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대공성 주둔지에 전령이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부대장은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다급히 달려온 병사를 맞이했다.
“탈리온 공작님께서 보내신 명령서입니다.”
“각하께서 명령서를?”
부대장은 국경에서 이민족들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대공령에 배치된 기사 출신이었다. 때문에 대부분 수도에서 머무는 드루쉬아와는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명령서를 펼쳐 든 부대장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폭동? 알메나긴 지역에 폭동이 일어났다고?”
“예. 가장 가까운 검문소도 사흘 거리라 지원이 어렵고 그나마 가까운 주둔지가 여기라서 지원을 요청하셨습니다.”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있던 참이다. 분노한 사람들이 종종 병사들을 공격하거나 사소한 충돌로 싸움이 나기도 했지만 규모가 커지기 전에 진압해왔다.
“명령서 대로면 병력 전체가 움직여야 하는데, 여긴 어쩌고? 각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이그레인 주둔지에 협조 공문이 갔습니다. 업무 교체 시기를 앞당긴다고 합니다.”
원래 업무를 교대하는 시기보다 한 달여가 빠르지만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지난 40년 동안 한결같이, 조용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대공성이지 않은가.
“각하께서 어디로 가셨나 했더니.”
드루쉬아가 대공령에 왔다는 소식은 진작에 전해 들었다. 어디로 갔는지 행선지가 모호했는데 하필 지금 사달이 난 걸까.
“지급입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수습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그레인 병사들도 바로 움직일 테니, 못해도 하루면 도착할 겁니다.”
익히 아는 병사의 얼굴이 초조하다. 부대장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업무를 인계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공작님을 지원하러 간다.”
병사들의 주둔지가 있는 반대편 언덕 위, 나일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대공성 외벽은 군데군데 부서져 성벽의 기능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본성은 외부로 뚫린 개구부를 판자 따위로 모두 막아놓아 더욱 이상하게 보였다.
드러난 곳은 내벽 꼭대기 보랑에서 이어진 출입문뿐이었는데 아래에서 흉벽까지 타고 오를 방법이 없으니 사람이 드나들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입을 위해 고민하던 것도 당장은 급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공성을 감시하기 위해 주둔해 있던 병사들이 허둥지둥 떠나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런 이동이 익숙한지 순식간에 대열을 갖춰 대공성에서 멀어져갔다.
불과 다섯 명의 병사들만이 남아서 평소처럼 대공성 주위에 불을 올리고 자리를 지켰다.
‘이그레인과 업무 교대하는 날이 하필 오늘인 거야?’
혹시나 싶어서 나일은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가 대공성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도 다른 병력의 이동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이븐의 상단을 이용해 대공령에 올 수 있었던 건 이그레인의 이름으로 발부된 허가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카는 대공성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대신 나머지는 나일의 선택에 맡겼다.
아시카와 드루쉬아가 먼저 떠나고 나일은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기감이 예민한 드루쉬아의 뒤를 바짝 쫓을 수 없다 보니 어느 순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대공성 감시 병력이 철수하는 엉뚱한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어떻게 하지? 미치겠네.’
이대로 홀로 대공성에 들어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발목을 잡았다.
나일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훑어대며 고민에 빠졌다. 탈리온의 누군가에게 지금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가장 가까운 주둔지가 어디였더라? 아니, 차라리 기사들을 찾는 게 빠르겠어.’
나일은 함께 왔던 탈리온의 기사들을 찾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성은 숲속 한가운데 높이 솟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펼쳐진 숲은 다른 어느 곳보다 깊고 어두웠다. 나일은 기사들과 헤어졌던 곳까지 직선거리를 가늠하며 길이 없는 숲속을 달렸다.
‘거만한 놈 같으니. 큰소리 땅땅 쳐놓곤, 무슨 관리를 이따위로 해.’
나일이 말하는 거만한 놈이란 물론 드루쉬아였다. 작정하고 속을 긁어대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재수 없는 놈. 나일은 드루쉬아를 그렇게 기억했다.
‘레이디 이그레인은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그새 정이라도 들어버린 걸까. 누이를 어떤 놈팡이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평생을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방황했는데 희한하게도 저를 모르는 이들 속에서 마음이 놓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으면서 나일을 자신의 영역 안에 들여준 아시카.
어쩌면 그녀도 저처럼 마음 둘 곳이 없어서 홀로 버텨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더욱 마음이 쓰였더랬다.
「너는 마음이 약해서 큰일은 못 치러.」
이븐이 나일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천만의 말씀이지. 누구 마음대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빤히 보이는 저주받은 미래를 기다리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일은 정신없이 숲을 달렸다.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말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숨겨둔 탓이다. 말이 있는 장소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누구냐!”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나일은 뒤늦게 사람들의 기척을 깨닫고 멈춰섰다.
숲에 가려져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둔덕의 틈새였다. 어둑해지는 숲 한가운데 낯선 사내 여섯 명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무장한 사람이 여섯. 시비가 걸려서 좋을 게 없겠구나.’
나일은 빠르게 상대를 가늠했다.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상대가 나일을 돌아보았다.
“이 말의 주인이 그대인가?”
걸걸하게 쉰듯한 목소리에서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굵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 초로에 접어들었는데도 쇠약해지지 않은 커다란 골격과 한 손으로는 들기도 어려운 장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순간 나일은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났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다.
“대답하지 못하는 건 떳떳하지 않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가.”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그럴 리가요. 물을 구하려고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입니다. 그쪽 분들은 왜 남의 말을 넘보고 계시나요?”
“물을 구하려고 자리를 비웠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사내들이 넓게 간격을 벌려 나일을 에워쌌다.
“이러지 맙시다. 제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그러면서도 나일의 손은 허리춤에 있는 검 위로 올라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수상쩍게 보이는 상황. 상대도 위험을 감지했는지 조심스럽게 검을 손에 쥐었다.
문득 나일의 시선이 사내들의 검을 유심히 살폈다. 검에 새겨진 장식이 눈에 익었다.
“어? 혹시, 탈리온의 기사들입니까?”
굳어있던 나일의 표정이 확 풀렸다.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노인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대공령 사람들치고 탈리온을 반가워하는 이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군가.”
“나일이라고 하는데요. 지금 제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제까지 탈리온 공작님과 함께 있었어요. 그렇지않아도 탈리온의 기사들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고요.”
“드루쉬아와 함께 있었다고?”
“실례지만, 공작님을 아시나요?”
적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노인이 검에서 손을 떼고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놈이 내 하나밖에 없는 손자이니, 알다마다.”
나일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설마, 탈리온의 노공작님?”
“네오렌이라고 하네. 그런데 내 손자의 동행이 왜 홀로 숲을 헤매고 있는가.”
나일은 소식을 전할 상대를 제대로 찾았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설명하면 제 말을 믿을까.
“아, 그게….”
돌연, 바람도 일지 않는데 숲이 출렁거렸다. 이내 새카만 더께가 벗겨지듯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숲이 들썩이는 소음과 요란하게 울어대는 새들의 소리.
기사들의 시선은 새카만 구름처럼 날아올라 순식간에 멀어지는 새들에게로 향했다.
“헉.”
“이게 무슨 일입니까?”
채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이변이 찾아들었다. 우르릉, 땅을 울리는 진동이 발밑을 타고 흘러 온몸으로 전해졌다.
“대공성이 있는 방향입니다.”
불길한 예감이 기어이 비껴가지 않을 모양이다. 나일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노공작께서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대공성에 주둔해 있던 탈리온의 병사들이 철수하는 걸 봤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려!”
황망한 소식에 네오렌이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나일은 기죽지 않고 제 할 말을 뱉었다.
“이유는 저도 몰라요. 그래서 탈리온의 기사들을 찾아가던 중이었어요. 누구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대공성 주둔군의 명령권자는 내 손자다. 그놈이 그런 미친 짓을 했을 리 없어.”
“네, 아마도 아닐 겁니다. 아닐 거라고 확신해요.”
드루쉬아는 탈리온의 병사들을 피해 대공성에 들어가려고 다른 길을 택했다. 그러니 이건 드루쉬아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장은 제 말을 믿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탈리온 공작님이 안 계신 지금은.”
네오렌은 드루쉬아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일을 바라보는 형형한 눈동자는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아는 느낌이었다.
서로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올리지는 못할 위험천만한 행동. 나일은 네오렌이 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네오렌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동행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가까운 주둔지로 가서 사실을 알리고 가능한 병력을 모아 대공성으로 오라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기사는 반문 없이 바로 말에 올랐다.
“나일이라고 했나?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나일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네오렌을 바라보았다.
“내 손자놈을 찾아야겠어. 어디로 갔는지, 나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앞장서게.”
묵직하게 가라앉은 노공작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상대를 단숨에 짓눌러버리는 기세가 조금의 반박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일은 입을 꾹 다물고 나무에 매두었던 말고삐를 풀었다. 말을 재촉해 대공성으로 향하는 동안 네오렌과 나머지 기사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네오렌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만큼 몸서리가 쳐졌다. 여기 있는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꼭 한번, 40년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