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기사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여자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제 옷에 걸친 것이 반라에 가까운 침의뿐이라는 것도, 신발조차 신지 못한 채 끌려 나왔다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도망친 사람은 없을까.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눈치 빠르게 성을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없을까.
그러나 복도 곳곳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기사의 손에 끌려 나온 가신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거친 기사의 손에 끌려 연회홀에 들어섰다.
“폐하, 대공녀를 찾았습니다.”
폐하? 어느 폐하를 말함인가. 오랜만에 대공성을 찾은 그녀의 여동생이자 지엄한 국모가 된 일레르나를 말함인가. 아니면….
연회홀 안쪽에서 그녀를 돌아보는 상대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황제 폐하!”
“오랜만이구나, 이비스. 나의 전 약혼녀.”
비릿한 웃음을 짓는 사내는 분명 그녀가 알던 얼굴이었다.
이비스가 열다섯이 되던 해 약혼했으나, 결혼을 앞둔 열여덟 살에 불임을 이유로 그녀를 내친 황태자. 대신 그녀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불과 반년 만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남자. 그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이었다.
“무고하다, 나는 무고해.”힘을 잃어버린 목소리가 애통하게 소리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황제 앞에 팽개치듯 쓰러져 있는 아크펠라 대공이었다.
“아버지!”
이비스가 달려가려고 하자 황실 기사가 매섭게 어깨를 잡아챘다.
“악!”
“놓아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무도한 짓을 벌여!”
딸이 거칠게 다뤄지는 것을 보고 대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퍽, 하고 황제의 발이 대공의 가슴을 후려쳤다.
“컥!”
“이게 문제야. 감히? 제국의 황제 앞에서 감히라는 말을 써?”
쇠약해진 대공의 몸은 창창한 청년 황제의 발길질에 맥없이 쓰러졌다. 이비스는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제 아비는 아픈 사람입니다. 길거리의 무뢰배도 환자에게 이리 가혹하게 굴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국의 황제에게 길거리의 무뢰배보다 천박하다고 대거리하는 건가?”
황제의 눈이 차게 빛났다.
“황후가 무척 괴로워하면서 고백하더군. 제 아비가 그간 저질러온 반역의 증거를, 이 나라의 모후가 된 지금은 묵과할 수 없노라고.”
이비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동생이 어째서 그런 엄청난 소릴 했을까.
“일레르나가? 어째서….”
믿을 수 없었다. 제 아비는 몸이 약해서 정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반역이라니.
“거짓 고발입니다! 어찌 그런 말을 믿으십니까!”
“증거가 있습니다.”
이비스의 발악 같은 외침에 대답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기사들처럼 갑옷을 갖춰 입었지만 기사가 아닌 남자. 검을 차고 있지만 제 검에는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남자가, 황제의 옆에서 한발 앞으로 나섰다.
“수년에 걸쳐 대공성에서 해외로 자금이 흘러나갔고 국경지대에서 외국의 병사들을 끌어와 양성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명백합니다. 대공녀께선 진정 모르셨습니까?”
단조롭게 이어지는 설명에 이비스는 말을 잃었다.
저 남자가 지금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진한 금발에 뱀처럼 소름 끼치는 청록색의 눈동자.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몸서리쳐질 만큼 징그러웠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다. 온몸을 샅샅이 훑어내리는 탐욕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던 걸 기억한다.
“그럴 리가….”
아니라고 부정하려던 이비스의 시선에 비릿하게 웃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머리를 후려치는 깨달음.
‘누명이구나. 거짓 증거와 증인을 만들어 이 사달을 일으킨 거야.’
황제가 작정하고 뒤집어씌운 누명이었다. 어떻게 해도 대공가는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왜?’
그동안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고자 혼맥을 제안했던 것은 황실이었다.
“그대의 핏줄 하나라도 살리고 싶다면 헛된 욕심은 버리는 게 좋아. 그러니 대공.”
황제는 옆의 기사에게 손을 내밀어 검을 건네받았다. 날카로운 검으로 대공의 어깨를 툭툭 친다.
“신방은 어디 있나.”
참담하게 주저앉아 있던 대공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제야 뭔가 알아차린 듯 커진 눈동자가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환자의 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쨍한 청보라빛 눈동자였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신방으로 안내하라니까. 너희 아크펠라가 꼭꼭 숨겨둔 비밀 말이다.”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소하는 듯도 하고 희열에 찬 듯도 한 기괴한 웃음이었다.
“하, 하하. 네놈도 피해 가지 못했구나. 그래, 그래서였어. 이 사달을 일으킨 게.”
“대공, 정신이 나간 게요!”
황실 기사단장이 버럭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대공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 재꼈다.
“대대손손 이어진 저주를 어찌하랴. 저주에 저주가 더해질 거다. 네 놈은 끝끝내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컥!”
“아버지!”
황제의 성난 발길질이 또 한 번 날아들었다. 대공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황제는 검을 고쳐 쥐며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끌고 와.”
이비스는 기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 황제 앞에 던져졌다. 황제는 사나운 시선으로 대공을 노려보았다.
“신방이 어디 있는지 말해. 그대들이 숨겨둔 신을 깨워. 그렇지 않으면 아크펠라의 혈통은 내 손에서 씨가 마르게 될 거다.”
“대체 네 아비는 너를 어찌 가르친 게냐. 아직도 모르겠느냐?”
“방법 따윈 알 필요도 없다. 대공성을 지키는 것이 대공이니 열기만 하면 돼.”
“그걸 열 수가 없다고, 이 아둔한 황제야. 넌 전설의 글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야.”
대공의 비웃음에 황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래 봤자 네놈들은 이제 반역도일 뿐이다. 그러니 내게 자비를 구걸하란 말이다!”
“아악!”
황제의 검이 이비스의 어깨를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안돼! 하지 마!”
대공이 이비스에게 달려가려고 하자 기사들이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러니까 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저주받을 콘틸리아! 그 병은 결코 희석되지 않아. 너희의 피가 말라비틀어져 이 땅에서 사라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라고!”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황제의 눈에서 불이 번뜩이며 분노한 검이 다시 이비스에게 날아들었다.
“폐하!”
내내 이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사내가 경악했다.
그러나 검은 이비스에게 닿지 않았다. 대공은 죽을힘을 다해 저를 잡고 있던 기사들을 밀쳐냈다. 이비스에게 날아들던 검은 앞을 가로막은 대공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버지!”
황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쳐 간 것도 잠시뿐. 그는 손에 쥔 검을 비틀어 더 깊숙이 박아넣었다.
대공은 제 가슴을 관통한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달싹이던 입술이 벌어졌다.
“…신께서… 나누어주신 축복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신께서 어여삐 여기던 이에게 열쇠를… 열쇠를 주어라.”
건국신화에서 삭제되어버린 문구가 흘러나왔다. 쿨럭, 피를 토해내는 입술이 힘겹게 말을 잇는다.
“크큭… 콘틸리아가 나눠 받지 못한… 비밀이 있지…. 그건 말이야….”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동안에도 대공의 시선은 황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피와 함께 달싹이던 입술이 작게 속삭였다.
“…….”
숨이 잦아드는 가냘픈 속삭임. 아크펠라 대공은 들리지 않는 언어를 토해내며 웃었다. 흐, 흐, 마지막 숨처럼 기괴한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청보라빛 눈동자에서 빛이 꺼지고 대공의 마른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이런 미친….”
잠시 얼어붙어 있던 황제가 검을 당겨 뽑았다. 털퍽, 대공의 몸뚱이가 바닥에 미끄러지고 피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이비스의 몸도 아비의 피로 젖어갔다.
“흐으, 윽….”
충격으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던 그때. 우르릉 얕은 진동이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뭐….”
재앙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 어떤 격렬한 조짐도 없이 홀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커헉.”
그조차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소리조차 잡아먹은 재앙이 연회홀을 휩쓸었다.
이비스의 망막에 맺히는 기괴한 형상. 사람들의 형체가 산채로 우그러들었다. 놀라 부릅뜬 두 눈, 벌어진 입술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다 타버린 장작개비처럼 말라붙었다.
새카만 그을음이 일어나 연기처럼 흩어졌다. 홀에 있던 사람들이 불에 탄 것처럼 순식간에 연소되어 버렸다. 입고 있던 옷이나 장신구 하나 남지 않고 타버린 자리에는 짙은 검갈색의 덩어리만이 남았다.
기괴한 형상이었다. 고통스럽게 비틀린 몸과 허공으로 뻗은 팔, 비명을 지르기 위해 벌어진 입술. 단죄를 빙자한 침입자들과 강제로 끌려온 귀족들까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렸다.
그 끔찍한 재앙 한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쥐죽은 듯이 고요하게 침묵하는 대공성. 모두가 연소 되어버렸다고 생각한 그곳에서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황제다. 황제가 살아있다.
이비스는 얼어붙은 팔다리를 당겨 몸을 일으켰다.
살아남은 것은 황제만이 아니었다. 탐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까지도. 저주받은 핏줄만이 지옥 같은 현장에서 재앙을 피해 살아남았다.
저들이 깨어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였다. 이비스는 달렸다. 연회홀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섰을 때 입구를 지키던 병사의 시신이 말라붙은 것이 보였다.
놀라 뒷걸음질 치는데 그녀의 몸에 뭔가가 부딪혀 파삭, 하고 부스러졌다.
“헉.”
한때는 사람이었을 형체가 다 타버린 재처럼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우욱.”
토악질이 나온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희미한 달빛이 기괴한 형상으로 굳어버린 시신들 위에 고였다. 창밖에 보이는 그믐달이 재앙을 노려보는 시선처럼 그녀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이비스는 어두운 복도를 내달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정신없이 발을 놀렸다. 다급한 발걸음에 부딪혀 바싹 마른 시신들이 연신 바스러졌다.
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른 채 기억이 토막토막 잘려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딘지 모를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푸르른 여명에 시린 달빛이 물러가고 동이 터 온다.
“아악!”
어딘가에 채인 다리가 맥없이 꺾였다. 철퍽, 차가운 물웅덩이에 몸이 미끄러졌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이 차올라 온몸이 들썩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지만 몸을 일으킬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밝아오는 태양 빛이 그녀의 머리 위를 비추고 투명하게 고여있는 물웅덩이 위로 내려앉았다. 그 속에 있는 여자의 얼굴은 산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것이 제 얼굴인가.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만 기억과는 전혀 다른 색을 지닌 여자가 거기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납빛 얼굴과 헝클어져 엉망이 되어버린 순백의 머리칼.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선명한 청보라빛 눈동자가 수면에 드리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냐, 그럴 리가….”
꿈을 꾼 거야. 악몽을 꾼 걸 거야.
제가 본 것이 현실일 리 없다는 강력한 부정. 그러나 엉망이 되어버린 제 모습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참담한 현실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숲이 흔들리고 환영처럼 사람의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마저 망연하게 느껴졌다.
“이비스.”
상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절박하게 그녀의 이름을 토해냈다. 땀을 뚝뚝 흘리며 안도하는 어린 청년의 모습이 낯익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과 순하게 느껴지는 검은 눈망울, 아직 앳된 태가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이비스는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이그레인 공자.”
망연한 부름에 청년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긴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 * *
눈앞에서 빛이 점멸했다. 숨 막히도록 어두운 공간인데도 그녀의 망막에 맺힌 빛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이그레인….”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매캐한 먼지가 날아들었다. 그것이 소름 끼치도록 거부감이 들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레이디 이그레인!”
“아악!”
시야가 트이기도 전에 놀란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녀를 잡으려던 손이 당황한 채 허공에서 멈추고, 겁에 질린 새카만 눈동자가 요동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야, 내가 왜 여기 있어!”
분명 탈출했는데 그녀는 또다시 재앙이 몰아친 연회홀 한가운데 돌아와 있었다. 거기다 더해 우르릉거리는 진동이 쉴새 없이 바닥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정신 차리게.”
레이디 이그레인. 그 분명한 호칭이 뇌리에 날아들었다.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더듬었다. 호수가에서 본 얼굴은 분명 다른 이의 것이었기에 혼란스러워졌다. 다른 색의 머리칼, 다른 색의 눈동자였지만 분명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븐…?.’
자신의 것이 아닌 모습과,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들. 어째서 이븐이 거기에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한시가 급해, 레이디 이그레인.”
재차 채근하는 목소리는 귀에 설지만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시카의 시선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는 초로의 기사에게로 향했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깊은 주름이 파인 얼굴이지만 단단한 이목구비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누구….”
“내 손자가 눈이 벌게져서 그대를 찾고 있어. 레이디 이그레인, 시간이 없네.”
손자? 누구의?
느리게 깜박이던 검은 눈동자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생기를 되찾았다. 눈앞의 상대보다 훨씬 젊은, 그러나 꼭 닮은꼴의 남자가 생각났다.
“드루쉬아….”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켜있던, 제 것이 아닌 기억과 눈앞에 보이는 생생한 현실. 그리고 애타게 그녀를 찾는 남자의 얼굴이.
“그래, 나는 그 녀석이 애가 타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 레이디 이그레인, 혼자 일어날 수 있겠나?”
커다란 체구에 무시무시한 검을 들고 있으면서도 네오렌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러나 인사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몸을 뒤흔드는 진동이 반쯤 넋이 나간 아시카를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