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아시카의 머릿속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진실에 깊숙이 발을 들였지만 정작 ‘왜’라는 질문에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이븐이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시기적절하게 이븐의 상단이 이그레인과 계약을 맺은 것도, 대공령으로 납품을 가겠다고 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아시카가 대공령으로 가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는데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다.
이븐은 아시카에게 뭘 기대한 걸까. 이븐이 왜 몸을 숨겨왔는지 이유를 알면서도 그녀 또한 저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걸까.’
아니 애당초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한 걸까. 과연 어떻게?
“아가씨.”
잔느의 목소리가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아시카를 일깨웠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의문이 가득하다. 그리고 전혀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신체의 일부를 바꾸는 게 가능할까?”
“예를 들면 어떤 부분 말입니까?”
잔느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칼은 염색을 하면 되고 피부도 일시적이나마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눈은? 눈의 색을 바꾸는 게 가능해?”
“들어본 적 없는데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
잔느의 어조에는 확신이 없었다. 아시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일이 나섰다.
“아니, 가능해요. 제국 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어떻게?”
“그런 약이 있다고 들었어요. 연금술사가 만든.”
“아….”
아시카의 입에서 탄성과 함께 헛웃음이 흘렀다. 어쩌면 이렇게도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지.
나일은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연금술사의 약은 강력하지만 위험하다고 하죠. 신체의 일부를 변형하는 약은 부작용이 심해서 제국 내에서는 금기나 다름없고요. 그래서 암암리에 배척당하면서 제국 내에서 연금술사는 거의 사라졌죠.”
“어떤 부작용이 있는데?”
“몸 어딘가에 흔적이 남는답니다. 손이나 발처럼 가장 말단 부위에.”
잔느가 나일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처럼 경계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를 수상쩍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터다.
“네드로프 공자는 어찌 그리 잘 압니까?”
“저도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예요.”
“그럼.”
나일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시카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연금술사의 약으로….”
그녀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나일이 재촉했다.
“아가씨? 말씀하세요.”
“그게….”
본인이 생각하고도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건 나일에게 물어볼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낮인데도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날씨 탓에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한데도 거울 너머의 세상처럼 묘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날.
익숙한 거리를 지나 이븐의 아트샵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채 멈추기도 전에 마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어어엇!”
마부의 비명에 뒤이어 그그극, 하는 거친 충돌음과 함께 마차가 진동했다. 잔느는 재빨리 반대편에 앉아 있던 아시카를 잡았다.
살짝 기우뚱했던 마차가 제자리를 찾으며 멈춰섰다. 잔느가 마부석 쪽의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갑자기 다른 마차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부딪혔습니다. 길도 좁지 않은데 어쩌자고.”
마부는 상대 쪽의 마차를 보고 당황했다. 부딪혀 온 것은 저쪽이지만 무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였다. 귀족가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마차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위 귀족의 것이라 주눅이 들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편 마차의 마부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그 조그만 마차로 길을 떡하니 막으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누가 막았다고 그러십니까? 좁은 길도 아닌데 와서 부딪힌 건 그쪽이 아닙니까?”
“이 사람이! 길 막아놓고 어디서 큰소리야?”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딨습니까?”
난데없는 마차 사고에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멈춰섰다. 한쪽은 문장이 없는 평범한 마차였기에 더욱 이목이 집중되었다. 만약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난 사고라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아가씨, 제가 나가봐야겠습니다.”
“어차피 다 왔으니까 함께 내리지.”
마차에서 내리는 잔느의 뒤를 따라 나일과 아시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시카의 신경은 구경꾼들보다 맞은편 건물로 향했다. 아트샵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건물 안에서도 사고가 보였을 터다.
아시카는 상대편 마차의 마부를 향해 물었다.
“주인은 어디 가고 마부의 목소리가 이리 높아?”
“뭐요? 마차 주인 되시오?”
마부는 마부석에서 내려올 생각도 하지 않고 아시카를 내려다보았다.
고급재질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 단조로운 디자인에 몸에는 보석하나 걸치지 않았다. 거기다 문양도 없는 마차를 탔으니 귀한 신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마부의 태도는 뻔뻔했다.
“길을 막은 건 그쪽이니 사고도 그쪽 탓이오.”
“억지를 부리는구나. 시비는 주인과 가리도록 하지. 주인은 어디 있나?”
아시카의 채근에 마부가 비죽 웃었다.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슬쩍 뒤돌아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나리, 저쪽에서 마차 주인을 찾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을 찾는 마부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화려한 금장식을 한 마차의 문이 열렸다. 이어 밖으로 나온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아시카의 눈이 확 커졌다.
“몰라볼 뻔했습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순간적으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시카는 벌어진 입술을 앙다물며 충격을 감췄다.
“오랜만… 이군요. 오클레인 공자.”
코랄이었다. 돌아볼 겨를조차 없어서 잊고 지냈던 그녀의 전 약혼자.
장미꽃이 흐드러지던 때 헤어져서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에 다시 만났다. 평생 다시 볼 일 없기를 바랐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올 줄이야.
“왜 그런 표정입니까. 오랜만에 만난 전 약혼자가 반갑지도 않습니까?”
“이 넓은 수도에서 하필이면 전 약혼자의 마차와 사고가 나다니, 퍽 재수 없는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코랄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가 기억하는 아시카는 절제가 익숙한 여자였다. 싫은 사람이 앞에 있어도 피하면 피했지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우연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하죠.”
그 차분한 절제마저 벽처럼 느껴졌던 여자가 변했다. 귀족적인 가면을 치워버리고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기꺼웠다.
아시카를 바라보는 회색 눈동자가 강렬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쁨 또는 분노, 혹은 다른 무엇.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아시카는 한시바삐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굳이 거리 한복판에서 주고받을 이야기는 아니죠. 할 말이 있으면 공작저로 서신을 보내세요.”
아시카가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코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가로막은 것은 잔느였다.
“오클레인 공자, 예의를 지키십시오.”
코랄은 그제야 잔느를 발견하고 얼굴을 구겼다.
“레이디 이그레인.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지난 반년 가까이 저는 몹시 힘들었는데, 레이디 이그레인께서는 철 만난 꽃처럼 만개한 얼굴이군요.”
흠칫 놀란 아시카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드루쉬아를 상대하면서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내던 것이 어느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아시카가 변한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물씬 풍겨 나오는 향기마저 달라진 느낌이랄까. 절대 변치 않을 것처럼 철벽같던 여자가 왜 달라졌을까.
‘설마 그것 때문인가.’
한 달 전쯤 이그레인 저택에 탈리온 공작의 청혼서가 날아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략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차게 식은 아시카의 표정에서는 더 이상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코랄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들으셨습니까? 저희 가문에 큰일이 있었다는 걸요.”
“형님께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그리고 제가 소후작이 되었습니다.”
코랄은 조금도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내내 느물거리는 시선이 아시카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당장 떨쳐내고 싶을 만큼 불쾌한 시선이었다.
주변에는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쩐일인지 나일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흥미로운 얼굴로 코랄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자리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코랄의 마차에서 한 사람이 더 내렸다. 여자였다.
“이러다 공연에 늦겠어요, 코랄.”
여자를 발견하고 잔느와 나일의 표정이 묘해졌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몸에 걸친 드레스는 최고급 의상실의 디자인이었고 보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이질적인 것은 여자의 외모였다.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칼, 차분한 느낌마저 아시카와 꼭 닮은 여자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레이디 이그레인.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정말….”
여자도 아시카의 외모가 저와 유사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여자는 코랄을 흘깃 보고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흔치 않은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여자는 거리낌 없는 태도로 인사하면서도 자신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기본 예법조차 모르는 걸 보면 귀족가의 레이디는 아닐 가능성이 컸다.
‘여자 버릇은 여전한가 보네.’
아시카는 밀려드는 불쾌한 감정을 애써 털어냈다. 여자가 아시카를 닮은 것이 아니라 코랄의 취향이 원래 그랬던 것뿐이라고.
예법을 지키지 않는 여자에게 상냥하게 대꾸해줄 마음 따윈 없었다. 아시카는 코랄과 똑같이 뻔뻔하고 무례한 시선으로 저를 훑어내리는 여자를 외면했다.
“오클레인 공자, 사고는 없던 것으로 하죠.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고.”
“공작가의 마차를 훼손했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지요. 마침 목격자도 넘쳐나니까….”
문득 코랄의 시선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건너편 어딘가에서 멈췄다. 그가 주시할만한 어떤 것도 없는 지점에서.
아시카의 시선도 코랄을 따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순간 당황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뻔했다.
‘왜 나오신 거야?’
아트샵 앞에 나와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븐이었다. 언제나처럼 검은 드레스와 검은 베일이 드리워진 모자를 쓰고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븐의 도움을 받아 수도를 떠난 뒤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사이 따로 소식을 전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코랄이 왜?’
코랄이 이븐의 얼굴을 알 리 없었다. 이븐은 샵을 나설 때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샵에 방문하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도 리네였다. 더구나 두 사람은 접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코랄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이븐에게 머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이븐이 자연스럽게 건물을 스쳐 뒤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오클레인 공자.”
초조한 마음에 아시카가 먼저 코랄을 불렀다.
“그쪽 마차가 부딪혀 온 걸 본 사람들이 넘쳐나고 나는 보상을 원치 않아요. 서신을 보낼 필요도 없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잔느.”
“네, 아가씨.”
아시카는 잔느가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마차에 올랐다. 잔느가 뒤따라 올라타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바로 앞이 아트샵인데 안 가십니까?”
“집으로 돌아가자.”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 이븐의 아트샵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고 느껴졌다.
‘역시 낮에 오는 건 피해야겠어.’
나일이 뭐라고 하든 차라리 혼자 오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혼자 거리로 나와도 어디선가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는 걸 안다. 드루쉬아는 결코 아시카를 혼자 두지 않을 터였다.
“나일. 뭐해?”
“아, 네.”
마지막까지 밖에 있던 나일이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코랄은 그제야 나일을 발견했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기사는 아니고, 용병인가?’
가문의 기사들에게 철저히 보호받는 레이디였다. 용병을 가까이 둘리는 없는데, 하는 생각에 빠르게 나일을 훑어내렸다.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나일이 코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를 스쳐 가는 짧은 순간 나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짧게 흘린 웃음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너….”
코랄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나일은 유유히 마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