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88화 (88/153)

#88.

아시카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대공성에 들어와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거죠?”

“보다시피 대공령 사건은 의문투성이야.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우린 이곳을 지켜왔고.”

대공령은 언제 어떤 문제로 타오를지 모르는 불씨와도 같았다.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마냥 지켜만 보기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씨.

아시카는 말없이 그의 대답에 수긍했다.

드루쉬아의 뒤를 따라 걷는데 뭔가가 발길에 툭 걸렸다. 무심결에 시선을 내리자 먼지하고는 다른 검갈색의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소복이 쌓여있었다.

“이게 뭐죠? 흙인가요?”

“글쎄. 나 역시도 이곳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지대가 높은 곳이라 어디서 토사가 휩쓸려 들어왔을 리는 없을 텐데요.”

깨닫고 나자 곳곳에 있는 검갈색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스산한 기분.

“성안에 장식품 같은 게 거의 안 보여요. 초상화나 태피스트리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렇지. 여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아시카의 말처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보이는 것이라곤 휑한 석조 구조물뿐이었다. 곳곳에 문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있었고 방으로 보이는 곳들조차 텅 비어있었다.

40년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공간처럼 모든 것이 스러져 먼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계단 앞에서 멈춰섰다.

“여기를 기점으로 아래로 가면 1층 홀이 나오고, 위로 가면 4층으로 이어져.”

“중간은 없나요?”

“2층과 3층 공간에 큰 연회 홀이 있었다는데 완전히 막혀서 들어갈 수가 없어.”

다른 곳처럼 나무판자를 덧대어 막은 것이 아니었다. 바깥쪽 천장이 무너지면서 커다란 석재들이 입구를 막아버렸다.

“1층으로 가보죠.”

아시카가 방향을 정하자 드루쉬아가 앞서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드루쉬아가 물었다.

“원하는 만큼 답을 얻은 것 같아?”

“글쎄요.”

황량한 폐허를 확인하고 답 없는 의문만 더해졌을 뿐. 아시카가 바란 해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애쓴 드루쉬아에게 미안할 정도로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드루쉬아가 걸음을 멈췄다. 확연하게 굳어진 표정을 보고 아시카의 얼굴에도 의문이 어렸다.

“왜….”

오랜 세월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대공성을 파고드는 작은 소음. 그것은 점점 커져서 그녀에게도 들릴 만큼 선명해졌다. 아시카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리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시카는 본성의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루쉬아조차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40년 동안 한 번도 열려본 적 없는 대공성이었다.

“설마….”

빠각, 빠각.

텅 비어버린 성에 울리는 소리가 이제는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해졌다. 대공성의 정문은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고 나무를 덧대어 완전히 가로막았다. 그것을 누군가 뜯어내고 있었다.

“아시카,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면.”

드루쉬아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려고 한다. 아시카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 생각하지 말고 혼자라도 도망가.”

“무슨 말이에요?”

커다란 손에 잡혀 끌려가면서 아시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누가 대공성에 들어오려는 건가요? 대체 누가?”

드루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봉쇄되어 있을 뿐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위험이 예상됐다면 절대 아시카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일까. 마치 두 사람이 여기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떻게…. 대공성은 탈리온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잖아요?”

“이곳에 침입자가 있다면 병사들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

이제껏 없었던 일이기에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대공성에 누가, 왜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침입하려는 걸까.

드루쉬아는 홀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달렸다. 넘어질 듯 휘청이는 아시카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끌어당겼다.

“나가야 해. 당장.”

“어쩌면 탈리온의 병사들일 수도 있잖아요?”

쿵, 하는 묵직한 충돌음이 울렸다. 기어이 대공성의 정문이 열린 것이다.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강제로 문을 뜯고 들어오는 상대는 분명히 적이다. 드루쉬아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여긴….”

“르쉬아!”

그 순간이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진동이 우르르, 발밑을 훑고 지나갔다. 드루쉬아는 걸음을 멈추고 아시카를 확 당겨 품에 안았다. 무슨 일인지 두 사람이 어리둥절 해있는 찰나, 또다시 우르릉, 진동이 느껴졌다.

“뭐, 뭐예요, 이건?”

“일단 이유는 나간 뒤에 따져 묻자고.”

그러나 걸음을 떼기도 전에 더 큰 진동이 몰려왔다. 두 사람이 있는 계단참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진동이 커지면서 대공성 전체가 흔들렸다. 오래도록 켜켜이 쌓여있던 먼지가 진동과 함께 뿌옇게 쏟아졌다.

콰득, 쿵, 쿵.

요란한 파열음이 연달아 들리고 두 사람이 있는 계단참으로 육중한 석재 파편이 굴러떨어졌다.

“아시카, 이리로!”

드루쉬아는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고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흐윽, 르쉬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진탕 뒤흔드는 충격에 눈앞이 핑핑 돌고 어딘가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아시카를 감싸 안은 품은 단단하고도 견고했다. 고개를 들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어서 그의 가슴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재난이 이대로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산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리는 순간, 기이한 비명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마치 대공성이 살아 날뛰는 것처럼.

본능적인 공포가 목 끝까지 차올라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얼이 빠질 만큼 갑작스러운 충격이 지나가고 얼마 뒤, 타다닥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뿐, 계단으로 오르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드루쉬아의 피가 차게 식었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가장 선두에 선 상대가 소리쳤다.

“찾았다!”

검은 옷을 입은 무장한 사람들. 아시카는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었다.

본 적이 있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어도 똑같은 옷차림에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자객들을.

“르쉬아, 저들은… 우리를 죽일 거야. 죽이러 온 거야.”

드루쉬아의 옷깃을 잡은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환각 속에서 이그레인 저택을 습격했던 놈들이었다. 간신히 도망친 두 사람을 외딴 오두막까지 쫓아와 끝끝내 죽인 것도 저들이었다.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드루쉬아는 떨고 있는 아시카의 손을 잡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오르는 속도를 아시카가 따라잡지 못하자 거의 끌고 가다시피 달렸다.

등 뒤로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타닥, 날아든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박혔다.

“젠장!”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반쯤 부서진 상태였다.

“르쉬아, 저쪽으로.”

3층 복도 일부가 무너지면서 막혀 있던 연회홀의 입구가 드러났다. 고민할 새도 없었다. 반대편 입구가 열려있기를 바라면서 드루쉬아는 그대로 아시카를 끌고 달렸다.

바닥은 무너져내린 석재가 나뒹굴어 엉망이었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보폭을 따라잡지 못하고 몇 번을 휘청이다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아시카!”

드루쉬아는 그녀를 안아 잡아주면서 단숨에 일으켰다. 멈춰있는 짧은 순간 뒤따라오던 자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일으키는 동시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

“르쉬아!”

“당신이 있으면 내가 싸울 수가 없어. 반대편에 길이 있으면 그대로 4층으로 올라가서 우리가 왔던 길로 되밟아 가!”

그녀를 밀어내는 드루쉬아의 모습 위에 오두막에서 소리치던 그의 모습이 덧씌워진다. 단호한 외침과 다급한 손길, 모든 것이 기억 속의 반복인 것처럼 닮아있었다.

시야가 까마득히 멀어진다. 드루쉬아의 목소리마저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아득해졌다.

앞을 가로막고 선 드루쉬아를 향해 검은 인영들이 달려들었다. 은빛 호선이 무자비하게 날아들고 맞부딪힌 검에서 불꽃이 튄다. 푸른 불꽃이 번뜩일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함께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드루쉬아의 검이 차례로 상대를 베어갔다. 무너진 석재로 반쯤 가려져서 복도가 좁아져 있었다. 덕분에 한꺼번에 달려들지 못하는 적들이 순식간에 피를 뿜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몇 명인지도 모를 적들은 계속해서 드루쉬아에게 달려들었다.

“아시카, 정신 차려!”

먹먹하던 세상 속으로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흐윽.”

아시카는 멈춰있던 숨을 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공포에 질린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어 사지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내가 방해가 되면 안 돼.’

환각에서와 달리 지금은 멀쩡하게 달릴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었다. 드루쉬아 역시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고. 아시카는 망설임 없이 열려있는 연회홀의 입구로 뛰어들었다.

“헉.”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아시카가 들어선 곳은 연회홀 상층부에 있는 발코니 형태의 돌출부였다. 발코니의 정면은 난간으로 가로막혀 있고 발코니를 중심으로 양옆으로는 연회홀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족히 3층 높이쯤 되는 위치라서 홀 전체를 발아래에 둔 느낌이었다. 웅장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연회홀 전체를 굽어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온다. 드루쉬아가 달려드는 자객의 검을 걷어내며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아시카, 반대편 출구를 찾아!”

허공을 가르는 쇳소리, 화살이 날아드는 파공음. 뒤에서 따라오던 적들은 드루쉬아와 싸우는 동료들을 상관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타다닥,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석궁의 힘에 견고한 석조 벽에 화살이 연달아 박혔다.

‘출구, 출구를 찾아야 해!’

아시카는 발코니를 가로질러 달렸다. 드루쉬아가 말한 대로 반대편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곳곳에 무너진 석재 파편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앗.”

넘어질 듯 몸이 휘청이며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난간을 잡았다.

입구에서 드루쉬아가 상대의 검을 막아내던 찰나였다. 그의 시선은 검을 든 상대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석궁을 겨눈 적에게로 향했다. 화살이 향하는 방향은 그가 아니었다.

쇄애액,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드루쉬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드루쉬아는 단숨에 검을 걷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시카!”

아슬아슬 난간에 기대있던 아시카가 시선을 돌리기도 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채 깨닫기도 전에 강렬한 고통이 몰아쳤다.

“아악!”

“안돼!”

석조벽을 꿰뚫을 만큼 위력적인 석궁이었다. 화살은 아시카의 어깨에 박히는 동시에 휘청이던 가녀린 몸을 단숨에 밀어내고 말았다.

드루쉬아의 시야에서 아시카의 몸이 난간을 넘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겁에 질린 새카만 눈동자가 아득히 멀어지는 모습도.

“아시카!”

그대로 튕겨 나간 아시카는 머리부터 연회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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