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98화 (98/153)

#98.

공작저로 돌아온 뒤에도 아시카는 긴장을 풀기 어려웠다. 코랄을 마주친 것이 마음에 걸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초조하게 방을 오갔다.

‘우연이 아니야.’

코랄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녀의 마차를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두 사람의 관계는 파혼으로 끝이 났고, 쫓겨나다시피 수도를 떠났던 코랄은 소후작의 자격으로 다시 돌아왔다.

파혼과정에서 코랄이 느꼈을 참담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문제 삼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소후작이 되었으니 코랄도 그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불안해.’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지 저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우일 뿐이라고 지나치기에는 지난 몇 달 동안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코랄의 시선은 정확히 이븐에게 향해있었다.

‘분명 아는 사이는 아닐 거야. 그런데 왜?’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븐을 본 것일까.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양.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아시카는 간단한 서신을 적어 침실에서 나왔다.

나일이 머무는 곳은 사용인들의 숙소가 아닌 별채에 딸린 방이었다. 지방 영지 출신이라도 자작가의 장남이라 손님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아시카가 문을 두드렸을 때 나일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나일,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아가씨, 요즘 어디에 그렇게 정신이 팔린 거예요?”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도통 틈이 보이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 나일은 저를 찾아온 아시카가 반가운 눈치였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당장 급한 것부터 처리해 주면 안 될까?”

“무슨 일인데요?”

“이븐에게 다녀와 줄래? 서신을 보낼 것도 있고, 부탁해놓은 약도 있고.”

나일이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아시카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을 읽은 탓이다.

“그래요, 다녀올게요.”

“고마워. 기왕 가는 거 별일 없나 주변도 살펴봐 주면 좋고.”

“알았어요. 다녀오면 새벽이 넘을 테니까 그만 쉬어요.”

“그래.”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며 나일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시카가 자리를 떠난 뒤 나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신경을 쓰는 거지?’

주고받는 것이 명확한 관계였다. 딱히 살가울 것도 없는. 그런데 대공령을 다녀온 뒤부터 뭔가 변했다. 이븐을 만나보면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나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나일이 다시 세인트리드 거리에 다다랐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어쩐 일인지 고요해야 할 거리가 어수선하다. 나일은 바쁘게 달려가는 사람들과 치안대원들을 보며 말을 재촉했다.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뿐, 멀리서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보였다.

“물통을 더 내와!”

“치안대는 뭐 하고 있어? 불이 옮겨붙으려고 하잖아!”

“사람은? 저기 사람이 있지 않았어?”

“아, 몰라. 일단 불부터 꺼!”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외침이 분명하게 들렸다. 나일은 목적지를 앞에 두고 급하게 말을 멈췄다.

“이런, 망할.”

시커먼 연기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건물은 이븐의 아트샵이었다. 아시카가 내내 불안해하더니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걸까.

나일은 말에서 내려 화재 현장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잡았다.

“이봐요, 저기 아트샵 주인은요? 저 안에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몰라. 밖에 나와보니까 벌써 불이 저렇게 커졌어. 근데 사람이 없으니까 조용한 거 아냐?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에 살려달라고 소리쳤겠지.”

평소에도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안에 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만 옆 건물로 옮겨붙지 않도록 애쓰는 중이었다.

나일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불이 난 건물 주변을 돌았다.

‘갑자기 웬 불이지?’

아트샵은 꽤 오래 이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다. 희귀수집품을 주로 취급하는 곳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적이 생길 이유도 없었다.

‘별일 없을 거야. 아무렴.’

흔치 않은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도 세상 다 산 듯 초연한 여자였다. 때때로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이질적이던 여자가 이런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븐은 진작에 빠져나갔겠지. 이 정도 대비도 안 했을 리 없어.’

기이하게도 미로처럼 복잡했던 건물 내부. 침입자가 있어도 쉽게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피해 살고 있었던 건가?’

건물 어디엔가 비밀통로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비밀통로가 있다면 어디로 이어졌을까.’

나일은 아트샵이 아닌 주변의 다른 건물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도심 한복판의 오래된 건물. 아마도 멀리 가지는 못하고 인근의 다른 건물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바로 옆 건물이라던가.’

나일은 주변 건물을 샅샅이 살폈다. 그중에서도 평소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느껴졌던 건물의 뒤쪽.

나일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븐을 찾는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주위의 이목이 온통 화재 현장에 몰려있는 동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놓아라! 아가씨를 놓아!”

악을 쓰며 발악하는 여자는 리네였다. 상대는 대꾸하지 않고 리네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끅 하는 신음과 함께 비명이 잦아들었다.

리네가 떨어져 나가고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형체가 축 늘어진 채 끌려가고 있었다. 이븐이었다.

‘맙소사. 저게 몇 명이야?’

눈앞에 보이는 수만 해도 여섯, 가까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들은 그 배가 넘었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서는 보통이 넘는 이들이었다.

‘여자 하나 납치하려고 저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했다고?’

나일은 망설였다. 저 혼자 나서서 의식 없는 여자를 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하는 사이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다른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저쪽이다!”

“마차를 막아!”

족히 열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검 한 자루만으로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나일은 담벼락 아래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뭐야, 또 다른 적이야? 아니면 이븐이 고용한 용병인가?’

몇 달 동안 아트샵을 오갔지만 한 번도 무장한 사람들의 기척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튀어나온 사람들이 이븐을 도우려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으억! 이게 무슨 일이야!”

“여, 여기 싸움이 났어! 치안대 어디 갔어!”

조용했던 건물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급해진 적들이 대기하고 있던 마차가 아닌 말 등위에 이븐을 짐짝처럼 올렸다. 양쪽이 치열하게 맞붙은 사이 이븐을 태운 말이 출발했다.

“뒤를 쫓아라! 놓치지 마!”

누군가의 외침에 싸우던 적들을 뒤로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변으로 다시 흩어졌다. 순식간에 거리 곳곳에서 다시 말을 끌고 나타난 이들이 먼저 사라진 이븐의 뒤를 쫓았다.

나일 역시 말에 올라탔다.

“제기랄.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양쪽 모두 공방이나 상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꾼들의 옷차림이었다. 나일의 눈에는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둘 다 적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혼잡한 틈을 타서 뒤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그렇게 둘씩, 셋씩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추격자들이 바짝 거리를 좁히자 가장 앞쪽에 가던 이들 몇 명이 뒤를 돌면서 석궁을 들어 올렸다.

‘뭐지?’

날카로운 파공음이 스쳐 가는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검사와 궁수의 조합. 보통의 기사들은 활을 잘 쓰지 않는다.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들은 검과 석궁을 둘 다 자유자재로 다뤘다.

‘설마?’

나일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아시카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공령에서 탈리온의 기사들이 끝내 입을 다물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쫓고 쫓기던 두 무리는 수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숲길에서 다시 맞붙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나일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까지 합세하자 이쪽의 열세가 분명해졌다. 악착같이 뒤를 쫓던 이들도 결국 물러나야 했다.

‘지금은 안 돼.’

당장 달려든다고 해서 이븐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 양쪽 무리가 난전을 계속하는 사이 나일은 숲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렸다.

중심가가 아닌 도심을 벗어난 외곽지역에는 건물이 몇 채 없었다. 있어 봐야 돈 많은 상단주의 별장이나 귀족들의 사유지가 대부분이었다.

이븐을 태운 말은 진작에 사라졌다. 나일은 숲을 돌아 길을 앞질러 갔다. 그대로 길을 따라 달리다 갈림길이 나오는 곳에서 최근의 흔적을 확인하고 방향을 잡았다.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마침내 흔적이 끝난 지점에서 나일의 추적은 끝이 났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담장과 거대한 문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별장이라면 건물이 있어야 했는데 그조차 보이지 않았다. 숲에 가려진 더 안쪽에 건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정문이 아닌 후문일 터다.

‘별장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지방 영주의 사유지 일부처럼 보였다. 문득 수도에 있는 고위 귀족 중에서 중심가가 아닌 외곽에 저택을 둔 가문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건물이 없는데도 경비가 삼엄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입구를 에워싼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세인트리드 거리에서부터 나일이 뒤를 쫓았던 이들이다.

나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다가 틈을 노려 담장의 문이 보이는 곳까지 접근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맙소사!’

커다란 문에 그려진 웅장한 문양은 나일도 익히 아는 가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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