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아시카의 채근에도 드루쉬아는 식사가 먼저라며 얘기를 미뤘다. 침실에서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먹고 차를 다 마실 때까지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침내 아시카가 화난 얼굴로 입을 꼭 다물자 슬며시 그녀를 살폈다.
“오는 동안 힘들지 않았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은근히 딴청을 피웠다. 아시카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걸 보며 살며시 웃음을 짓는다.
‘이 남자가 진짜.’
아쉬운 건 그녀였기에 할 말이 많아도 꾹 참을 수밖에. 아시카는 속내를 감추며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차로 편히 왔는데 힘들 게 뭐가 있나요.”
“시중드는 하녀도 없었잖아. 동행이라고는 달랑 하나….”
문득 나일을 떠올리고 드루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일이라는 그놈하고 친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아시카는 이게 또 무슨 트집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놈하고 단둘이 여행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그럼 호위도 없이 나 혼자 다녀야겠어요? 누구 덕분에 제 호위들은 모두 조부님께 발이 묶여버렸단 말이죠. 본인이 저질러놓고 그새 잊었어요?”
아시카의 통렬한 지적에 드루쉬아는 입을 다물었다. 못마땅하지만 당장 걸고넘어지기에는 여러모로 그가 불리했다.
아시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말했던 부탁, 이제는 들어줄 생각이 드나요?”
“그래, 말해봐.”
마주한 테이블 너머 드루쉬아의 표정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렇게 결연한 표정을 짓는 걸까, 아시카의 면면을 살피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아시카도 망설였다. 원래는 나일의 도움을 받아 실행하려던 일인데 그보다 좋은 선택지가 눈앞에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드루쉬아였다.
아시카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혹시, 대공성의 열쇠에 대해 알아요?”
한껏 긴장해있던 드루쉬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쇠? 그게 무슨 소리지?”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얼굴이었다.
“들어 본 적 없어요? 정말?”
드루쉬아의 이마가 미묘하게 구겨졌다. 정말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숨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살폈다.
“난 가끔.”
커다란 손이 깔끔하게 면도한 턱을 쓸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제 뜻을 전달할 수 있을까, 조금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엉뚱한 일을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웃을 수가 없잖아.”
‘모르는구나.’
그녀가 본 시간대에서 드루쉬아가 알고 있던 것을 현재의 드루쉬아는 모른다.
“당신이 말하는 ‘열쇠’가 뭔지 말해주면 찾아보도록 애쓸 수는 있어.”
최대한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예전의 드루쉬아 같으면 어디서 흰소리냐고 한 번쯤 비웃었을 법도 한데.
“부탁 들어주기로 한 거 잊지 마요.”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까부터 아시카의 손끝이 끊임없이 옷자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몇 번을 달싹이던 입술이 망설이던 끝에 마침내 원하는 바를 입에 올렸다.
“대공성에 가보고 싶어요.”
드루쉬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요구였다.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가겠다는 거야?.”
“왜, 안 되나요?”
“몰라서 물어? 황명으로 폐쇄된 곳이야. 거기에 들어가는 자체가 이미 반역이라고.”
“부탁…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황망하다 못해 화가 나려고 한다. 대체 이 여자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탈탈 털어 확인해보고픈 욕구가 치밀었다.
드루쉬아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는 걸 보면서 아시카는 더욱 초조해졌다. 이미 뱉은 말이다.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르쉬아.”
드루쉬아는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아시카가 새카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르쉬아’라고 부르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원하는 대로 뭐든지 다 해주고픈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저도 반쯤은 미친 게 아닐까.
‘젠장, 이건 아니잖아.’
자꾸만 홀리는 기분이 드는 자신을 애써 다잡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갑자기 대공성이라니.”
드루쉬아의 채근에도 아시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를 묻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대공성의 무언가가 이그레인과 탈리온, 두 가문을 멸문으로 밀어 넣을 거라고. 그러니 확인해야 한다고. 굳게 봉쇄되어있는 대공성 안쪽에 뭐가 있는지.
그녀가 겪은 환각은 망상이 아니었다. 형태만 다를 뿐 잠재되어있는 위협은 언제든지 튀어나와 모두를 물어뜯어 파멸로 몰고 갈 수 있었다.
“당장 이유를 말하기는 어려워요.”
“그럼 나더러 이유도 모른 채 황명을 거역하는데 협조해달라는 말인가?”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해요.”
얼마나 억지로 들리는지 안다. 그러나 아시카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이곳까지 달려왔다. 이그레인이라는 이름도,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리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려고 나일하고 단둘이 여기까지 온 건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드루쉬아가 거절하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지를 생각이라는 것도.
아시카의 아슬아슬한 눈빛에 심장이 덜걱거렸다. 대체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걸까. 그녀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드루쉬아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이러는 거지?”
“거래를 원한다면 뭐든 할게요.”
“하, 당신은 정말.”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지. 그러나 당장은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다.
드루쉬아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난 몇 달간 보여준 아시카의 변화와 그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녀의 행동과 말속에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그때부터 확 변했어.’
황궁에서 있었던 연회. 그때부터 그와의 관계가 변하고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정보를 찾겠다며 그에게 도움을 구했다.
‘연관이 있어. 그 모든 것이.’
뭔가 있는데 안개 속에 잠긴 것처럼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아시카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드루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돌연 드루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문으로 다가가 미하일을 부르는 동안 아시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미하일이 긴장된 얼굴로 찾아왔다.
“미하일, 공문서 용지 가지고 있지?”
“예? 예. 필요하십니까?”
“가져와. 지금 바로.”
“네, 각하.”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카를 흘깃 보고 돌아섰다.
‘여기까지 와서도 협의서를 쓰는 거야?’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만나 늘 하던 일이니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칼프나 미하일이 공문서 작성을 처리하고는 했으니까.
‘어째 두 분이 함께 있는 걸 보면 조마조마하단 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퍽 신기하게 유지되는 사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하일이 서류 가방을 들고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마주 앉아있었다.
“각하, 작성하실 서류가 있으면 기록할까요?”
“아니, 그냥 줘.”
미하일이 드루쉬아에게 빈 문서를 넘기고 익숙하게 잉크와 펜을 준비했다.
비침무늬가 들어가서 위조가 거의 불가능한 탈리온의 공식 문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백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왜?’
아시카가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드루쉬아는 백지를 그녀 앞으로 슥 내밀었다.
“뭐죠?”
“서명해.”
“…네?”
반문한 것은 미하일이었다. 아시카는 무슨 소린지 이해되지 않아서 두 눈만 깜박였다.
“서명하라고.”
드루쉬아의 채근에 아시카는 종이를 들어 앞으로 뒤로 확인해보았다. 분명 백지가 맞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나. 아시카는 그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협의할 게 있나요? 아니면 요구사항이라도? 적어주면 서명할게요.”
“그걸 나도 모르니까 백지를 준 거잖아.”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자신이 생각해도 퍽 마음에 드는지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까 정리해줄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 여기에 서명을 하는 거야. 그건 이그레인의 소공작 아시카 이그레인의 권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동의한다는 의미이고.”
백지 동의서였다. 그 내용이 뭐가 될지는 전적으로 드루쉬아의 재량에 달렸을 테고.
그제야 의미를 알아듣고 미하일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아시카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역시 르쉬아답구나.’
이 순간에조차 자신이 얻어갈 최상의 결과물을 가져가려 한다. 차라리 그것이 기꺼워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왜? 못하겠어?”
“아뇨.”
아시카는 다급히 대답했다.
지금 두 사람이 계획하는 일은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을 만큼 중죄였다. 위험부담을 따지자면 아시카보다 현재 공작의 위치에 있는 드루쉬아가 더욱 위험하다.
아시카의 펜이 백지 위에 유려하게 선을 그렸다. 서명이 완성되는 것을 보면서 드루쉬아의 입꼬리는 더욱 높게 올라갔다.
마침내 서명을 마친 종이를 건네자 드루쉬아는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었다.
“내가 이 문서로 뭘 요구할 줄 알고 겁 없이 서명을 해?”
“그래 봤자 나 하나잖아요.”
“무슨 말이야?”
“후계자라고 한들 작위도 없는 귀족 레이디일 뿐이죠. 문제가 생기면 저 하나만 감당하면 되니까요.”
“아아. 그렇긴 하지.”
가문에서 아시카를 내치면 충분히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기면 그녀 혼자 다 뒤집어쓰고 가겠다는 말이었다.
드루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시카가 스스로의 안위를 내던질 만큼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차차 알아볼 수밖에.’
달랑 서명 하나만 있는 문서는 조심스럽게 미하일의 손에 넘어갔다.
“절대 잃어버리지 마.”
드루쉬아는 두 눈을 부릅뜨며 미하일에게 당부했다. 혹여 조금이라도 상했다가는 당장 보좌관을 씹어먹을 기세로.
“네…, 각하.”
미하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류 가방에 서명한 문서를 넣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아시카가 입을 열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내내 고민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환각에 빠졌던 날, 드루쉬아는 뭘 하고 있었을까.
“내가 저택에 갇혀있을 때, 그믐달이 뜨던 밤에 혹시 이그레인 저택에 왔었나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미하일이 시선을 피했고 드루쉬아는 입을 다물었다.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설마…, 정말 다녀간 거예요?”
“거기까지는 소문이 안 났나 봐?”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중얼거리는 어조가 불퉁하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대체 왜….”
“생각해봐. 나 때문에 당신이 감금되었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뭘 어쩌려고 집까지 찾아온 거예요? 그 시간에?”
“일단 얘기를 해보고….”
“해보고?”
의자에 앉아있던 자세가 불편한 듯 드루쉬아가 몸을 들썩였다.
“영 답이 안 나온다 싶으면 데려가려고 했지.”
“납치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데려가는 게 왜 납치야? 사랑의 도피라면 모를까.”
드루쉬아의 대답은 당당했다. 너무 당당해서 아시카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미하일조차 벌게진 얼굴을 제 손에 묻었다. 창피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저, 각하. 이제 저는 필요 없으시면….”
“나가봐도 돼.”
드루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미하일이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문밖으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드루쉬아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요?”
또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해올지 아시카는 바짝 긴장했다. 관계가 변했다고 해서 사람까지 변하는 건 아닌데, 번번이 허를 찌르는 남자라는 걸 알면서 저도 모르게 방심했다.
“나일이라는 놈은 두고 가.”
“르쉬아, 그건.”
“그는 외부인이야. 당신과 나는 이그레인과 탈리온의 이름으로 책임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는 아니야. 그런 놈을 데리고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
아시카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며 드루쉬아가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당신 호위만 남겨두겠다는 게 아니야. 탈리온의 누구도 모르게 들어갈 거야. 오로지 당신과 나, 단둘만 들어갈 거라고.”
“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탈리온이든 이그레인이든 말이 샐 여지를 처음부터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공성은 탈리온의 병사들이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장소. 단둘이 조용히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는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좋겠네요.”
아시카는 자신이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드루쉬아가 감수해야 할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런데, 대공성에 들어가는 날짜를 제가 정해도 될까요?”
“날짜까지 지정해서 들어가야 해?”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에 드루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돌아오는 그믐달이 뜨는 날이면 좋겠어요.”
“그믐달이 뜨려면 일주일 가까이 남았는데.”
“시간이 부족할까요?”
“아냐, 여기부터 대공성까지는 나흘 거리밖에 되지 않아. 이유는 물어봐도 대답 안 해주겠지?”
아시카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드루쉬아는 은근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뭐 좋아. 일단 하겠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두고 보자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느른하게 웃는 드루쉬아의 표정에 아시카의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뭘 더 요구하려고.’
겁 없이 서명한 백지 문서가 뒤늦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이대로는 못 갑니다.”
나일은 돌아가라는 드루쉬아의 지시에 강하게 반발했다. 대놓고 거부하는 태도에 드루쉬아의 낯빛이 굳어졌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가신의 도리가 아닌가?”
“언제부터 제 주인이 탈리온 공작님이 되셨죠? 설령 아가씨가 공작님과 결혼한다 해도 제가 공작님을 모실 일은 없거든요?”
곁에서 지켜보던 미하일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가라면 갈 것이지 웬 말이 많아?”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정도의 입은 달고 살아서 말이죠.”
“하.”
드루쉬아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며 아시카는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이그레인 저택에서조차 아무도 나일을 당해내지 못했다. 어찌나 입담 좋게 약을 올리는지. 그를 못마땅해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몇 마디 말을 섞어보고 뒷목을 잡고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태도가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뿐.
“네드로프 자작가의 장남이라고 했나? 기사서임은 받지 않았다고 들었어. 무슨 자격으로 아시카의 곁에 있는 거지?”
“지금 제 주인의 판단을 의심하는 건가요? 그걸 따져 물을 사람은 이그레인 소공작님이지 탈리온 공작님이 아닙니다만.”
“완전히 겁을 상실했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위로 찍어누르는 건 비열한 짓이죠. 힘이 넘쳐난다고 레이디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짓처럼 말입니다.”
“아하.”
나일의 태도가 내내 눈에 거슬린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보기보다 뒤끝이 길어.”
“처벌은 제대로 하셨나요? 저에게 가신의 도리 운운하기 전에 공작님의 가신들부터 관리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처벌로 꽤 험한 일을 하라고 내보냈지. 근데 이게 그쪽이 따져 물을 일은 아니잖아?”
“왜 아니겠어요. 제 눈앞에서 아가씨께 대형 사고가 날 뻔했는데.”
그걸 여태껏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대놓고 드루쉬아에게 불만하는 것도 놀라웠다. 아시카도 말리지 못하는 걸 보니 보통 놈은 아니었다. 아니, 아시카의 표정을 보아하니 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시카가 휘둘리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미아에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를 밖으로 내돌렸다고 심한 말을 쏟아냈다고 했었다.
‘묘한 놈이네.’
여관의 마구간 앞에서 대치가 길어지자 점원이 나와 주변을 기웃거렸다. 드루쉬아와 나일 모두 좀처럼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아시카가 나섰다.
“르쉬아, 내 말대로 해요. 탈리온의 기사들도 함께 움직이잖아요. 대공령까지는 나일이 함께 갔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돌아보는 드루쉬아의 시선이 매서웠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자신인데 왜 나일의 손을 들어주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시카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언제나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쪽은 나일이었다. 그것은 약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신뢰의 문제였다.
대공령으로 오기 전 아시카는 약속을 했고 일방적으로 나일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드루쉬아는 나일을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황명을 어기고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건 나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드루쉬아에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드루쉬아가 결국 한발 물러났다.
“좋아. 일단은 함께 가지.”
아시카는 티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준비를 마친 탈리온의 기사들도 각자의 말을 마구간에서 끌어냈다. 모두 옷을 갈아입었는지 탈리온의 문장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가린 건가, 하는 생각에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신분을 감추는 거죠? 대공령을 하루 이틀 오간 게 아닐 텐데요.”
드루쉬아는 아시카가 먼저 말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말을 끌어냈다.
“주둔지에 머무는 것과 대공령의 도시로 들어가는 건 문제가 달라. 당신 같으면 40년 동안 자신들을 감시하고 길을 틀어막은 가문의 기사들이 거리를 활보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적지를 차지한 점령군이 아니야. 그렇게 무도하게 권력을 휘둘렀던 적도 없고. 하지만 대공령의 주민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고 우리가 피해 입히지 않으려고 애써도, 저들 눈에 우리는 황제의 충견일 뿐이니까. 미워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씁쓸한 이야기였다.
문득 아시카의 환각 속에서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대공령을 비밀리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현실에서도 그럴까.’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역시 황명을 거역하는 것이 될 테니.
“우리는 탈리온 영지로 가는 행렬에서 중간에 빠질 거야. 최대한 조용히 들어갈 예정이야.”
“대공성에 주둔하고 있는 건 탈리온의 병사들이 아닌가요?”
“대공성 근처에서 우리 둘이 모습을 보여봐야 좋을 게 없어. 당신은 여기 안 온 거고, 나는 이대로 영지로 간 걸로 해야지.”
드루쉬아의 뜻을 이해하고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령 검문소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아시카와 드루쉬아는 마침내 검문소를 통과했다. 탈리온의 기사 여덟 명과 나일까지 더해서 총 열 한 명의 인원이 대공령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메마른 갈대숲을 끼고 길을 따라가기를 반나절, 검문소 옆에 있던 로샤강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높은 둔덕 위에서 아래로 펼쳐진 길을 보며 아시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땅이 메말랐네요.”
“이렇게 보면 원래 이 땅이 사막이었다는 말도 믿어질 것 같아.”
“이대로 방치된다면 결국 사막이 되겠죠.”
나일이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더했다. 말과 달리 청회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갔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잠시 나일에게 머물렀다.
‘누구를 향한 적의일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시카는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드루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일이 말을 재촉했다.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양옆으로 버려진 농지들이 보였다. 땅이 쩍쩍 갈라져서 농사는커녕 잡초조차 자라기 어려운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훗날 봉쇄가 풀린다 한들 재기가 가능할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설마 대공령 전체가 다 이렇지는 않겠죠?”
“그러면 사람이 살 수가 없지. 도시나 작은 마을이 있는 곳은 그나마 나은데 대공령 안쪽에서부터 땅이 불모지가 되어가고 있어. 정말 이대로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이 정도만 해도 타격이 클 것 같네요.”
서류상으로만 보고받고 일을 처리해왔던 아시카에게 대공령의 현실은 충격이었다.
“40년 전에 비하면 인구가 반으로 줄었다고 해.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마도 탈주… 한 거겠죠?”
아무리 반역을 저질렀다 해도 인구의 절반을 몰살시킬 만큼 선황제가 미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아시카는 그리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조금 떨어져서 주위를 살피던 기사 중 하나가 드루쉬아에게 다가왔다.
“각하,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길에서 한참 떨어진 능선에 세 사람이 말을 타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이라는 것만 확인될 만큼 먼 거리였다.
“저쪽에 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따라오는 거죠?”
“아마 대공가에 속했던 귀족일 거야. 접촉이 금지되어 있어서 가까이 오지 못하니까.”
“아.”
들은 적이 있었다.
40년 전 대공성이 함락될 때 대공가의 가신 가문이 모두 멸문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단과 병사를 보유한 가문만이 반역죄로 사형당하고 그 외의 가문들은 가주가 선황제에게 충성맹세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선황제가 자비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대공령의 귀족들을 모조리 멸문했다가는 관리가 되지 않는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살아남은 귀족 가문들은 대공령이 봉쇄될 때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금지당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적나라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울컥했다.
“잔인하군요.”
아시카의 한숨 섞인 토로에 드루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이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대신했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무려 반역죄야. 그게 없던 일이 되지 않는 한 대공령이 황실에게 미움받지 않을 도리는 없지.”
“차라리 대공령을 쪼개서 새 주인을 찾는 게 낫겠어요.”
“그러기에는 살아남은 귀족들이 너무 많아. 40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원한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고는 해도 처리가 너무 어설펐던 게 아닌가요?”
“뒷일 따윈 생각 안 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일단 틀어막은 수준이지.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야. 어차피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이그레인과 탈리온에게 떠넘겼으니 황실로서는 급할 것도 없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동안은 다른 귀족들도 섣부르게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이 나서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오래도록 곪아있던 상처가 터지면 어떤 파란이 일게 될지는 예측 불허.
‘어쩌면 환각 속에서 벌어진 일은 이 모든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서 생긴 걸지도 몰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문제. 거기에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휩쓸려 희생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쪽에서 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던 말들이 점점 거리를 좁혔다. 작게나마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볼 수는 있는데 서로 말을 섞을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아시카의 시선이 점점 가까워지는 상대에게로 향했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훤칠하게 큰 키와 체격이 남자인 것 같았다.
“아시카. 관심 두지 마.”
한눈팔다가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드루쉬아가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아시카의 시선은 자꾸만 멀리서 따라오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아시카.”
결국 드루쉬아가 나서서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밖에서 다닐 때처럼 생각하면 안 돼. 대공령은 바깥과 완전히 달라.”
“애도 아닌데, 내 몸 하나는 간수 할 수 있어요.”
“대공령에 처음 와보잖아. 여기 있는 동안은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
드루쉬아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령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예측할 수 없기에 위험한 곳이었다.
“내 말 듣지 않으면 이대로 대공령을 나갈 거야.”
“알았으니까 협박은 하지 마시죠.”
겨우 시선 좀 줬을 뿐인데 유난스럽게도 굴었다.
드루쉬아는 말을 재촉하는 아시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멀리서 따라오는 상대를 확인했다.
아시카를 괜히 데려온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