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대공령에 들어온 지 엿새째가 되는 날,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기사들과 헤어졌다. 기사들에게는 애거나이트와 만나 그간 조사한 정보를 받고 탈리온 주둔지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나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일이 조용히 물러나는 것에 의심이 들었지만 그래 봤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을 타고 움직였다. 황량한 자갈밭을 지나고 누렇게 말라붙은 초지를 거쳐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시카는 대공령이 넓다는 사실에 감탄하면서도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도시나 마을을 피해 다닌 탓에 여유로운 여정에도 몸이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자꾸만 멀찌감치 떨어지려는 아시카를 보며 드루쉬아가 툭 말을 뱉었다.
“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내외해?”
“그 말 진심인가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돌아보자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생각해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
탐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양 하늘빛으로 푸르던 눈동자가 짙어졌다.
“단둘이 있게 된 게 얼마 만인지 알아?”
“여기가 대공령 한복판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알아. 아니었으면 진작에 무슨 일이든 났겠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가 진득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아시카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잘 따라오기만 해. 위험하지 않은 길로 데려갈 테니.”
선택이 가능할 만큼 길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아시카는 대공령에 관해 자신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타박타박,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평화로운 숲길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가롭게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예전에도 대공성에 들어갔던 적이 있나요?”
“어떨 것 같아?”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꺼리지는 않을까, 민감한 질문을 한 건 아닐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길을 알고 있다는 건, 아마도 가본 적이 있다는 의미겠죠.”
“궁금하지 않았겠어? 왜 선황제는 대공성을 무너뜨리는 대신 봉쇄령을 내린 건지. 어차피 폐허가 되어버린 성을 뭘 위해 긴긴 시간 지키라고 했던 건지.”
“그래서 답을 찾았나요?”
“아마 그랬다면 당신에게 해줄 말이 좀 더 많았겠지. 이렇게 무모하게 데려갈 게 아니라.”
주위를 살피던 드루쉬아가 말고삐를 한쪽으로 당겼다.
“이쪽으로.”
길이 없는 방향이었다. 지날 때마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리고 버석거리는 낙엽에 말발굽이 푹푹 빠졌다. 숲속은 다 비슷한 풍경이라서 언뜻 봐서는 방향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드루쉬아는 차분히 앞을 더듬어갔다.
풀이 우거진 둔덕 아래로 들어가 드루쉬아가 말에서 내렸다.
“여기부터는 걸어가야 해.”
아시카가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드루쉬아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르쉬아!”
순식간에 아시카는 아래로 주륵 끌려 내려가고 말았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드루쉬아는 단숨에 그녀를 제 품에 가두었다.
“내가 무슨 짐짝도 아니고, 이렇게 번번이 들었다 놨다 하기에요?”
“들었다 놨다 하는 건 그쪽이지. 당신 때문에 내 심장이 얼마나 들썩였는지 알아?”
아시카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이 남자는 간질거리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뻔뻔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를 안 해.”
드루쉬아는 불퉁한 어조로 서운함을 토로했다.
“당연하잖아요. 나는 이그레인이에요.”
“그래, 알아. 하지만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당신은 지금도 넘칠 만큼 도와주고 있어요.”
고집스러운 대답에 드루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정을 가장했던 아시카의 심장이 두근, 두근 빠르게 뛰었다. 애써 덮어두었던 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가슴께를 간질거린다.
아시카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누군가와 온기를 주고받고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내린 한 사람. 거기 있는 줄도 몰랐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드루쉬아가 있었다. 그러나 용기 내어 다가가려던 마음은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흑요석처럼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는다.
“나 때문에 당신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드루쉬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조금은 놀란 듯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눈꼬리가 휜다. 적어도 그가 싫어서 밀어내는 건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탈리온이라는 이름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
가볍지 않기에 아시카는 이 관계로 인해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설령 황실이라 해도 탈리온을 위협하지는 못해.”
“그 발언, 꽤 위험해요.”
“그래서 고발이라도 하려고?”
“조심하라는 말이에요. 강할수록 휘어지지 못해서 부러질 수도 있다고요.”
“진심인가 보네. 그렇게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꽁꽁 감춰두었던 아시카의 마음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염려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서 웃음이 샌다.
“그런 거였군.”
어쩐지 휘말린 기분이 들어 아시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드루쉬아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주고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사위에는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넝쿨이 우거진 비좁은 길이 끝나고 삼면이 가로막힌 공간이 나왔다. 드루쉬아는 말고삐를 나무에 매고 넝쿨과 나무뿌리가 뒤엉킨 벽면을 더듬었다. 겉으로는 모두 같아 보였는데 어느 지점에서 손이 쑥 들어갔다.
“여기야. 이리로.”
드루쉬아는 눈앞에 있는 넝쿨 더미를 걷어내고 아시카의 손을 잡았다.
넝쿨이 가림막처럼 드리워진 벽면에 비좁은 틈이 있었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만한 틈을 지나 들어가자 넓은 토굴이 나왔다.
“감쪽같이 숨겨진 공간이네요.”
아시카는 두 사람이 들어온 입구를 돌아보았다. 빽빽한 넝쿨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미약해서 내부는 어두웠다. 그나마도 몇 걸음 안쪽에는 빛이 닿지 않아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토굴의 벽면에는 크고 작은 바위와 검은 흙, 나무뿌리들이 뒤엉켜 있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드루쉬아는 구멍 안쪽으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제국이 왕국이던 시절부터 있던 곳이니까. 트렐린의 궁보다 대공성이 먼저 지어졌다는 말도 있어. 워낙 오래돼서 대공성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몇 개인지 아무도 모를걸?”
드루쉬아는 구멍 속에서 나무 막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기름 먹인 천으로 미리 만들어둔 횃불이었다. 습기 머금은 불이 타오르고 검은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쳤다.
드루쉬아는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으로는 아시카의 손을 잡고 걸었다.
“발밑 조심해.”
손을 잡은 것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드루쉬아는 재차 당부했다.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토굴의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길이라고 보기 어려운 넓은 공간에 이리저리 구멍이 흩어져 있었다. 드루쉬아는 길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고 아시카는 방해가 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오래지 않아 사람 하나가 지날 만한 작은 철문이 나왔다. 얼마나 녹이 슬었는지 문을 여는 동안 끽끽거리는 소음이 요란하다. 문을 지나고부터는 제대로 만들어진 통로가 나왔다.
내내 긴장한 탓에 드루쉬아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손을 잡고 걸으며 참아왔던 질문을 꺼냈다.
“혹시 아크펠라 대공가에 대해 아는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한데?”
“마지막 대공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공가의 사람들은 어땠는지, 그런 거요.”
선황제는 모든 기록에서 아크펠라의 이름을 지우려고 애썼다.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기록을 지워도 아직 많은 이들이 대공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드루쉬아의 조부 네오렌이나 이그레인의 공작 웨이브처럼.
“마지막 아크펠라 대공은 성정이 유약한 사람이었다고 해. 그러니 아픈 아내를 두고 정부를 들인 것도 모자라 거기에 휘둘렸겠지.”
“대공비가 살아 있는데 본성에 정부를 들였단 말인가요?”
제국의 법은 일부일처제였다. 황제도 예외는 아니라서 설령 정부를 둔다 해도 비밀리에 관계를 유지할 뿐 본처의 영역에 들이지는 못한다.
“대공비가 살아 있기는 했지만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더군. 그러니 공공연히 정부를 들인 걸 아무도 비난하지 못했던 거지.”
“산송장이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십수 년을 침대 생활을 했다고 들었어. 당시 대공가도 상황이 좋지 않아서, 대공비 가문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는데 끝내 죽고 말았지.”
등줄기에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시카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드루쉬아가 말을 이었다.
“이후 대공비 가문이 지원을 끊으면서 대공가는 정부의 손에 휘둘렸어. 정부가 아이 둘을 낳았는데, 혼외자가 될 뻔했던 두 아이가 대공비가 죽고 나자 인생이 바뀌었지. 대공가의 유일한 적녀가 불임 판정을 받았거든.”
“불임… 이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아시카가 생각했던 가정들이 꼬이면서 혼란스러워졌다. 드루쉬아는 통로 끝에 다다라 앞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만.”
지하의 통로는 천장까지 이어지는 계단에서 끝이 났다. 드루쉬아는 아시카에게 횃불을 넘기고 천장에 있는 석판을 밀어 올렸다.
“이제 대공성에 들어 온 건가요?”
“지금 위치가 본성 바깥쪽에 있는 탑이야. 여기서 더 올라가야 해.”
두 사람이 빠져나온 뒤 바닥의 석판은 원래대로 덮어두었다. 몇 걸음 앞으로 나가자 외벽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따라 올랐다. 군데군데 부서진 곳이 있어서 걸음을 서두르기는 어려웠다.
“대공가의 적녀는 그 뒤 어떻게 됐어요?”
“본래는 황태자비가 되거나 차기 대공이 되어야 했는데, 황태자비의 자리는 서녀가, 후계자의 자리는 서자가 갖게 됐지.”
“지금의 황태후로군요.”
아크펠라 대공의 정부가 낳은 딸 일레르나. 혼외자라는 출생의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비가 된 뒤 황후 자리에까지 올랐다. 지금은 황제의 모후로서 모주의 궁전을 지키는 주인이 되었고.
그러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대공녀는 후계자조차 될 수 없었다. 좋은 혼처를 찾을 수도 없으니 잘해봐야 아이가 있는 가문의 후처 자리나 가능했을까. 대공녀는 본래 자신의 것이어야 했던 모든 것을 빼앗긴 셈이었다.
“…억울했겠어요.”
“당사자가 아니니 모를 일이지만, 대공녀는 대공성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해. 그러니 황태자비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긴 것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차기 대공의 자리는요?”
“우연인지 뭔지 서녀가 황태자비로 간 뒤, 후계자로 내정된 서자가 사고로 죽었어. 대공녀가 본래의 후계자 자리를 찾았는데, 반역 문제가 터진 거야.”
“대공은 유약한 사람이었다면서요. 그런 사람이 반역을 저질렀다고요?”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수도에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어. 급작스럽게 몰려온 황제의 군대에게 하루아침에 대공성이 함락되어 버렸으니까.”
“당시 대공성의 문을 열어준 게 황태후였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진실은 당사자만이 알겠지. 그날 대공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니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대공성의 본성에 들어갔던 병사들 중 살아 돌아온 이가 없다고 한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선황제뿐이었고, 성을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본성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대공성에 대해 잘 아네요?”
“조부님께 들었어. 이그레인 공작도 아는 얘기일 텐데, 전혀 못 들었나?”
“대공령 이야기는 입에 올리는 것도 싫어하세요.”
이그레인 공작이 대공령과 탈리온 모두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공령을 관리하는 아시카조차 한 번도 대공령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웨이브가 질색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령을 관리하는 손녀에게조차 입을 다물다니.’
이그레인 공작은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 탑의 중반부에서 성채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계단식으로 높게 솟은 다리가 성의 중앙부로 이어졌는데 반쯤 부서져 위태로워 보였다.
“구조가 복잡하네요.”
“워낙 오래된 곳이라서 여러모로 특수하지.”
대공성은 지형적인 특성상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지대가 낮은 구역에는 성벽 안쪽으로 작은 건물들이 모여 있고 지대가 높은 쪽에 본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황제의 명령으로 봉쇄된 곳은 본성이었고 두 사람은 본성의 탑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계단식으로 길게 이어진 다리를 지나자 넓은 복도가 나왔다.
횃불의 빛이 멀리까지 퍼지는 걸 보고 뒤늦게 아시카가 주위를 살폈다.
“빛이 새나가서 누가 보면 어쩌죠?”
“그럴 걱정은 없어.”
드루쉬아가 횃불을 높이 들고 벽 쪽을 가리켰다. 창문이 있던 위치에는 모조리 나무판을 덧대 가로막아 놓은 상태였다.
“창문뿐이 아냐. 외부로 난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막아버렸어.”
“세상에, 왜 이렇게까지….”
“그러니까 선황제가 미쳤다고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