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아시카가 깨어난 지 불과 하루, 드루쉬아는 더 이상 대화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수도로 떠나겠다는 그녀를 말리지도 못했다. 내내 기다리고 있던 펄번은 안가 밖으로 나온 아시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굴이 반쪽이 되셨잖아!’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핼쑥해진 아시카의 얼굴을 보고 펄번의 시선이 드루쉬아에게 향했다.
‘설마 두 분이 함께 계셨을 줄이야.’
살벌하게 노려보는 시선에도 드루쉬아의 신경은 온통 아시카에게 머물렀다. 혹시 비틀거리지는 않을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아시카가 문밖으로 나온 뒤부터 내내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루쉬아가 내민 손도 외면하고 아시카는 평소와 다름없는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분명 힘들 텐데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참으로 한결같은 여자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나 찾느라 고생했겠네.”
펄번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수족이나 다름없는 쥴마와 잔느를 아시카에게서 떨어뜨려 놓는 바람에 예측 가능한 동선이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수도 전체를 발칵 뒤집다시피 했다.
진짜로 아시카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내내 비협조적이던 쥴마가 나섰다. 그제야 최근 합류한 상단의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만 가지.”
“네, 아가씨.”
아시카는 나붓한 걸음으로 마차로 향했다.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는 한마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야속하다 여기면서도 드루쉬아 역시 말을 아꼈다. 말을 꺼냈다가는 모진 말이 돌아올까 봐 두려웠던 탓이다.
아시카가 마차에 오르기 직전 빠른 발걸음 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등 뒤로 따라붙은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고도 강하게 그녀의 팔을 움켜쥔다.
“아….”
당기지도 못하고 놓아주지도 못하는 손.
아시카는 드루쉬아에게 붙들린 채 마차 앞에 멈춰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지만 드루쉬아는 어떤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서 밀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를.
느리게 다가온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맞물린 입술이 살며시 짓누르며 벌어진 안쪽을 훑었다. 조심스럽게 더듬는 혀끝에서 억눌린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떨어지게 된 여느 연인들처럼 다음을 기약하는 다정한 인사. 드루쉬아가 물러날 때까지 아시카는 가만히 입술을 내주었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멀어진다. 말보다 솔직한 감정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대신 드루쉬아가 내미는 손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시카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돌아서기 직전 까만 눈동자가 습하게 빛나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팽팽하게 긴장해있던 드루쉬아의 마음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모질지도 못하면서 매정한 척하기는.’
유연하게 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단호해지는 여자였다. 지금 강하게 밀어붙였다가는 그를 잘라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장은 보내줘야 한다. 아시카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서 보내주는 거였다. 그녀를 포기해서가 아니라.
‘아시카. 당신이 그걸 알아야 할 텐데.’
그가 절대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드루쉬아가 펄번에게 다가갔다.
“펄번, 내가 말한 것 잊지 마.”
“명심할 테니 걱정마십시오.”
펄번은 말에 오르면서 드루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카를 노리는 상대가 누군지 아직 몰라. 저택 경비를 늘리고 지원이 필요하면 내게 말해. 아니, 차라리 내가 기사들을 보내줄 테니까….”
“워, 공작님 진정하세요. 탈리온의 기사들이 저희 쪽에 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건 충고가 아닌 경고야. 만약 조금이라도 소홀하다고 생각되면 아시카를 납치해서라도 데려올 거야.”
“그런 시도가 안 통하는 분이라는 걸 아실 텐데요?”
“그러니까 지금은 보내주는 거야.”
드루쉬아의 씁쓸한 표정에서 속내가 드러났다. 제 품에 꼭꼭 감춰놓고 있어도 불안할 판에 끝내 보내야 한다니.
펄번은 마차를 에워싼 기사들을 보고 혀를 찼다. 스무 명이 넘어가는 숫자였다. 한 사람의 호위에 탈리온의 기사가 수십이라니. 이대로 전쟁터로 달려가도 될 수준이었다.
“지금 탈리온의 기사들과 함께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적당히 하세요.”
가는 동안 싸움이나 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펄번의 솔직한 속내였다.
펄번의 신호에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살벌한 호위를 받으며 마차가 드루쉬아의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끝내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자리를 지켰다.
“왜 같이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하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시카가 원치 않아.”
그래서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시카는 지금 절박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앓아누워 있던 내내 중얼거린 말들이 전부 헛소리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뭔가 숨기고 있어.’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 어떤 비밀을.
“미하일.”
“네, 각하.”
“이번에 대공령으로 들어간 상단 정보를 알아 와. 소유주가 누군지 확인하고 신원을 조사해. 털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웨이브의 눈을 피해 아시카가 도움을 요청한 상대였다. 가벼운 인연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시카에게 그가 모르는 동선이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서 뭘 하든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드루쉬아는 이제껏 그래왔다. 수도 안에서 그가 모르는 아시카의 동선은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오랜 악연에 대한 감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깨닫고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이런 마음이었던 것을.’
드루쉬아 자신도 모르던 제 마음이었다. 그것도 퍽 오래된.
* * *
“아가씨,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릴게요.”
마릴린이 울먹이는 얼굴을 푹 숙이고 다가왔다.
“아, 그래.”
멍하니 앉아 있던 아시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던 곳이 침대였다는 사실도, 이곳이 자신의 침실이라는 사실도 이제 막 깨달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수도의 저택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호되게 앓은 뒤라서 마차를 타는 것조차 무척 힘겨웠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조부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세요.”
“다른 말씀은 없으시고?”
“네. 일단 목욕 도와드리고 식사를 내올게요.”
“그래, 그래야지.”
아시카는 예전처럼 온순하게 제 몸을 맡겼다. 그게 퍽 다행이라 마릴린은 푸념하고 싶은 마음을 저만치 치워버렸다.
아시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웨이브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가했다. 그러나 저녁이 된 지금까지 그녀를 찾아오거나 부르지는 않았다.
욕실 안에서 옷을 모두 벗었을 때 마릴린이 움찔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에 난 상처 때문이겠지.’
흉터나 티 한 점 없던 귀한 레이디의 몸에 못 보던 흔적이 생겼으니 당연하다. 괜스레 마릴린의 반응에 마음이 쓰였다. 그새 혼자가 익숙해졌는지 시중을 받는 것조차 낯설었다.
“아.”
그동안 왜 혼자를 고집했는지 생각하다 목이 허전하다는 걸 느꼈다.
‘목걸이.’
안가에서 앓아누웠을 때 벗겨놓은 모양이었다.
‘목걸이를 찾으려면 르쉬아를 다시 만나야 하는데.’
순순히 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나….’
차마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서 서둘러 떠나왔다. 드루쉬아와 함께 있으면 모든 걸 팽개치고 기대고만 싶어질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가씨, 물이 다 식습니다.”
혼자만의 상념 속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익숙했던 일상이 지독히 낯설게 느껴졌다. 내내 함께해왔던 사람들마저 낯설어진 것은 자신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릴린, 혼자 있고 싶구나.”
마릴린은 머뭇거리다 조용히 인사하고 욕실을 나갔다.
제 몸을 움직이는데도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제멋대로 팔다리가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씻고 식사를 한 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막상 여백처럼 텅 비어버린 시간이 압박으로 다가왔다.
결국 아시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이제껏 망상이나 환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내용을 차분히 적어 내려갔다.
‘시간의 순서를 따라가지는 않았어.’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대신 일치하는 것은 장소였다. 매번 그 장소에 있을 때 어딘가에 기록된 기억처럼 환각을 경험했다.
“그래 기억. 내가 아니라 어쩌면….”
목걸이에 담긴 기억. 정확히는 보석에 담겨있는 기억일지도 몰랐다.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제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버린 기억.
“아아….”
아시카는 신음을 흘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또다시 생생하게 휘몰아쳤다. 펜을 쥐고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찰나의 순간 폐허가 되어버린 대공성. 커다란 연회홀을 채운 병사와 귀족들 모두를 태워버린 재앙. 그리고….
‘반역이라니 가당치도 않아.’
이제야 알겠다. 선황제는 대공성에서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 뒤에는 황태후가 있었을 테고.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멸문하던 날 황제의 기사단이 찾던 것도 같은 것이었을 터다.
‘신방이라고 불렀어.’
황제는 대공성에서 신방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간 그곳을 말하는 걸지도 몰라.’
가정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출구조차 없던 기묘한 방.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느꼈던 기묘한 기척. 아마도 착각은 아니었으리라.
누구였을까. 아니 무엇이었을까. 황제는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그곳을 찾았던 걸까.
‘저주라고 했지. 황족의 피에 흐르는 저주. 이제껏 소문이라던 얘기가 거짓이 아닌 거야. 선황제는 진짜로 절박해 보였어.’
그날 이후 수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는 선황제의 소문. 황제는 저주를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건국신화에서 말해지는 신의 축복이란 사실 저주였다는 말일까. 대공성을 노렸던 또 다른 이들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일까.
‘지금의 황제일 리는 없어. 그랬다면 대공성을 열라는 명령 한마디면 충분했을 테니까.’
황제는 대공성에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저주를 받았다거나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이 노린 것도 선황제와 같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환각 속에서 황제의 기사단은 드루쉬아에게 ‘열쇠’를 요구했고, 나머지 한쪽은 두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무슨 차이일까. 같은 것을 찾지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일까.
“첫 번째 꿈만 모두 예외야. 왜지? 장소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석이 깨진 것도 아닌… 아!”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에 아시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대 가주에게서 신물을 물려받은 것은 아크펠라만이 아니었다.
“탈리온이 있었어.”
선황제가 빼앗다시피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았다는 탈리온의 신물. 황궁 창고 어디엔가 처박혀 있다고 들었다.
첫 번째 꿈을 꿨던 장소는 황궁이었고, 그때 그녀의 목걸이와 꼭 같은 보석을 보았다. 금세 깨어질 것처럼 온통 균열이 나 있던 보석을.
“진작 물어봤었어야 했는데.”
보석이 박혀있던 작은 초상화. 그것이 탈리온의 물건인지 확인해야 했는데 번번이 잊고 말았다.
“르쉬아….”
이 문제에서 탈리온을 제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운 건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드루쉬아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됐을 때 르쉬아가 엮이면 탈리온까지 위험해져.’
아시카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모두에게 위협이었다. 이그레인에게도 탈리온에게도. 그녀가 안전할 방법은 해외로 도망치거나 대공가의 누명이 벗겨지는 것뿐.
‘방법이 없을까.’
무려 40년 전의 일이었다. 웨이브조차 어린 청년에 불과하던 그때. 선황제가 만들어 놓은 비틀린 과거사를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막연한 답을 좇으며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을 때가.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감히 바랄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