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96화 (96/153)

#96.

웨이브는 아시카를 부르지 않았다. 또다시 감금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웨이브가 나가려는 걸 알고 그녀가 쫓아가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조부님.”

마차에 올라타려던 웨이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시카는 조금 놀랐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웨이브의 얼굴은 그저 피로해 보일 뿐이었다. 냉기가 빠져 핼쑥해진 얼굴을 보고 가슴 언저리에 싸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죄송해요.”

많은 의미가 담긴 사죄였다.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멋대로 집을 나가버려서 죄송하다는 사죄.

아시카에게 웨이브는 벽 같은 사람이었다. 늘 거기에 있는 차갑고도 견고한 벽. 그래서 한 번도 이해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아이를 잃었을 때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두 번째 부인과 배 속의 아이까지 죽고 끝내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었을 때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지. 어린 손녀에게 마음을 내주기엔 그가 지닌 상처가 너무 크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하나뿐인 유일한 혈육인 아시카를 보았던 걸까.

웨이브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녀를 지켜왔다. 비록 다정한 방법은 아니었을지라도.

웨이브가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아크펠라의 피를 이은 아들을 입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비 잃은 손녀를 일찌감치 결혼시켜 치워버렸다면 가문이 위태로울 일도 없었을 테고.

웨이브는 아시카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그동안 아시카가 깨닫지 못했던 웨이브의 진심이었다.

그녀와 꼭 닮은 검은 눈동자가 가만히 내려다본다. 핼쑥해진 아시카의 얼굴과 파리한 낯빛, 그런데도 전에 없이 위험스럽게 빛나는 새카만 눈동자를.

웨이브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와 마부를 물리고 정원 안쪽으로 걸었다. 아무도 없는 분수 정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시카 역시 말없이 뒤를 따랐다.

“할 말이 있느냐?”

할 말을 묻는 웨이브의 어조가 다시금 벽처럼 느껴졌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완곡한 의지의 표현 같아서 더욱 그러했다.

아시카는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나처럼 웨이브가 밀어내는 대로 떠밀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그 벽을 넘어야만 한다.

“그 결혼, 못하겠어요.”

“허.”

기가 막힌 지 웨이브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지금 그런걸….”

애써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와장창 깨어졌다. 웨이브는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대공령에는 왜 간 거냐.”

아시카는 대공성에서의 이야기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시간문제일 테지만.

“진작부터 한 번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부님께서 반대하셔서 못 갔지만.”

“단지 일 때문이었다?”

결혼문제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간 곳이 하필 대공령이라니. 아시카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아시카.”

처음이었다. 웨이브가 그녀의 의사를 묻는 것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지시했고 아시카는 순종하는 손녀이자 후계자였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시카는 전에 없이 단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탈리온 공작과 기어이 결혼하겠다고?”

“아니요.”

웨이브의 이마가 확 좁아졌다. 처음부터 그 문제로 집을 나간 것이 아니었나, 의문이 어린다.

가을볕이 따가워서인지 아니면 긴장해서인지 아시카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땀이 차오르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쓸며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앞으로 꺼낼 이야기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끝내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 진실을 알려주세요. 답을 찾도록 기회를 주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제게 숨기는 것이 있잖아요.”

무려 40년이나 감춰온 비밀. 그걸 캐묻는데도 웨이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견고함이 그가 동요를 감추는 방법이라는 걸, 아시카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견고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부님께서 뭘 찾고 계시는지 알아요.”

웨이브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그녀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찾고 계셨던 거죠.”

아시카를 마주 보던 눈동자가 커지더니 격하게 흔들렸다.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감정이 주름진 얼굴 위에 퍼져나갔다.

아시카는 확신했다. 그동안 이상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이제야 아귀가 맞는다.

웨이브는 잠시도 수도에 머물지 않았다. 영지조차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끊임없이 어딘가를 돌아다녔다. 제국뿐만 아니라 외국까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는 데도 곳곳을 다녔다.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억측이 심하구나.”

이미 깨어진 평정을 수습하며 쥐어 짜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시카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상상과 다른 현실에 그는 회복 불능의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평생 홀로 유령을 쫓으며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해 직접 부딪히고 판단해야 할 것은 아시카가 아니라 웨이브였다.

“제가 조모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다면요?”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사람처럼 주름진 얼굴이 희게 질렸다. 숨이 멈추고 눈동자가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평생 아시카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이야기였다. 웨이브는 아들 란체에게조차 금기처럼 제 어미에 관한 이야기를 평생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아시카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절대적으로 몰라야 했다. 그런데도 확신에 찬 어조가 재차 못을 박는다.

“알고 계셨죠? 조모님이 살아계신다는 걸. 그래서 지금까지 찾아오신 거잖아요.”

웨이브의 뺨에 경련이 일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전에 없던 열기가 검은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오래도록 좇고 또 좇아도 삭아지지 않던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

“네가….”

떨리는 목소리에서 더는 동요를 감추기 어려웠다. 말을 꺼내는 입술마저 경련을 일으키며 떨려왔다. 그러나 웨이브는 이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죽은 사람을 네가 어찌 알아?”

한차례 충격이 지나가고 웨이브가 택한 것은 회피였다. 아시카는 예상했던 양 차분한 어조로 그를 몰아붙였다.

“아직도 숨기기만 하실 건가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얘기를 꺼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너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제가 입을 열면 안 되는 이유를, 조부님께서 숨겨왔던 이야기들을.”

웨이브의 이마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숨이 찬 듯 어깨가 오르내렸다.

“시간이 지체됐구나.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자.”

충격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서 견고한 벽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희게 질린 웨이브의 얼굴을 보고 아시카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그래 나중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웨이브는 걸음을 옮겼다. 원래 예정했던 대로 다시 마차를 불러 올라타기까지 그의 움직임에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올라탄 뒤에도 마차는 한동안 출발하지 못했다. 멍하니 넋을 놓은 웨이브가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저택으로 들어서는 잔느의 뒤로 미아가 조르륵 따라왔다.

“종일 나만 따라다닐래? 기사서임이 반년도 남지 않았는데 농땡이 피울 정신이 있어?”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제가 훈련 게을리하는 거 보셨어요?”

“그러니까 해왔던 대로 하라고. 나 쫓아다니지 말고.”

잔느가 인상을 벅 쓰자 미아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다시 걸음을 옮기자마자 조르륵 따라온다.

아시카가 부재중이던 내내 잔느는 저택에서 훈련에 몰두했고 미아는 그런 잔느 곁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존경합니다’를 대놓고 외치는데, 민망하고 낯간지러워서 적당히 넘어갔더니 이제는 어지간한 호통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잔느가 다시 획 뒤를 돌아보자 미아는 움찔 멈춰섰다.

“넌 자존심도 없냐? 왜 네 동료들은….”

버럭 하던 말끝이 지나가는 하녀를 보고 쑥 들어갔다.

“하여간 우리가 친하게 지낼 사이는 아니잖냐.”

“안될 건 또 뭐 있어요.”

잔느가 노려보는 시선에 움츠러들면서도 미아는 제 할 말을 뱉었다.

“제발 일관성 있게 굴어라. 왜 이놈 저놈 다 제각각인데?”

부단장 시절에는 저택의 기사들이 툭하면 탈리온의 기사들과 시비가 붙어 단속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데 이제는 잔느를 어미새 마냥 졸졸 따라다니는 탈리온의 예비 기사라니. 그건 그거대로 골치가 아팠다.

“거기… 영지에서 왔다며. 이러고 다니면 나중에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한다, 너.”

“패가 갈려있는 건 사실이지만, 베르트 경께서 보고 들은 게 다는 아니랍니다. 그리고 잘하면 한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악!”

매서운 발길질에 미아가 정강이를 잡고 뛰었다. 의아하게 보던 하녀가 잔느의 눈초리에 흠칫 놀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민첩성 부족, 반응속도 부족. 검이 없어도 기사는 몸이 무기야. 정신 안 차려?”

“베르트 경, 너무해요.”

“이 녀석이 진짜.”

미아의 위치는 애매했다. 이그레인 소속이 아니기에 잔느가 맘껏 굴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시카의 지시로 머무는 아이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미아는 자신이 지닌 이점을 이용해 잔느 옆에 찰싹 붙어 있으려고 했다.

잔느의 타박에 울상이 되었던 미아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아가씨, 외출하세요?”

아시카는 복도를 지나가려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잔느의 시선이 빠르게 아시카의 옷차림을 훑었다.

베이지색 드레스에 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낙엽색의 시스 가운을 덧입고 머리칼은 바짝 올려붙인 뒤 모자를 썼다. 모자에서 내려오는 작은 베일이 얼굴의 반을 가려 특유의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의 조합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단장님께 못 들었습니다만, 가서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아니, 조용히 나갔다 오려고 해.”

아시카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나일이 있었다. 잔느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단장님께서 아가씨의 호위 문제만큼은 양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잔느, 거기까지만 해. 함께 가려거든 따라오고.”

아시카는 잔느의 저항을 차게 잘랐다. 잔느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시카의 주위에 호위들이 넘쳐나는 통에 숨이 막혔다.

나일조차 아시카가 혼자 움직이는 것을 반대했다. 나일은 아시카의 지시로 대공령에 잠시 남아있다 홀로 수도로 돌아왔다. 나중에야 아시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나가는 건 더더욱 안될 말이라고 반대했다. 차라리 사람이 많은 한낮이 더 안전할 거라면서. 그래도 줄줄이 호위를 달고나가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아가씨.”

“수도 한복판이야. 나일과 잔느만으로도 충분해.”

거기다 보이지 않는 호위들까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르쉬아가 보냈을 테지.’

드루쉬아가 아무 말 하지 않았기에 아시카도 조용히 받아들였을 뿐. 그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눈치 보던 미아가 잔느의 등 뒤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저기 저도….”

“꼬맹이는 빠져라.”

미아의 작은 목소리는 나일에 의해 단칼에 저지당했다.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잔느도 더는 고집 피우지 않았다.

“세인트리드 거리로 갈 거야. 조용히 따라와.”

아시카의 지시는 펄번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는 의미였다. 잔느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아시카는 가문의 문장이 없는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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