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드루쉬아는 단숨에 연회홀이 있는 아래로 내달렸다.
“아시카!”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시카가 화살을 맞는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새카만 머리칼이 허공에 흐트러지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런데 어디에도 아시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자객들이 그를 쫓아 달려들었다.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드루쉬아는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폈다. 아시카가 있어야 할 위치는 높다란 난간 바로 아래, 바닥에 둥근 형태의 그림이 있는 자리였다.
챙, 챙강.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연달아 검이 날아드는데도 주변을 살피느라 간신히 받아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시카, 어디 있어! 대답해!”
화살을 맞은 채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머리부터 떨어지는 모습을. 분명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대답은커녕 살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설마 하는 가정만으로도 시야가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저주받았다고 소문난 대공성. 선황제의 비밀이 숨어있다고 전해지는 이곳. 이런 재수 없는 곳에 아시카를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으아아아!”
“으헉!”
방향을 잃은 분노를 무자비하게 휘둘러댔다. 상대는 드루쉬아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무기를 손에서 떨구는 순간 드루쉬아의 검이 사정없이 몸통을 갈랐다.
“물러나! 화살을 날려!”
동료들이 연달아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고 자객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대신 파괴적인 위력의 석궁이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누구야! 사주한 게 누구냐고!”
핏발선 시선이 날아드는 화살을 잡아내고 검으로 튕겨냈다. 드루쉬아는 단숨에 몸을 날려 석궁을 장전하던 자객의 목을 잘랐다.
“지원, 지원 불러!”
뒤쪽에서 지휘하던 놈이 계단을 오르며 소리쳤다.
혼자라고 얕보고 달려들었던 것이 실책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국경의 분쟁지를 떠나 수도에서 머문다는 말을 듣고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제국의 검이자 방패인 탈리온을 이끄는 공작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다섯 개의 기사단을 이끄는 주인. 그런 그가 눈이 벌게져서 보이는 족족 자객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던 자객은 입구를 통과하지 못했다.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동료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무장한 상대는 단숨에 검을 날려 도망치던 자객의 심장을 갈랐다.
“으아악!”
피를 뒤집어쓴 채 흉흉하게 계단을 오르던 드루쉬아가 안으로 들어서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드루쉬아!”
순간, 드루쉬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조부님.”
“무슨 일이냐. 왜 대공성의 병력이 주둔지를 이탈했어?”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은 시신이 되어 곳곳에서 나뒹굴었다. 침입자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말이었다.
드루쉬아도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대공성을 지키던 병력이 사라졌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가자. 일단 이곳을 나간 뒤에….”
“나갈 수 없어요. 아시카가… 사라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일이었다. 드루쉬아의 핼쑥해진 얼굴을 보고 나일의 표정도 차게 굳었다.
“길을 잃어버린 건가요? 어디서?”
“제기랄! 내 눈앞에서….”
멀쩡하게 서 있는데도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드루쉬아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아시카부터 찾아야 합니다. 여기 연회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드루쉬아를 지켜보던 네오렌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디서 사라졌느냐.”
“난간에서 아래로 떨어졌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나일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뭔가 이상한 대화였는데 반쯤 정신이 나간 드루쉬아는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오렌은 기사들에게 입구를 방어하라고 지시한 뒤 드루쉬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난간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로 아래에 커다란 원형의 그림이 있는 곳. 짙은 검갈색의 부산물들이 켜켜이 쌓여있어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네오렌은 중앙의 그림이나 괴이하게 쌓여있는 부산물들을 밟지 않으며 조심스레 접근했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탄식처럼 흘러나온다.
“…여기였구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한마디였다. 네오렌은 고개를 들어 웅장한 폐허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조부님. 제가 알지 못하는 비밀통로가 더 있습니까? 아시카를 찾을 수 있는 겁니까?”
“드루쉬아.”
그와 꼭 닮은 푸른 눈동자가 절박하게 네오렌을 바라보았다.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핏발선 눈동자에서 느껴진다.
“우리보다 앞서서 족히 수십 명도 넘는 무장한 놈들이 대공성에 난입하는 것을 보았다. 당장은 철수한 병력을 데려오는 것이 더 급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시카를 찾아야 합니다.”
“괜찮을 거다.”
“화살을 맞았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습니까!”
드루쉬아에게는 목전에 닥친 위협보다 아시카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네오렌의 설득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대공성이 그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버럭 내지른 고함에 드루쉬아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나일의 얼굴에도 강한 의문이 어렸다.
계단 위,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초조하게 밖을 살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흩어진 침입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뭘… 알고 계시는 겁니까?”
“시간이 없다. 철수한 병력은 네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거다. 멀리 가지 않았어. 가서 병사들을 데려와.”
“조부님!”
“너보다 내가 대공성을 더 잘 알아!”
쩌렁한 목소리가 삭막한 공간을 울렸다. 사나운 기세를 내뿜는 두 사람의 언쟁에 나일은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형형한 드루쉬아의 눈동자는 반쯤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다. 네오렌은 한숨을 토해내며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찾도록 하마. 너는 네 할 일을 해. 그래야 그 아이를 지킬 수 있다. 내 말을 믿어라. 그 아이는 그렇게 쉽게 죽지 못한다, 드루쉬아.”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죽지 못한다. 그 미묘한 어조의 차이를 나일은 알아차렸다.
“가라, 더 늦어지기 전에.”
네오렌의 어조는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드루쉬아는 핏발선 눈으로 아시카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상황. 당장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다치지 마시고.”
간결한 당부에 네오렌이 가벼운 고갯짓으로 수긍했다.
드루쉬아는 제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사달을 불러온 것이.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그는 끝내 참담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드루쉬아는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 연회홀을 나갔다. 나일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시선으로 네오렌을 돌아보았다.
“흩어졌던 놈들이 곧 돌아올 텐데요.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우리는 이 자리를 지킨다.”
“레이디 이그레인을 찾아야 하잖아요.”
“찾을 필요 없다.”
“네?”
어리둥절한 나일의 반응에도 네오렌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제 말대로 자리를 사수하려는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이건 뭐….”
나일은 당황스러웠다. 대공성 안으로 들어온 침입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들이 뭘 찾는지 모르지만,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기사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오렌은 더 말을 섞을 의사가 없는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동행한 나머지 기사들도 입구에 진을 치고 날 선 시선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대책 없는 사람들이네, 정말.”
고지식한 기사들 같으니. 나일은 불퉁하게 내뱉으며 네오렌의 옆에 주저앉았다.
* * *
“흐으….”
가슴을 짓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차디찬 감각이 목 언저리와 가슴께를 스쳐 지나간다.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운 어깨에 냉기가 고였다. 순간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엄습하며 무언가가 쑥 빠져나갔다.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위눌린 것처럼 굳어버린 몸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에는 보이는 것도 없었다.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헉….”
아시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에서 무언가 줄줄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피일 것이다. 그것도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한.
‘그래, 피.’
뭐가 날아오는지 알아채지도 못한 순간에 몸을 꿰뚫은 화살. 그리고 시야가 뒤집힌 채 추락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르쉬아….”
그녀를 에워싼 고요가 섬뜩하다. 긴박했던 소음이 모두 사라진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웠다.
아시카는 흐릿해진 시야를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안개 속에 잠긴 것처럼 서늘한 향기가 느껴졌다. 환각의 경계를 넘을 때마다 맡았던 시린 향기였다.
“르쉬아,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 드루쉬아를 떠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급한 마음에 움찔거리던 손끝이 힘을 되찾았다. 마비되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한쪽 팔을 버려두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흐윽.”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후두둑 쏟아져 얼굴에 드리운다. 아시카는 그제야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이 닿아있는 바닥이 유리알처럼 매끄럽다. 유리도 아니고 대리석도 아닌 기이한 느낌.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황금 주단이 드리워진 침대였다.
“…침실?”
그녀가 있는 곳은 침실이었다. 눈이 따가울 만큼 화려한 세공장식으로 가득한 방 안. 침대 아래에는 순백의 모피가 양탄자 대신 깔려있고 색색의 꽃잎이 방안 가득 흩어져 있었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촛불과 향기로운 유향의 냄새. 흥분을 가라앉히는 묘한 향기가 갓 깨어난 정신을 다시금 흐리게 만들었다.
아시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대공성의 연회홀에 있었는데.’
왜 이런 곳으로 와 있는지, 중간에 어떤 기억이 잘려나간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단은 나가야 해.”
드루쉬아가 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추락 직전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졌다.
맥이 빠져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힘겨웠다.
“문이 어디….”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아시카는 멈춰섰다.
“문이 없어?”
방 안 어디에도 문이라고 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벽과 천장을 가득 채운 섬세한 조각과 금장식이 화려한 빛을 낼 뿐.
문이 없으면 창문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아시카는 비틀거리며 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새카만 어둠에 잠긴 창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다급한 마음에 유리창을 더듬었다. 한겨울 서리 맺힌 창문처럼 손바닥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깨부술 방법이… 악!”
아시카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유리 창문에 어스레하게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뭐… 뭐야….”
저 빼고는 아무도 없는 방 안. 내부를 고스란히 비추는 유리창에 백금색의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얼어있는 아시카를 향해 상대의 실루엣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납빛 얼굴에 청보라빛 눈동자가.
“아아악!”
휘청거리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웅, 하고 귓가를 울리는 진동. 그 파장이 너무 커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방안이 진동하고 푸른 섬광이 스쳐 갔다.
“악. 그만!”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하며 몸을 쥐어 터트릴 것만 같았다. 아니 온몸을 산산이 조각내버릴 것만 같은 진동이었다.
[내 보내 줘.]
진동은 의미를 지닌 소리가 되어 사납게 머릿속을 들쑤셨다.
아시카는 몸을 웅크린 채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놀렸다. 그녀를 짓누르는 힘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흐억.”
발목을 휘감는 차디찬 감각. 아시카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처럼 반들거리던 바닥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놔, 놔아!”
찰랑, 물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잔잔한 수면이 일렁이듯 바닥이 요동쳤다.
“아아악!”
파문이 만들어낸 진동으로 바닥에 닿아있던 팔다리가 떨린다고 느낀 순간, 발목을 쥔 손이 그녀를 힘껏 아래로 끌어당겼다. 수렁에 빠진 짐승처럼 아시카는 벗어날 수 없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