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시카….”
너무 간절히 바라서 환청이 들리는 줄로만 알았다. 계단으로 연결된 복도 쪽, 무너져내린 석재 더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시카.”
환청이 아니었다. 아시카는 번쩍 고개를 들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확인했다.
“르쉬아!”
순간 건너편에서 소리가 뚝 끊겼다.
“나 여기 있어요! 르쉬아!”
끊겼던 소음이 바로 다시 이어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그 속에 섞여 있는 드루쉬아의 목소리.
“아시카, 거기서 기다려!”
“지렛대를 가져와!”
“거기 그쪽은 건드리지 말고!”
갑자기 부산스러워지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덜컹, 쿵, 쿵.
석재 더미를 치우는 요란한 소음과 절걱거리며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까지. 드루쉬아다. 드루쉬아가 기사들과 돌아온 것이다.
아시카는 흔들리는 석재 더미와 네오렌을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는 위험해.’
자리에서 일어나 네오렌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당겼다. 이미 의식을 잃어 커다란 체구는 바윗덩이처럼 무거웠다.
“흐윽, 노공작님. 제발.”
온 힘을 다해 당기고 체중을 실어 반대편으로 끌었다. 네오렌을 끌고 가는 동안 아시카는 깨닫지 못했다. 화살이 박혔었던 어깨가 더는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간신히 움직인 거리가 고작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그 거리만큼 바닥에 길게 늘어진 혈흔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시카는 바로 주저앉아 다시 네오렌의 상처를 압박했다.
“르쉬아, 빨리! 노공작께서 다치셨어요!”
하나둘 떨어져 나가던 석재가 반대편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밝은 횃불의 빛이 쏟아진다. 눈이 아플 만큼 강한 빛인데도 아시카는 눈을 감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수도 없었다.
“아시카!”
가장 먼저 달려오는 커다란 그림자는 드루쉬아였다.
“르쉬아, 노공작께서…. 빨리 상처를.”
목이 콱 메어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아시카를 발견하고 안도하던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의식 없는 네오렌을 확인하고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조부님?”
드루쉬아의 등 뒤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속에는 나일도 있었다. 나일은 아시카를 발견하고 반색했다가 피범벅이 된 모습에 경악했다.
“아가씨!”
“아랫배에 검상을…. 피를 많이 흘렸어요. 상처부터 어떻게 좀 해봐요.”
드루쉬아는 손에 든 횃불을 기사에게 넘기고 네오렌에게 몸을 숙였다.
“들것을 가져와, 당장!”
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가 귀에 익었다. 횃불을 든 이들을 헤치고 다급히 뛰어오는 사람은 애거나이트였다. 그의 시선이 눈물범벅이 된 아시카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의식을 잃은 네오렌에게로 옮겨갔다.
정신없는 와중에 문득 드루쉬아는 지나칠뻔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시카, 부상은….”
그러나 아시카는 네오렌의 상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두 팔로. 부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피에 흠뻑 젖었으나 그것도 그녀의 피는 아니었다.
드루쉬아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이 목격한 일들은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각하, 서둘러야 합니다.”
드루쉬아는 화들짝 놀라 애거나이트를 돌아보았다. 아시카는 무사하다. 그러니 당장 급한 일들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아직 남아 있는 놈들이 많아. 조부님을 모셔가도록 동선을 미리 확보하고 대공성 입구를 봉한다. 남은 놈들은 나중에 처리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살기가 감돌았다. 애거나이트는 어금니를 사리물며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떠나기 전 애거나이트는 네오렌을 돌아보았다. 드루쉬아의 명령보다 네오렌의 곁을 지키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단호하게 발길을 돌렸다.
지진으로 부서져 버린 커다란 창을 통해 푸르른 새벽빛이 연회홀에 쏟아졌다. 점점 환해지는 빛으로 인해 처참한 대공성의 모습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 반쯤 무너져 내린 공간에는 침통한 침묵이 내려앉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 * *
별장 크기의 작은 건물은 숲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산짐승을 막기 위해 설치해놓은 나무 울타리 정도만 있을 뿐, 딱히 견고해 보이지 않는 건물이었다.
그 주위를 에워싼 기사들의 수가 스무 명이 넘었다. 어젯밤 도착해서 호위에 합류한 수도의 기사들은 살벌한 분위기에 이유도 묻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겁니까?”
“함구령이 떨어졌다잖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혼나지 말고 순찰이나 돌아.”
“조금 전에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또요?”
가장 어린 기사인 도리안이 불퉁하게 말을 뱉었다. 작은 건물이라 살필만한 것도 없고 주변은 온통 숲이었다.
‘할 게 없어서 토끼사냥이라도 해야 할 판이고만.’
나가봐야 숲뿐이라 경계할 대상도 산짐승뿐인 외딴 터였다. 건물 옆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기사들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조용히 다가왔다.
“뭐 하는 거냐.”
“헉, 단장님.”
소리 없이 다가온 사람은 애거나이트였다. 어젯밤도 거의 새다시피 했는지 잠기운 하나 없는 얼굴이 까칠하다. 부하들을 훑어보는 시선은 더더욱 매서웠다.
“왜 여기들 모여있어? 각자 자리 안 지켜?”
“죄송합니다!”
바로 대답한 동료와 달리 도리안이 머뭇거렸다. 애거나이트의 살벌한 표정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저기, 근데요 단장님.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뭘 경계해야 할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눈치를 보면서도 도리안은 어제부터 꾹 참아왔던 궁금증을 쏟아냈다.
놀란 동료가 도리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렇지않아도 성질이 불같은 애거나이트였다.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그는 차분히 대꾸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필요 없지만, 위협이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 모를 침입자에 대비해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마라.”
도리안은 질문을 더 하려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불과 한 달여 만에 다시 마주한 얼굴은 핼쑥한 것이 많이 상해있었다.
“교대는 앞으로 두 시간 뒤다.”
“네,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을 뒤로하고 애거나이트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수도행을 원치 않았다. 부상당한 네오렌의 곁에 남고자 했었다. 그러나 주둔지에서 비밀리에 치료받던 네오렌은 애거나이트에게 수도로 갈 것을 명했다. 정확히는 드루쉬아의 곁을 지켜달라는 부탁에 가까운 지시였다.
드루쉬아와 아시카 둘 중 누가 표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르고. 네오렌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사가 손자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드루쉬아의 곁을 지켜라. 그놈 옆에 있으면 아마도 네 의문에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고집 피우려던 마음은 그 말에 힘을 잃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위기감.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레이디 이그레인의 호위를 하게 될 줄이야. 애거나이트가 복잡해진 마음을 애써 누르는 동안 숲길 너머에서 돌연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외부인이다! 전원 경계를 유지하라!”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대공성에서부터 내내 긴장해있던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소리를 듣고 창고 건물에서 쉬던 기사들도 뛰쳐나왔다.
빠르게 가까워진 상대는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한 기사가 다섯 명. 가문의 문장을 정복에 새긴 이들이 애거나이트 앞에서 급하게 말을 멈췄다.
“더 이상은 못 들어갑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뻔히 문장이 보이는데도 애거나이트는 매섭게 소리쳤다.
말을 멈춘 상대가 애거나이트보다 안가 주위를 먼저 살폈다. 살벌한 수준의 경계에 놀란 얼굴이었다.
“이그레인 수도 저택의 기사단장 펄번 콜테른입니다.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애거나이트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대공령에서 출발한 것이 나흘 전이다. 그런데 언제 소식이 들어갔는지 이그레인의 발 빠른 대처가 놀라울 정도였다.
“그 문제에 대답할 권한이 없습니다.”
“아가씨가 여기 계신 걸 압니다. 만나게 해주십시오.”
“대답할 권한이 없다 했습니다.”
애거나이트의 무뚝뚝한 대답에 펄번이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말에서 내리며 다시 한번 정중하게 요구했다.
“그럼 탈리온 공작님과 얘기하겠습니다. 공작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각하께서도 바쁘십니다.”
펄번이 미간을 찡그리며 애거나이트를 보았다. 뭐 이런 답답한 인간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바쁘시단 말입니까? 여기서?”
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평화롭다. 저택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음이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펄번이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한번 채근했다.
“장작이라도 패고 계시는 건 아닐 테고, 아가씨 곁을 지키느라 바쁘신 겁니까?”
반쯤은 농담이었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그레인의 기사단장께선 예의도 모르시나!”
“워, 진정하십시오.”
펄번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탈리온 영지에만 머물던 기사단장이 왔다길래 궁금하던 참이었다. 수도에 오자마자 이그레인 기사들과 패싸움을 벌였다더니 과연 불같은 성미를 지닌 사내였다.
“시비 걸려고 온 게 아니라면 그 입 닫지 그래?”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향했다.
헐렁한 셔츠에 구겨진 바지와 파리한 낯빛. 어젯밤과 다르지 않은 차림의 드루쉬아가 건물 현관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펄번을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분단장… 아니, 공작님. 그러게 진작 좀 나와주시지 그랬습니까?”
적대적인 시선 속에서 드루쉬아를 발견하고 펄번이 반색했다. 그 모습에 애거나이트가 눈을 부릅뜨자 드루쉬아가 손짓했다.
“검은 넣어 둬.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고.”
드루쉬아의 지시에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왔던 기사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애거나이트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이그레인의 기사단장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러니까 눈에서 힘 좀 빼.”
따지고 보면 영지에서만 머물던 애거나이트보다 같은 파병지에서 근무했던 펄번과 더 많이 부대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이야기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펄번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가씨께서 여기 계신 걸 압니다. 이그레인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 맘대로? 돌아가.”
들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단호한 거절에 펄번의 낯빛이 굳어졌다.
“아가씨께서 이런 식으로 나와 계시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이그레인 공작님과의 문제도 아가씨께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 탈리온 공작님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드루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가출한 아가씨를 찾아 나온 기사단장의 얼굴에는 걱정이 그득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드루쉬아가 추적한 정보를 웨이브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도 아시카가 대공령에 간 것까지는 알 것이다. 하지만 대공성에서 벌어진 일은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져 모를 가능성이 컸다.
‘비밀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를 뵙겠습니다. 공작님께서 막을 일이 아닙니다.”
“안된다면 안되는 거야. 돌아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펄번의 말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살벌하게 쏟아지는 기세에 펄번과 동행한 기사들이 흠칫했다.
“그래? 무력을 동원한다고? 그럼 어디 나를 치고 가보던지.”
“공작님!”
당장 목을 물어뜯으려는 맹수처럼 드루쉬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극단적으로 돌변하는 태도에 펄번은 당황스러웠다.
“이그레인 공작님의 뜻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아시카의 의사에 반하는 일은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아.”
“아가씨의 의사가 어떤지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만나게 해주십시오.”
펄번은 간곡히 부탁했다. 애당초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사납게 으르렁대던 드루쉬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파.”
“네?”
드루쉬아는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시카가 아프다고. 그래서 지금은 안돼.”
놀랐는지 펄번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래서 드루쉬아가 이렇게 날이 서 있는 건가 싶었다.
“건강하신 분인데 어쩌다가….”
아시카가 집을 나간 지 무려 한 달 가까이 되었다. 그간 밖에서의 생활이 몹시 고되었나보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장은 만날 수 없으니까 그리 알아.”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펄번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픈 아가씨를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를 뵐 때까지 여기 머물겠습니다.”
“하.”
펄번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드루쉬아와의 관계가 어찌 됐든 그는 이그레인의 기사단장이었다. 명령을 받았으니 따라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애거나이트가 알아서 먹이고 재워줘.”
“이그레인의 기사들을요?”
애거나이트가 기막힌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드루쉬아에게는 당황스러운 부하의 사정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 간다잖아.”
“그거야 저쪽 사정이고….”
“저, 공작님!”
현관문이 열리면서 하녀가 다급히 달려 나왔다. 낯선 기사들을 보고 놀랐는지 중간에 멈춰선 채 드루쉬아를 불렀다.
“공작님. 아가씨께서….”
“날 찾아?”
“네. 들어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드루쉬아의 얼굴이 희게 질리더니 하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니. 공작님, 그렇게 가시면….”
이그레인의 기사들은 드루쉬아의 머릿속에서 이미 사라졌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펄번의 시선이 애거나이트에게 향했다.
“공작님 지시 들으셨지요? 저희도 당분간 여기 머물겠습니다. 어디에 짐을 풀면 됩니까?”
펄번의 당당한 요구에 애거나이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