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르쉬아?”
샤프리가 문 옆으로 비켜서자 드루쉬아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지만 손 하나가 불쑥 끼어들어 막았다. 이번에는 나일이었다.
“단둘만의 대화는 물 건너간 것 같은데, 함께 하죠.”
나일은 내내 프라이빗룸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샤프리를 배려해 자리를 피해있었을 뿐.
작은 프라이빗룸에 네 사람이나 들어와 있으니 숨 막힐 정도로 안이 비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시카는 갑자기 나타난 드루쉬아 때문에 당황했다.
‘왜 르쉬아가 샤프리와 함께 있어?’
의문과 불쾌한 감정이 교차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드루쉬아의 시선은 아시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쩌면 화가 난 것도 같았다.
그래서 드루쉬아가 소파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쥘 때도, 그 자리가 제 것이라는 양 샤프리와 나일을 돌아볼 때도 밀어내지 못했다.
드루쉬아는 나일이 끼어든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부러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대공성까지 함께 다녀온 마당에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가 아닌 샤프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샤프리, 우리 둘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이제는 설명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저 남자분은 누구죠?”
샤프리는 조용히 구석에 자리 잡은 나일을 가리켰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아시카였다.
“이번 사건의 목격자. 그러니 나일을 빼놓고 얘기하긴 어려워요.”
샤프리는 나일의 얼굴을 뜯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죠?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님 내가 너무 잘생겼나?”
나일의 넉살에 샤프리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서요. 됐어요. 뭐 흔한 얼굴이라서 그런가 보죠.”
차디찬 대꾸에 나일이 입을 다물었다. 샤프리는 나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내 조건은 이거예요. 이 문제에 레이디 이그레인 뿐 아니라 드루도 관여하기를 원해요.”
아시카가 난감한 얼굴로 드루쉬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단하게 굳어진 얼굴에서는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레이디 마이헬러를 도울 사람은 저예요. 왜 여기에 르쉬아가 필요하죠?”
르쉬아, 라는 애칭에 샤프리의 눈매가 움찔했다.
“제 인생이 달린 문제예요. 한데 레이디 이그레인에 대해 제가 뭘 알죠? 소공작의 지위만으로 당신을 신뢰할 수는 없어요.”
무엇을 꾀하든 확실한 보증이 필요했고 샤프리가 생각하는 보증은 드루쉬아였다. 그러나 그는 샤프리의 어쭙잖은 부탁 따윈 들어주지 않을 터였다.
그런 드루쉬아를 아시카가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떨까. 그 가정 하나로 서신을 받자마자 그를 불렀다. 예상대로 드루쉬아는 아시카와 만난다는 소식에 만사 제쳐놓고 달려왔다.
이 자리에 동행하면서 샤프리가 드루쉬아에게 내건 조건은 둘이었다. 아시카와 먼저 대화를 나누겠다는 것과 반드시 드루쉬아가 저를 도와야 한다는 것.
아시카와 샤프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드루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뭔데?”
“사람을 빼내야 한다고 했죠? 드루 네가 나서줘. 연락도 너에게만 할 거야.”
“그게 원하는 전부야?”
“당장은, 그래.”
드루쉬아는 샤프리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끊어진 인연을 다시 손에 쥐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샤프리의 필요를 위해.
“그 전에 샤프리, 나에게 해명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
“무슨 말이야?”
샤프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 태도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정황을 몰랐다면 깜박 속아 넘어갔을 터다. 드루쉬아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르쉬아.”
주위를 환기시킨 것은 아시카였다. 당장은 샤프리를 추궁하는 것보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급하다. 드루쉬아도 그 사실을 깨닫고 한발 물러났다.
“좋아. 뭐가 됐든 협력하지. 그럼 된 건가?”
말끝에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시카에게 향했다.
‘이렇게 선선히?’
미안한 마음과 이래도 될까 하는 의문. 아시카의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노기가 서려 있던 눈동자에서는 이제 기꺼움 마저 느껴졌다. 매정하게 등 돌리고 가버린 아시카가 다시 제 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시카, 알고 있지? 사람을 쓰는 건 내가 나아.”
혹시 그녀가 거부할까 봐 단단히 못을 박았다. 후작저에서 사람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 그것도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아시카는 드루쉬아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했다.
“기사단은 안 돼요.”
“나도 알아. 당장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냐.”
“그럼 어쩌려고요?”
“내가 가진 게 기사단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그러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내게 왔어야 했어. 묵직한 시선이 그런 의미를 담고 질책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해지자 나일이 나섰다.
“이렇게 시간 잡아먹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레이디 마이헬러는 당장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의 위치부터 파악해줘요.”
“건물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드루는 봐서 알겠지만, 수도 외곽의 산 하나를 통째로 끼고 있다고요.”
후작저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간 의심을 사게 될 것이 뻔하다.
“숲과 연결된 후문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그 일대를 지키는 경비의 수도 많았고. 이 정도면 확인할 범위가 줄지 않겠어요?”
샤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문과 인접한 별채 몇 개가 머릿속에서 차례로 지나갔다.
“이 일에 개입한 놈들이 기사인지 혹은 어디 출신인지도 알아봐 줘. 작은 정보라도 좋으니까 뭐든.”
“나를 첩자로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드루.”
드루쉬아의 요구에 샤프리는 선을 그었다. 잠시 손을 잡는 것뿐 휘둘릴 생각이 없다는 분명한 의사표시였다.
“이 일에 내가 개입하기를 원한 건 너야, 샤프리. 입맛대로 골라서 행동할 생각이면 그만둬. 아시카는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네가 아니어도 돼. 모르지 않을 텐데?”
매정한 일갈에 샤프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화와 타협이 통하는 건 아시카지 드루쉬아가 아니었다. 그걸 깜박 잊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얼굴을 살폈다.
한때의 친우가 아닌 적을 대하는 매몰찬 표정. 드루쉬아와 오래도록 대립했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는 보여준 적 없던 태도였다.
‘나를 정말로 미워하지는 않았나 보구나.’
미움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조차 아시카에게 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두려워졌다. 이 남자가 정말로 저를 미워하게 된다면 견디기 어려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드루쉬아의 차디찬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샤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 준비를 핑계로 나온 거라 시간이 얼마 없어요. 이제 얘기는 된 건가요?.”
당장 다음 달이 결혼식이었다. 샤프리가 팔려 가듯 맺어졌기에 거의 모든 절차를 생략한 굴욕적인 결혼이었다.
샤프리가 나갈 준비를 하자 아시카가 재차 당부했다.
“잊지 말아요. 레이디 마이헬러를 돕는 건 그분이 온전히 그곳을 나왔을 때라는 걸.”
“알아요. 그리고.”
새삼스럽게 아시카에게 꼭 붙어 있는 드루쉬아를 보았다. 대화를 하는 내내 드루쉬아의 손은 아시카를 놓지 않은 채 친밀함을 과시했다. 샤프리는 절대 넘어설 수 없었던 선을 아시카는 너무 쉽게 넘어버린 것 같아서 질투가 났다.
“제 결혼 문제에 이그레인이 개입했다는 걸 누구도 모르게 해줘요.”
당연할 수도 있는 요구에 문득 아시카는 의문이 들었다.
“왜죠?”
질문이 돌아올 줄 몰랐는지 샤프리가 움찔했다.
“그야… 이그레인이니까요.”
“그러니까 왜요? 이그레인이 마이헬러와 관계가 나빴던 적이 있나요? 제 기억에는 한 번도 없었어요. 이 일로 난처해지는 건 제 쪽이겠죠. 그런데 레이디 마이헬러가 왜 그걸 걱정하나요?”
아차, 하는 표정이 샤프리의 얼굴에 스쳐 갔다. 미묘한 어조의 차이를 놓치지 않고 아시카는 허를 찔렀다. 드루쉬아조차 모르고 지나갈 뻔한 사소한 틈새였다.
이그레인과 탈리온 양쪽 모두에게 마이헬러는 위험하다.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알지만 샤프리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아니 몰라야 했다.
“뭘 알고 있는 거죠?”
아시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샤프리가 뒷걸음질 쳤다. 귀족적인 가면도 이 순간에는 통하지 않았다. 샤프리를 추궁하는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를 빨아들이는 늪처럼 깊어서 왈칵 두려워졌다.
“레이디 마이헬러.”
“얘기, 끝났어요. 조만간 소식을 전할게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샤프리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복도였다. 잠시 서서 표정을 수습한 뒤 우아한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샤프리가 사라진 뒤 드루쉬아가 나일을 돌아보았다. 나일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네드로프 공자, 잠시 자리를 비켜줬으면 해.”
“아가씨, 괜찮겠어요?”
나일은 축객령을 내리는 드루쉬아 대신 아시카에게 물었다. 마치 ‘네 지시 따위는 받지 않아’하는 태도였다.
솔직한 마음으로 아시카는 드루쉬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부담감이 컸다. 그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드루쉬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내 협조가 필요한 것 아니었어?”필요. 그래 그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 필요를 내세워 대화를 종용하는 드루쉬아가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나일, 먼저 나가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요.”
“허.”
드루쉬아와 나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불꽃이 튄다.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은 영 친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사사건건 서로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영역 다툼을 하는 수컷들 같달까.
영역 다툼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것도 드루쉬아를 상대로. 아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나갈게.”
더 놔뒀다가는 또 시비가 걸릴 판이다. 그러니까 어서 나가라고. 아시카의 채근에 나일은 마지못해 프라이빗룸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어깨를 쥔 손을 아직도 거두지 않았다. 내내 쥐고 있었던 탓에 외투 너머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 사소한 접촉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아시카는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커다란 손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목선을 타고 올랐다. 외투 깃을 내리고 그 속에 파묻힌 하얀 피부에 손이 닿는 순간 움찔, 어깨가 움츠러든다.
“르쉬아.”
나직한 한숨과 작은 목소리. 언젠가는 그리도 애타게 불러대더니. 참으로 야속한 여자였다.
“그래, 나 여기 있어.”
아시카의 손이 드루쉬아의 손을 잡았다. 그만 놓으라는 의미였지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아니 내가 뭘 어쩌면 되는 걸까?”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지는 알아?”
맥없는 타박에 아시카는 잡힌 손을 당겼다. 드루쉬아는 손을 놓는 대신 작은 소파를 빙 돌아 그녀의 앞에 섰다.
작은 프라이빗룸이 더욱 작아 보이게 하는 커다란 체구.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압박하는 남자였다.
드루쉬아가 입을 열려고 하자 아시카가 먼저 말을 뱉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해요.”
“설명을 듣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야. 왜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
“이건….”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한 드루쉬아를 온전히 이해시킬 만한 설명은 없었다. 아시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문제예요.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마이헬러가 연관돼 있어. 그런데도 나와 상관없을 것 같아?”
“무슨 말이에요?”
아시카는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드루쉬아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르쉬아, 설마…. 아.”
문득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두 사람은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각자 지닌 정보가 상이하고 한 번도 공유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계속 엇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공성에서 벌어진 일에 샤프리가 연관되어 있어. 심증일 뿐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심증이지.”
드루쉬아는 대공성에서 철수한 병력을 쫓아 부대장을 만났을 때 명령서를 확인했다. 위조가 아닌 진짜 명령서를.
“내가 보낸 적도 없는 진짜 공문서를 들고 철수 한 거야. 그게 어떻게 가능했겠어?”
필체를 위조할 수는 있어도 고위 귀족의 공문서를 위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문마다 서로 다른 특수제작된 비침무늬 종이를 사용하며, 인장은 그에 반응해 무늬를 만들어내는 독특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장과 가문의 공문서 용지, 둘 다 진짜여야 한다. 그 말은 곧, 누군가 드루쉬아의 인장을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그의 손에서 한 번도 떼어놓지 않았던 인장 반지를 말이다.
드루쉬아가 인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시기는 딱 한 번뿐이었다. 독에 중독되어 의식이 없었을 때.
“르쉬아, 그러면 대공성에 침입했던 사람들은….”
“마이헬러야. 대공성에서 우리를 공격했던 놈들 배후에는 분명 마이헬러가 있어.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 대공성에 있는 뭔가를 노리고 있었어.”
아시카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드루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시카?”
“르쉬아, 내가 찾아봤던 건국신화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