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불안한 기분은 도시로 들어서면서부터 점점 더 커져갔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요.”
“대공령에 속한 도시 중에서 이곳이 가장 번화하지. 버려진 마을도 적지 않은데, 그나마 여긴 나은 편이야.”
아시카의 탄성에 드루쉬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시가지로 들어서면서부터 따라붙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외지인이 분명한 옷차림을 보고 사람들이 연신 흘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경계는 여관 건물에 도착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드루쉬아 일행이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안쪽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의 대화가 뚝 끊기고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뭐하러 오셨소?”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주인이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디서 왔느냐’도 아니고 ‘뭐하러 왔느냐’는 질문이 이상하다.
“방이 없나?”
“상단이요?”
드루쉬아의 질문을 주인은 질문으로 받았다. 누가 봐도 드루쉬아 일행은 상단과 거리가 멀었다. 건장한 체격에 각 잡힌 자세와 무장은 가문의 문양이 보이지 않아도 기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미하일이 나섰다.
“급하게 이그레인 영지로 가야 해서 여기를 관통하게 됐습니다. 빈방이 있습니까?”
“없소.”
여관주인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정말 없습니까? 여행자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요.”
미하일이 황망한 얼굴로 식당이 있는 홀을 둘러보았다.
“상단도 아니고, 공무로 온 것도 아닌 외지인에게 내줄 방은 없소.”
주인은 그 말만을 남기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면전에서 거절당한 드루쉬아 일행은 말을 잃었다. 생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 없기는 아시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을 찾아보지.”
드루쉬아의 손짓에 나일과 기사 둘이 먼저 건물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안에서는 숙소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뜬금없이 찾아든 여행자를 극도로 경계하며 방이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처음부터 신분을 밝혔다면 아무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을 감추고자 옷까지 갈아입었는데 이제 와서 탈리온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수도에서 대공령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야. 아무래도 숙소를 구하기는 어렵겠어.”
드루쉬아가 난감한 얼굴로 아시카를 돌아보았다.
“도시 밖으로 나가죠. 야영지를 찾는 게 좋겠어요.”
“괜찮겠어?”
드루쉬아의 눈에 아시카는 전형적인 귀족 레이디였다. 낯선 사내들과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관없어요. 야숙이 처음도 아니고. 분위기로 봐서는 여관에 머문다고 해서 안전할 것 같지도 않네요.”
그 말에는 드루쉬아도 동의했다. 이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차라리 상단과 함께 오는 것이 좋을 뻔했어.”
아시카와 동행했던 상단을 먼저 보내버린 걸 뒤늦게 후회했다.
드루쉬아 일행은 결국 숙소 구하는 걸 포기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려서 도시를 나갈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밤이 한참 깊어진 뒤에야 야영할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주변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숲길 안쪽. 짐승이나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서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숲이 으스스하군요.”
“분위기가 좀 그렇긴 하네요.”
미하일의 푸념에 아시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꺼림칙해 하는 것은 두 사람뿐, 나일이나 기사들은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살피고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먼지바람이 많이 불어서 숲이 그나마 나아요. 여기를 벗어나면 자는 내내 흙먼지를 뒤집어쓸 거예요.”
나일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땅이 메말라 있었다. 지금 들어와 있는 숲도 가지 끝이 누렇게 타들어 가는 나무가 적지 않았다.
주변에 위험한 짐승이나 둥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야영지를 만드느라 모두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레이디 이그레인, 이것 좀 드십시오.”
기사가 건네준 것은 따뜻한 차였다. 야영지가 준비되는 동안 기다리는 아시카를 위해 끓인 것이다.
아시카에게 차를 건넨 사람은 수도에서 종종 본 적이 있는 기사였다. 기사가 되기 위해 이그레인과 탈리온 두 곳을 두고 고민하다가 탈리온으로 가게 되었다고.
그래서인지 아시카에게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찬바람이 도는 탓이다. 아시카가 몸서리치는 걸 보고 나일이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건넸다.
“아가씨, 잠자리는 이쪽에 준비했으니까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쉬세요.”
나일이 건넨 담요는 아시카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드루쉬아가 낚아챘다.
“아시카가 왜 그쪽 옆에서 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못 위협적이다. 드루쉬아는 매서운 시선으로 나일을 노려보았다.
“제가 아가씨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그 몸으로?”
새파란 눈동자가 나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나일은 평범한 키에 남자치고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그렇다 보니 함께 있는 기사들에 비해 왜소한 느낌이었다. 기사 중에서도 특히나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드루쉬아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었다.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시선에 나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말 만한 덩치로 아가씨나 위협하는 기사들보다는 쓸모있는 몸뚱이를 가졌거든요?”
“지금 내 기사들을 모욕하는 건가?”
“말만 요란하지 정작 검 한번 휘두를 줄 모르던데요?”
“그거 애거나이트를 말하는 건가?”
두 달 전, 나일이 애거나이트의 약을 바짝 올려 싸울뻔하다가 무마된 적이 있었다. 드루쉬아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애거나이트가 탈리온의 기사단장이라는 건 알아?”
제국의 검이자 국경을 수호하는 기사의 가문 탈리온. 탈리온에는 다섯 개의 기사단이 있었고 그 다섯 명의 기사단장 중 하나가 애거나이트였다.
그러나 나일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피식,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는 걸 보고 가까이 있던 기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런 무도한 놈이 있나!”
발끈한 기사들과 달리 드루쉬아의 눈에는 이채가 어렸다.
“배짱이 두둑하네. 애거나이트가 우스울 정도면 내가 무섭지도 않겠어?”
심드렁하던 나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앞에 둔 아이처럼 단조롭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세상 겁 없는 건 제가 아니라 탈리온 공작님이 아닌가요?”
‘하, 요놈 봐라.’
처음부터 깐족거리며 시비를 걸어대더니 이걸 원한 거였나.
그렇지 않아도 아시카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거슬렸다. 아시카 역시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어서 더 꺼림칙한 놈이었다.
전 약혼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남자를 내외하는 줄 알았더니 그 반대였다. 다른 레이디들과 다르게 기사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는 느낌이랄까.
“내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산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말하니까 꼭 자네가 무서운 꼴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어디 감히 공작님께 댈 게 있겠어요?”
태도는 예의 바르지만 말하는 어조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었다. 속을 살살 긁어 머리 꼭대기까지 짜증이 치밀어오르게 만드는 놈이었다.
‘애거나이트가 뒷목 잡을 만하겠어.’
그러면서도 나일의 눈동자는 드루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내가 무서워서 감히 나대지는 못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나?”
나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지금 저를 약 올리시는 겁니까?”
“시작을 누가 했는데 그래?”
가만히 지켜보던 아시카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울 거리도 없는데 왜 둘이 다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기, 두 사람. 그만….”
“누가 겁이 없는 건지 확인해볼까?”
“그거 좋죠.”
“르쉬아!”
아시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드루쉬아와 나일은 서로에게 못 박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일, 여기까지 와서 무슨 짓이야. 둘 다 그만둬.”
당황한 기사들도 일손을 놓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드루쉬아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난감한 얼굴로 멈춰섰다. 그는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일에게 손짓했다.
“너, 이리 나와.”
“르쉬아!”
아시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드루쉬아가 정말로 나일의 도발에 넘어갈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종일관 여유로워서 흘려넘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예 검을 들고 붙자는 유치한 요구를 할 줄이야.
나일은 망설이지 않고 아시카를 지나쳐 갔다.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지 조금 전까지 화내던 얼굴은 사라지고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아시카가 나서려고 하자 미하일이 앞을 막았다.
“죄송합니다만, 레이디 이그레인. 놔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 둘 좀 봐. 검까지 빼 들었어!”
“각하께선 기사니까 당연한 노릇이고, 뭐 네드로프 공자도 알면서 덤비는 거 아닙니까.”
“같은 편끼리 싸우긴 왜 싸워. 나를 말릴 게 아니라 저쪽을 말려야지.”
아시카에게 검은 무서운 흉기였다. 상대를 해치고 목숨을 앗아가는 흉기. 그런 것을 소중한 사람에게 꺼내 드는 것은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겁먹지 마세요. 탈리온에서는 훈련 때마다 하는 일입니다.”
“이건 훈련이 아니잖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저 둘이 서로 죽자고 달려들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하면서도 미심쩍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부러 태연한 척했다.
아시카가 미하일을 밀어내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챙, 하는 금속음이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야영지 한복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