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86화 (86/153)

#86.

“헉.”

“아무 말 마세요. 지금은 방해하는 게 더 위험합니다.”

아시카는 비명이 나오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이었다. 검이 부딪치는 찰나 서로에게 미끄러진 검이 상대의 급소를 파고든다. 드루쉬아는 그대로 검을 걷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제법이군.”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뭐야? 뭐가 지나갔어?”

“보긴 봤는데. 이건 뭐….”

앗, 하는 사이에 다시 부딪힌 검이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충돌하고 서로 교차하며 멈춰섰다. 나일의 체구가 작아 우습게 봤는데 힘이 여느 기사들 못지않았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한치도 물러남 없는 나일의 검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왜 기사들이 나일에게 당했는지 알겠어.’

무가에서 전수받은 검술에 실전 경험으로 얻어진 살검이 더해졌다.

“파병군으로 다녀왔다지? 근무지가 어디였나?”

검을 마주 대고도 드루쉬아는 여유로웠다. 나일의 빠른 검이 움직일 틈을 주지 않으려고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

힘의 균형이 어긋나는 찰나의 순간, 나일의 검이 상대의 검을 휘감는다. 그대로 비껴가며 다시 충돌한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귀(鬼)의 숲.”

“아하.”

빠른 살검의 기원을 알겠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을 테고.

그걸 직접 입증해 보이려는지 은빛 호선이 빠르게 쇄도했다. 드루쉬아의 목과 심장에 아슬아슬하게 다가온 검이 연신 튕겨 나갔다.

드루쉬아의 검이 공격을 받아치는 힘은 위력적이었다. 연속해서 충격을 받아내느라 나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재빨리 뒤로 빠졌다가 다시 민첩하게 검을 날린다.

빠르게 검을 부딪치면서도 드루쉬아의 숨소리는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못마땅한지 나일의 검은 시시각각 매서워졌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검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서로를 탐색하며 시시껄렁한 잡담을 이어갔다.

“용케 홀리지 않고 살아 돌아왔어.”

“공작님께서는 적해(赤海)에 다녀오셨다죠? 몸에 훈장이 꽤 많이 남아있겠네요. 거기 해파리가 그렇게 독하다면서요?”

“해파리라니. 어디서 한참 잘못 주워들었군.”

드루쉬아는 지금 상황이 흥미로웠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여겼는데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기사들은 이제 완전히 일손을 놓고 두 사람의 대전에 집중했다.

방어적으로 움직이던 드루쉬아가 돌연 양손으로 검을 쥐고 내리찍었다.

“헉!”

충격으로 나일이 주춤하는 순간 한 손으로 옮겨간 검이 예상된 궤적을 받아치고 그대로 나일에게 날아들었다. 나일은 처음으로 반격하는 대신 몸을 숙여 피했다.

드루쉬아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아악!”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드루쉬아는 숲으로 뛰어들며 넋을 놓고 있던 기사들에게 외쳤다.

“전원 경계 태세!”

“각하!”

“르쉬아!”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인영이 드루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가 휘두르던 검은 드루쉬아의 검과 부딪혀 그대로 날아갔다.

“으악, 자, 잠깐만요!”

상대의 심장을 향해 가던 검이 순간 방향을 바꾸고 대신 주먹이 날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한 명이 나가떨어지고 달려들던 다른 상대도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컥.”

“기다려요! 해치려던 게 아닙니다!”

황급히 달려온 기사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숲에 숨어있던 사람은 셋. 한 명은 단검에 맞아 주저앉았고 한 명은 드루쉬아의 발밑에 깔렸다. 날카로운 검 끝이 바닥에 널브러진 상대의 목에 아슬아슬 닿아 있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쓰러진 사내는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감히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러나 있던 동료는 양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일단 그 검 좀 어떻게….”

“대답.”

“으헉!”

서늘한 감각이 당장 목을 꿰뚫을 것처럼 살벌하다. 희게 질린 동료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그, 그게. 확인되지 않은 외지인이 들어왔다기에 살피는 중이었습니다. 요즘 수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있어서요.”

드루쉬아는 세 사람을 빠르게 살폈다. 야외용 부츠를 신고 긴 바지와 긴 팔 셔츠에 조끼를 입은 것이 간단하지만 평민의 옷차림은 아니었다.

“그 대답은 조무래기 말고 책임자가 나서서 해야 할 것 같은데?”

드루쉬아의 시선이 세 사람을 넘어 어두운 숲속으로 향했다.

쥐죽은 듯 고요하던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그늘에 숨어있던 인영이 다가왔다.

“검을 거둬주시면 좋겠습니다.”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만큼이나 서늘하게 다가왔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중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셔츠 위에 단정하게 맨 크라바트, 사냥용 코트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옷차림에 품위 있는 걸음걸이는 분명 귀족의 것이었다.

상대는 예리한 시선으로 드루쉬아를 살피고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을 확인했다.

“탈리온 공작님이 아닙니까?”

“나를 아는가? 나는 만난 적이 없는 얼굴인데?”

“훤칠한 외모를 소문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기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올 만한 분이 탈리온 공작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검을 든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남자는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신분은?”

“레서스 폴라드린입니다.”

“폴라드린 백작이로군.”

신분을 확인하고 드루쉬아는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드루쉬아가 검을 거두자 나머지 기사들도 검을 거뒀다.

바닥에 깔려있던 남자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을 맞은 동료를 부축했다. 드루쉬아는 물러나는 세 사람을 보며 차게 말했다.

“부상은 미안하게 됐어.”

“저희가 조심성이 없었던 탓입니다.”

접근이 불가한 상대를 가까이서 감시하고 들킨 것은 이쪽이었다. 폴라드린 백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대공령에 속한 귀족은 기사와 병사를 키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텐데?”

“자경단일 뿐입니다. 탈리온과 이그레인의 병사들이 치안까지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요.”

폴라드린 백작은 질문을 유연하게 넘겼다.

기사를 양성하는 것이 금지되어서 기사 서임을 할 수 없는 대공령의 귀족들. 그렇다고 기사의 명맥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탈리온 기사들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드루쉬아도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니 그렇게 믿어주면 될 일.

“숙소를 못 구해서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째서 공작님께서 신분을 감추고 오신 겁니까?”

“그새 소문이 거기까지 갔나? 눈과 귀가 많은가 보군.”

“폐쇄적인 곳이니까요.”

“수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는 뭐지? 탈리온과 이그레인은 가문의 정복을 입고 다닐 테니 우리 쪽 사람들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말 그대로입니다. 목적이 불분명한 외지인들이 최근 늘었습니다.”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유입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군.”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드루쉬아는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더듬었다.

대공령으로 진입하는 요소요소에는 모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거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감시를 피하려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길이 없는 험준한 산을 통과해야 하는데 둘 다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힘들여 오는 거라면 최소한 등짐 지기 장수들은 아니겠어.”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유심히 살피던 중입니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폴라드린 백작의 시선이 아시카에게로 옮겨갔다.

“일행 중에 여성분이 계시는군요. 기사님은 아닌 것 같고,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아, 저는….”

아시카가 입을 열려고 하자 드루쉬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까부터 그녀에게 향하던 시선이 못마땅했던지 슬며시 앞을 가로막았다.

“그저 우연히 합류한 내 동행일 뿐이야.”

노골적인 경계에 백작의 표정이 유하게 풀어졌다.

“너무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조합이 흔치 않아서 말입니다. 혹시 수도에서 오셨다면 그런 외모를 지닌 귀족 레이디가 한 분 생각나는데….”

드루쉬아에게 가려졌어도 백작의 시선은 여전히 아시카 쪽으로 향해있었다.

“이그레인 소공작께서 특이하게 그런 외모를 가졌다더군요. 물론 탈리온 공작님과 사이좋게 여행 다닐 분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만.”

떠보는 어조가 노골적이었다. 미하일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의 반응이 미묘한 것을 보고 폴라드린 백작은 확신하는 눈치였다.

“만약 이그레인 소공작님을 만난다면 한 번쯤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그분께서 잘 아실 테고.”

“백작의 감사 인사는 내가 대신 전해주도록 하지.”

이그레인 공작가에서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지원이 아니었다면 대공령은 더욱 피폐해졌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봉쇄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대공령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데는 그런 뒷배경이 있었다.

탈리온은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이그레인은 끝도 없는 재력을 퍼부어 유지되는 대공령. 그것이 씁쓸한 현실이었다.

드루쉬아는 이 만남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하지. 나는 백작을 본 적이 없고, 내 기사들도 마찬가지야.”

물끄러미 그를 보던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울 뒤를 조심하라. 이면에 닿는 손은 현재에 머물지 못할지니.’”

“무슨 뜻이지?”

“대공령은 시간이 멈춘 곳입니다. 40년 전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요.”

어쩐지 공허하게까지 느껴지는 어조였다. 밑도 끝도 없는 아리송한 이야기에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리둥절한 기사들의 반응을 보며 폴라드린 백작은 담담히 인사를 건넸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말을 마치는 동시에 백작과 그 일행은 어둠 속에 스며들 듯 조용히 사라졌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을 바라보며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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