녀를 숨겼다.

“너만 아니었다면 대공성이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웃긴 소리! 진작부터 대공성을 노려왔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어쩌면 방법을 달리했을 수도 있겠지. 지금처럼 파괴적인 결과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핍박받는 네 백성들을 봐.”

“악마야! 너는 악마야, 제르뵈!”

“진짜 재앙을 불러온 악마는 따로 있잖아. 축복을 재앙으로 뒤바꾼 네 아비를 봐!”

순간 이븐이 숨을 멈췄다. 묻어두었던 악몽 같은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분노했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니, 제르뵈. 그건 너와 정신 나간 황제가 일으킨 신의 분노야. 내 아비를 해친 대가를 받은 거라고.”

“상냥한 신께서는 축복받은 자손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는다지? 그러니까 신을 깨운 네 아비에게 책임을 물어야지.”

이븐은 숨을 가다듬으며 후작을 보았다.

“설마, 그런 생각으로 대공성을 노렸던 거야? ‘상냥한 신’이라고? ‘부름을 외면하지 않는다’라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긍정을 의미하는 침묵에 이븐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그래. 그랬구나. 황제는 저주를 풀겠다고 쫓아와서 신방을 알려달라고 윽박지르더니, 너는 네 뜻대로 이용해먹으려고 신방을 찾았구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깔깔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대체 누가 그런 순진한 망상을 심어줬을까? 불쌍한 제르뵈. 버림받은 황가의 핏줄 마이헬러. 아아, 그래.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트리델리아 제국은 콘틸리아 황족과 아크펠라 대공가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힘과 신물 모두를 잃어버린 황가보다는 아크펠라에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왔다. 건국 시초라고 알려진 가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그래, 제르뵈. 신방을 찾는다고? 내가 알려줄게. 신의 이름을 원한다면 그것도 알려줄게. 대신 그 아이들은 내버려 둬.”

후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그레인과 탈리온 말인가? 이제 서로 죽고 못 사는 지경에 이른 그 두 아이를 말이야?”

아시카와 드루쉬아의 이야기였다. 후작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깜찍한 거래를 시도하는구나, 이비스.”

“신방을 원하잖느냐. 그걸 내주겠다고.”

“나는 신방을 손에 넣으려는 거지, 파괴되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마이헬러 후작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를 시도하는 이븐이 가소로운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건국 왕이 남겼다는 그 기록이 황궁에만 있는 줄 알지? 천만의 말씀이야. 가만있어보자,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후작의 입에서 오래된 시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한 모금의 물이 선사해준 축복이어라….”

이븐에게도 퍽 낯익은 구절이 뒤를 이었다. 오래전 대공가의 서고에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최초의 기록.

그것은 한 모금의 물이 선사해준 축복이어라

방랑하는 여행자가 내민 온정의 손길

미약한 신은 한 모금의 물을 얻고 가장 고귀한 것을 내어주었으니

고향을 잃은 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새로이 뿌리내릴 비옥한 대지와 마르지 않는 강물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이 땅의 시초

생명이 잉태된 대지 위에 뿌리내린 힘의 원천

현명한 왕이 가신들에게 명하노니

굳건하고 튼튼한 집을 지어라.

신께서 편히 잠들어 대대손손 이 땅을 축복하도록.

신께서 나누어주신 축복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신께서 어여삐 여기던 이에게 열쇠를 주어라

불손한 이들이 감히 발 들이지 못하도록

신성한 땅이 신의 은신처가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곤하게 잠든 신을 깨우지 말지어다

굳건히 가두어둔 힘을 거두지 말지어다

열쇠를 내어주지 말지어다

나누어 받은 힘을 한 그릇 안에 담지 말지어다

그것만이 온전한 너희의 힘이니

이 나라의 근간이며 이 땅의 생명이어라

마이헬러 후작은 차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신방은 감옥이야. 그렇지?”

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신을 가두기 위해 만든 감옥. 왕의 명령을 받은 아크펠라와 탈리온은 신에게 나눠 받은 힘으로 신을 가두었다.

잠들어 있는 신을 깨우지 말라는 경고, 나누어진 힘을 한 그릇 안에 담지 말라는 경고. 그것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크펠라와 탈리온은 만나서는 안 돼. 둘 중 하나라도 손에 넣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희한하게도 양쪽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단 말이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후작이 혀를 찼다.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에 이븐이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였나?”

난데없는 재앙으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14년 전의 사건.

“로샤강 댐을 하필이면 그날 무너뜨린 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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