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시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일은 집무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재차 반복했다.
“분명 마이헬러 후작가의 저택이었어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아시카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몸이 후들후들 떨려서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아가씨.”
나일이 부르는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만 아시카는 나일을 기다렸다. 전에 없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이면 돌아왔어야 할 나일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나일이 돌아온 것은 정오가 될 무렵이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평소처럼 조심했어야 했다. 낮이 아니라 밤에 아무도 모르게 이븐을 찾아갔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코랄이었을까. 코랄이 마이헬러와 어떤 접점이 있었기에.
아니다. 이런 잡념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시카는 후들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찾아야 해. 이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가씨.”
“조부님은 어디 계시지? 아냐, 나가셨지. 펄번은? 기사단을 동원하면….”
“아가씨!”
아시카가 허둥지둥 일어나 집무실 문을 열자 나일이 재빨리 다시 닫았다. 문을 가로막고 선 나일은 전에 없이 단호한 표정이었다.
“진정하고 생각을 하세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일.”
“지금 당장 아가씨가 뛰쳐나가서 뭘 할 수 있어요? 기사단이라도 동원하시게요? 기사단의 명령권은 이그레인 공작님께 있어요.”
나일은 매정하게 현실을 꼬집었다.
“설령 명령권이 있다 한들 어쩌시려고요? 상대는 마이헬러 후작가에요. 다짜고짜 기사단을 끌고 쳐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서 그래요? 가문의 이름을 걸고 기사단을 움직인다는 건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저쪽에서 그걸 빌미로 영지전을 선포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건 한 가문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기사단을 소유한 것은 일부 고위 귀족뿐이고, 그것도 허가받은 숫자 이상을 넘어갈 수 없었다.
영지가 있는 가문끼리는 영지를 공격당하거나 친족이 해를 입는 등 명백한 침해 행위가 발생했을 때 영지전을 선포할 수 있었다.
영지가 아닌 수도에서는 각 가문의 사유지를 영지로 간주한다. 때문에 기사단이 정당한 사유 없이 다른 가문의 저택에 침입한다는 건 가문 간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족이 납치를 당했다거나 하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말도 안 돼.”
아시카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다급했다.
“정공법으로는 안 돼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아시카는 서 있을 기운도 없어서 그대로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제 모양이 얼마나 처량할지, 예법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일은 조금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목숨을 노린 거라면 납치하기 전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어요. 아직 시간이 있어요.”
“하필이면 마이헬러야. 거기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외부인을 배척하는지 알아? 첩자조차 심기 어려워서 마이헬러에 대해 아는 귀족이 거의 없어.”
오래도록 영지에 은둔해있던 가문 마이헬러. 후작이 은둔했던 수십 년 동안 수도 귀족 중 누구도 마이헬러 후작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얼마나 폐쇄적인지 저택에서 일하는 막일꾼마저 영지에서 직접 데려온다고 들었다. 그러니 마이헬러 저택 내부의 정보는 사소한 것조차 알 방법이 없었다.
나일은 아시카를 내려다보며 간단한 답을 던졌다.
“그럼 이미 내부에 있는 사람을 찾아보시는 건 어때요?”
“이미 내부에 있는 사람?”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죠. 오래됐을수록, 폐쇄적일수록 문제는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생기거든요. 마이헬러 후작가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요?”
“아!”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가 기억 어딘가를 더듬는 동안 나일이 손을 내밀었다. 아시카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골몰해 무의식중에 그의 손을 잡았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마이헬러의 내부 사정을 잘 알면서 최근에 문제가 생긴 사람을 알아.”
협조해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접근해 볼 가치가 있었다. 아무리 가문이 중해도 받는 것 없이 제 인생을 희생해야 하는 처지라면 약간은, 아주 약간의 도움은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시카는 재빨리 일어나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귀족 레이디가 홀로 입장해도 어색하지 않으면서 비밀이 보장되는 공간.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는 곳은 오페라 하우스나 갤러리의 프라이빗룸이었다.
그중에서 아시카가 택한 곳은 전시회가 한창 진행 중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은 갤러리였다. 사실상 약속도 아닌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었다. 회신을 기다릴 시간조차 없었기에 시간과 장소만을 던져놓고 기다렸다.
불과 하루. 당사자에게 서신이 전해진 것만 확인하고 답을 듣지 못했다. 상대가 나올지 어떨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 아시카는 프라이빗룸 소파에 앉아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달칵, 문이 열리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원하던 상대가 나타났다는 것을.
“어서 오세요. 레이디 마이헬러.”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네요.”
샤프리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프라이빗룸에 아시카가 혼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연회나 무도회장에서조차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말 한마디 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시카는 샤프리의 태도를 이해했다. 불편하기는 아시카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사이가 아니라는 건 인정해요.”
“의견이 같아서 다행이네요. 안부 인사 따윈 생략하죠. 그보다 저에게 보낸 이 서신, 무슨 의미인가요?”
샤프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아시카의 눈에는 보였다. 무례한 통보에도 거절 없이 달려 나온 것이나 아시카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드러나는 절박함을.
“그라나티 백작과의 결혼을 원치 않으면 도와줄 수 있다고요? 정말인가요?”
“써 보낸 그대로예요.”
사실 아시카는 샤프리의 결혼 상대가 누가 되든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건너건너 들려온 이야기는 아무리 아시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년을 넘어선 남자의 세 번째 부인. 그것도 전 부인의 행방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떠밀려 하는 결혼. 후작가의 딸이라서 금지옥엽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됐던 일개 레이디가 됐던 고위 귀족은 정략혼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결혼 시장에서 소모품처럼 이용되는 건 여자들이었다.
물려받을 작위나 재산이 없는 남자들은 아예 결혼 시장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억지로 팔려가지는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아이러니였다.
결혼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샤프리는 아시카의 말을 온전히 믿기가 어려웠다.
“어떻게요? 정치력도 없는 이그레인이 무슨 수로?”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원하는 결과만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
방법은 만들면 된다. 제국 내에서 가장 많은 자금과 상단을 보유한 것이 이그레인이었다.
그라나티 백작의 주 수입원의 판로를 틀어막아 자금줄을 끊어놓을 수도 있고, 보유한 상단들의 주요 거래처를 모조리 빼앗아서 사업체를 고사시킬 수도 있었다.
그라나티 백작이 마이헬러와의 혼맥으로 어떤 이득을 취하든 이그레인의 압박으로 입게 될 손해가 더욱 클 것이다.
샤프리는 그제야 소파에 앉았다. 뭔가 안심한 듯도 했고 화가 난 듯도 했다.
“부럽네요. 나는 꼼짝없이 목줄 맨 짐승처럼 끌려가야 했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결혼을 막을 수 있다니.”
말은 쉽게 했지만 결코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다. 이그레인도 그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적당히 넘어올 만한 사탕발림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모두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샤프리를 온전히 손에 넣는 것.
당장 결혼을 막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언제든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었다. 때문에 아시카가 샤프리에 대해 계획한 것은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가문의 남자가 있다면 결혼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그게 누가 됐든 샤프리와 결혼하는 대신 이그레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샤프리는 아시카의 시선을 피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젠 무서워지려고 하네요. 레이디 이그레인이 이렇게까지 저를 돕는다는 게.”
“꼭 지금이 아니어도 원하는 결혼 상대가 있다면 언제든….”
“그건 레이디 이그레인이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예요.”
내내 끌려오던 샤프리가 단칼에 말을 잘랐다. 순간 아시카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오해하지 말아요. 적어도 나는 당신과 같은 남자를 두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랬던 적도 없었고.”
혹시 모를 오해를 샤프리는 분명하게 정리해주었다. 사실 샤프리 입장에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드루쉬아는 곁을 내줬을 뿐, 샤프리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천성이 모질고 냉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청혼서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이 여자만큼은 예외였다 이거지.’
대부분의 수도 귀족들은, 두 가문이 반목하는 것보다 혼맥으로 얻을 이익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드루쉬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거라고 떠들었다. 드루쉬아의 성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드루쉬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샤프리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드루는 진심이야.’
한편으로는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 아시카가 부러웠다. 여유가 있었다면 둘 사이를 방해하기 위해 심술을 부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러나 당장은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더욱 시급했다.
아시카를 바라보는 청록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 모든 게 공짜는 아니겠죠? 저에게 뭘 원해요?”
올 것이 왔다. 아시카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가능성을 계산하며 샤프리를 살폈다.
‘거절은 용납할 수 없어.’
그럴 경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압박할 것이다. 치졸하고 나쁜 짓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아시카는 절박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어떤 도움말인가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의외로 샤프리는 침착했다. 아시카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마이헬러 저택에서 사람 하나를 빼 오려고 해요. 도와줄 수 있나요?”
“사람이요?”
“마이헬러 저택에 있는 건 아는데,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는 상태예요. 그 사람을 찾아서 데리고 나올 수 있게 도와줘요.”
샤프리는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마이헬러 저택의 사람을 빼가려는 건가요?”
“아니요. 납치를 당했어요. 누가 주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누가요? 누가 납치를 당했다는 거죠?”
“제가 아는 여자분이에요.”
“그럴 리가….”
샤프리는 믿을 수 없었다. 후작은 눈에 띄는 문제는 절대 일으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통해 교묘하게 일을 꾸미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직접 연관되는 법이 없었다.
에르윈이 후작 몰래 일을 저질렀을 리도 없었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도록 키워진 남자였다.
‘후작이 여자를 납치해? 세상만사 무관심하고 초탈한 것 같은 사람이?’
아시카가 착각을 했든 아니든 중요한 건 샤프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아시카는 샤프리의 동요를 흘려버리고 입을 열었다.
“우선은 그분이 어디 있는지부터….”
차분히 대화에 응하던 샤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라는 의문을 갖기도 전에 아시카를 돌아보며 문손잡이를 당겼다.
“저에게도 조건이 있어요.”
문이 열리고 키가 큰 샤프리를 압도할 만큼 커다란 그림자가 안으로 드리웠다.
순간 아시카는 자신이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왈칵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문 뒤에서 나타난 상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