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아가씨, 정신 차려요!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냐!”
“나일?”
연회홀 입구에서 나일과 기사들이 자객들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연이어 날아드는 화살이 기사의 가슴팍에 꽂혔을 때 나일은 입구를 박차고 나가 상대의 목을 잘라냈다.
“레이디 이그레인, 여기서 나가야 해.”
네오렌이 검을 틀어쥐며 아시카를 채근했다.
“…네, 가요. 따라갈게요.”
어릿한 정신이지만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드루쉬아가 저를 찾고 있다. 그 사실 하나가 그녀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아시카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네오렌이 계단을 올랐다.
대공성이 울부짖는다. 오래도록 침묵했던 공간이 억눌린 분노를 토해내는 것처럼 성벽을 뒤흔들며 포효했다.
대공성 전체에 흩어졌던 자객들이 출구를 찾아 다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저기, 저쪽이다!”
“제길, 아직도 살아있잖아. 여태껏 뭐 한 거야!”
성을 빠져나가려던 이들이 나일과 기사들을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복도를 나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검을 든 자객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성이 무너지려고 한다!”
견고한 성채의 벽이 쩍쩍 갈라졌다. 전투가 중단되고 천장 일부가 무너지며 조각난 석재들이 자객들의 머리 위를 강타했다.
“아아악!”
“나일!”
앞서 나가 있던 나일과 기사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흙먼지가 일고 시야를 가렸다. 네오렌이 검을 거두고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이그레인, 반대편 통로를 찾아!”
아직도 부족한지 대공성은 포효를 멈추지 않았다. 매캐한 먼지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휩쓸려갔다.
켜켜이 쌓인 석재 더미 앞, 절반이 뚝 잘려버린 복도에서 먼지 바람이 사라지고 창백한 은회색의 검날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안돼요!”
바닥의 진동과 함께 네오렌의 몸이 휘청였다. 그 찰나의 순간 무자비한 검이 네오렌의 몸을 관통하는 것이 보였다.
“큭.”
“으악!”
반사적으로 네오렌의 검이 상대의 심장으로 향했다. 무시무시한 힘이 상대를 꿰뚫고 피가 솟구친다. 아시카는 방향을 바꿔 네오렌에게 달려갔다.
“이런, 오지 마….”
서로의 몸통에 검을 박아 넣은 두 사람이 천천히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네오렌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자객에게서 검을 거두고 다시 한번 목을 베었다.
끅, 하는 마지막 숨소리를 남기며 적이 축 늘어졌다. 동시에 네오렌의 몸을 관통한 검도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거구의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간신히 한 손을 짚어 몸을 지탱했지만 솟구치는 피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허, 이런 부상은… 오랜만일세.”
“노공작님, 어, 어떻게….”
바닥에 흥건하게 고이는 피를 보는 순간 아시카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떻게 해.”
그대로 주저앉은 채 무릎과 손으로 기어 네오렌에게 다가갔다. 아직 채 식지 않은 피가 질척하게 다리를 적셨다. 벌벌 떨리는 손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이리저리 배회한다.
“첫인상부터 고약하게 됐어. 너무 겁먹지 말게. 전쟁터에서는 흔한 일이야.”
네오렌은 구멍 뚫린 아랫배에 손을 얹으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왔던 길을 기억하지? 그곳으로 나가. 놈들이 모르는 길이니까 혼자서도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걸세.”
아시카는 입술을 질끈 말아 물며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었다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라도 네오렌의 몸에서 쏟아지는 피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이렇게 피를 흘렸다간 오래지 않아 숨이 끊어질 것이다.
‘그래, 피. 지혈.’
아시카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품속에서 꺼낸 작은 칼로 북북 찢었다. 최대한 길게 자른 천을 다시 하나로 엮었다.
“…어서 나가라니까.”
“말씀은 나중에. 지금은 가만히 계세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급히 만든 붕대를 들고 네오렌의 얼굴을 보고 망설이기를 잠시. 피범벅이 된 손으로 네오렌의 허리를 안듯이 둘러 단단히 감기 시작했다.
“윽.”
“아파도 참으세요.”
아시카는 망설임 없이 손을 놀렸다.
네오렌의 체구에 반밖에 되지 않을 손녀딸 같은 여자였다. 여려 보이던 여자의 손속이 야무져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허허, 웃음을 흘렸다.
“누우셔야 해요. 이대로는 상처를 압박할 수가 없어요.”
“맹랑한 레이디야. 전쟁터의 군의관도 나더러 누우라고는 못 하거든? 이제 충분하니까 레이디 이그레인은 그만 나가시게.”
푸념 섞인 핀잔에 아시카는 대답 대신 네오렌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버틸 힘이 없었는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바닥으로 몸이 기울었다.
아시카는 남은 망토 조각을 두껍게 겹치고 상처 부위에 얹어 눌렀다.
“겁도 많은 레이디가 어찌 도망갈 생각을 안 해?”
“…가족이잖아요.”
“뭐?”
“르쉬아를 혼자 남겨두지 마세요.”
사고로 정정했던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고 드루쉬아 홀로 살아남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가족은 네오렌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유일한 가족까지 잃고 홀로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네오렌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작고 하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르쉬아…, 내 손자의 애칭인가?”
아시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루쉬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에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까만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며 곱게 휘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서 네오렌은 퍽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영지로 돌아오라는 서신을 보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대공령으로 간다기에 직접 주둔지를 찾았다가 아시카와 함께 대공성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서 따라왔더니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설마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된 건가.’
네오렌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아시카를 살펴보았다.
14년 전 추도식장에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던 소녀는 장성한 여인이 되어 손자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잘 자랐구나.”
아시카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네오렌을 내려다보았다.
“웨이브나 나나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았어.”
드루쉬아가 승냥이 떼 같은 외가 혈족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 여덟 살 어린 소녀는 고고하고 높은 곳에 홀로 버려졌을 터였다.
“레이디는 내 손자를 어찌 생각하나?”
새카만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설마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난감한 마음에 시선을 피했다. 아시카는 네오렌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황궁에서나 몇 번 마주쳤을까. 네오렌은 드루쉬아를 수도에 보낸 뒤부터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그 아이를 방치해 두었어. 지금도 가장 후회하는 일이지.”
네오렌도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던 시기였다. 장성한 아들과 딸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다. 아내조차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홀로 남은 어린 손자의 마음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전쟁터를 떠돌았고 그가 없는 빈자리를 외가의 혈족들이 차지했다. 탈리온은 손이 귀해 방계가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어린 소년을 휘둘러 탈리온을 손에 넣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홀로 남은 드루쉬아는 자신의 처지를 빠르게 깨달았다.
제 자리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철두철미하게 따지고 경계하며 자라왔다. 계산적인 그의 성격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터득한 생존 방법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손자의 모습이 예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언제나 차갑고 이성적이던 드루쉬아였다. 네오렌에게도 냉랭하기 짝이 없던 그가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쩌면 너희 둘이 퍽 잘 어울릴 것도 같구나.”
통증이 심할 텐데도 네오렌의 표정은 담담했다. 예상치 못한 호의적인 태도에 아시카가 입을 열었다.
“저희 조부님을 미워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고집불통 노인네가 그리 말해?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쿨럭.”
“말씀 그만 하세요.”
상처를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오렌의 표정이 평온해서 그가 중상자라는 걸 잊을 뻔했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어찌해. 내 손자가 혼자 남으면?”
“안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르쉬아를… 지금보다 더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눈물 그렁그렁한 까만 눈동자가 맑고 또렷하다. 죽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 속에 숨길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레이디가 가족이 되어주면 되잖아. 내 손자가 청혼서를 보냈다지?”
“그럴 수 없어요.”
단호한 거절에도 네오렌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아시카를 바라볼 뿐.
“무언가 알고 온 게지?”
아시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 비밀을 누군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터다.
‘그렇게 큰 비밀을 여태껏 모른 척 해왔다고?’
무려 40년이라는 긴긴 시간, 이그레인과 탈리온 사이에 벌어진 비극과 드러나지 않았던 분쟁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비밀을 네오렌이 알고도 내버려 두었을까.
시야가 흐릿해지는데도 네오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디가 숨기는 것이 무엇이든 드루쉬아에게 말하게. 융통성이 없는 놈은 아니니까.”
이건 융통성을 발휘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아시카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는 노공작님께선 뭘 알고 계신가요?”
“레이디의 고집불통 할애비가 알고 보니 최고의 사고뭉치였다는 거? 크큭, 윽.”
“나중에 얘기해요. 나중에.”
궁금하다. 더 알고 싶었다. 어쩌면 웨이브가 말해주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를 네오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은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신을 놓지 마세요.”
네오렌의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것을 보고 아시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고집불통이… 어찌할지 궁금해.”
수십 년 동안 알고도 모른 척해온 진실. 서로가 외면하는 동안 켜켜이 쌓여온 문제가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다.
“노공작님, 제발!”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순하게 생긴 검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이 예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 노인네도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손자가 데려가겠다면 펄펄 날뛰겠지.’
퍽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네오렌은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진동이 다시 지면을 타고 흘렀다. 이번에는 텅 비어있는 허공조차 함께 진동하며 울부짖는 느낌이었다.
쿵, 쿠궁.
이미 균열이 생긴 벽이 약한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또 무너져 내린다. 아시카는 제 몸으로 네오렌의 머리를 감싸 가렸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 다시는 드루쉬아를 만나지 못할지도.
차라리 말을 할걸. 솔직하게 고백하고 도움을 청할걸.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당신이 너무 좋아서 모든 걸 내 던지고 함께하고 싶었다고 말해줄걸.
무수히 많은 후회들이 아픈 심장을 할퀴어댔다. 이 순간 가장 그립고도 아픈 한 사람이 가슴속에 가득 차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