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검문소에는 통과 업무가 재개되었다. 상단은 허가증을 돌려받았고 내일 아침 검문소 문이 열리는 대로 대공령에 진입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드루쉬아의 숙소는 검문소 근처에서 마을 안쪽으로 옮겨갔다. 나일에게는 이번에도 감시가 붙었고, 아시카는 드루쉬아와 나란히 붙은 방을 안내받았다. 물론 아시카가 그 방에 들어설 때 드루쉬아도 뒤를 따랐다.
여관 건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가장 크고 좋은 방. 귀족들의 저택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커다란 침대를 갖춘 침실과 별도의 응접실과 욕실까지 딸려 있다. 아시카는 후드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제야 아시카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여행자용 바지와 긴 부츠, 체구보다 조금 큰 상의가 헐렁하다. 편한 옷차림이지만 재질은 최상급이었다.
하나로 땋아서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은 긴 여행길에도 여전히 윤기가 흘렀다. 흙먼지가 거의 묻지 않은 부츠를 보니 여행길이 고되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드루쉬아는 문가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아시카의 옷차림과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문을 지키고 선 것은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혹시 그녀가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행동.
정신없이 뒤를 쫓아온 것이 무색하게도 드루쉬아는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시카가 가출까지 감행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그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화가 났나?’
화가 났을 테지. 저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되었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새삼 깨달았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겠는데 아시카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밤을 새울 기세라서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드루쉬아였다.
“미안하게 됐어. 내 선에서 해결할 작정으로 벌인 일인데,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아시카의 시선은 바닥 언저리에 머물렀다. 얼굴조차 보기 싫은 걸까. 초조하고 불안해서 드루쉬아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이그레인과 탈리온이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죠.”
빈정거리는 것이 아닌 담담한 어조. 드루쉬아의 심장 어딘가가 날카롭게 베이는 느낌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시카를 오래도록 지켜봐 왔지만 이렇게까지 차디찬 모습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으르렁거리던 때조차 이렇게까지 냉랭하지는 않았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드루쉬아의 침잠한 어조에 마침내 아시카가 그를 돌아보았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은색의 눈동자.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느껴진다. 그 까마득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지난 한 달간 벌어졌던 일들이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나 혼자 미친놈처럼 날뛴 건가.’
동요한 것도 분노한 것도, 속을 태우는 것도 자신뿐인가. 초조하게 애달파 하던 마음이 동요 없는 시선에 사정없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와 함께 있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더 확실히 손에 넣고 싶은 욕심에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청혼서를 보냈다. 아마도 아시카가 언제든 저에게서 등 돌릴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탁이 있어요.”
아시카는 애타는 그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흘려들은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지 그조차 알기 어려웠다.
“부탁?”
“들어줄 수 있어요?”
드루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저에게는 관심 한 자락 보이지 않는 여자가 다짜고짜 부탁이란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어요.”
“하.”
이게 무슨 망발이지? 사라졌던 몇 주 동안 아시카는 좀 더 뻔뻔해진 모양이었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야속하기도 하고, 애타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면서까지 말하는 부탁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절로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부탁하는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어. 그렇게 말하면 부탁이 아니라 요구가 되잖아.”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들어줄래요?”
무덤덤한 어조가 또다시 그의 심장을 후벼팠다.
이 여자는 정말 아무 느낌도 없는 걸까. 자신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간신히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하라면 다 할 건가?”
그를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드루쉬아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무엇일까. 아니면 뭐가 이토록 그녀를 절박하게 만든 걸까.
드루쉬아는 그녀를 잡으려고 움찔거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퍼런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주어 쥔 손이 저릿하다.
자신의 자제력에 쩍쩍 금이 가는 환청이 들렸다. 뭔가 저지르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그런데도 아시카를 계속 눈앞에 두고 싶다는, 정확히는 제 품에 가두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내가 무슨 요구를 할 줄 알고?”
“그게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할게요.”
들들 끓어오르던 감정이 어느 한계점에 다다라 툭, 하고 이성의 끊을 잘라버렸다. 짙푸른 눈동자에 열기가 넘실거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성큼 다가간 드루쉬아가 아시카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들어 올렸다.
“흡….”
순식간에 뒤엉킨 숨결 너머 잔잔한 들꽃 향기가 풍겨온다. 아시카의 향기였다.
아시카는 짓누르듯 달려드는 힘에 떠밀려 뒷걸음질 쳤다. 밀리고 밀려서 그녀의 뒷머리가 벽에 닿을 때까지 드루쉬아의 입술이 잡아먹을 듯이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감정 없는 인형인 양 차디차던 아시카의 몸이 반응했다. 자철에 붙는 날붙이처럼 그녀의 몸이 드루쉬아의 단단한 몸을 휘감는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이, 그의 다리와 뒤엉킨 말랑한 여체의 감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 짧은 순간에도 드루쉬아는 안도했다.
아시카가 반응하는 것이 설령 제 몸뿐 이라 해도. 조금 전처럼 동요 없는 인형 같은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심장이 쓰리고 아프지만 그조차 감수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절박한 마음이 드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절대 아시카의 손을 놓지 못하리라는 것을.
* * *
푸르스름하게 스며들던 새벽빛이 점점 밝아지며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시간. 선이 뚜렷한 남자의 얼굴에서는 밝은 금발과 햇살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빛이 흘렀다.
평화롭게 보이는 드루쉬아의 얼굴에 한참 전부터 아시카의 시선이 머물렀다.
숱 많은 눈썹과 그 아래 우묵하게 들어간 뚜렷한 눈매, 날카롭게 뻗은 콧날과 붉은색의 도톰한 입술. 수려한 외모에도 굵은 선을 지닌 얼굴은 강인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편히 잠든 얼굴을 보는 것이 무려 한 달 만이었다.
‘얼굴이 까칠해졌어.’
어제 짐마차 앞에서 드루쉬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바로 등 뒤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치가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미래가. 그걸 위해 염려했던 것은 조부의 반대뿐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현실은 더욱 잔인했다.
이제야 웨이브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제국 내에서는 세력이 미약하나 외국에 영향력이 있다는 페리도 백작가를 택한 이유.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저택의 비밀통로를 몰래 확인하는 행동까지.
‘조부님은 여차하면 나를 외국으로 도피시킬 생각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드루쉬아와 함께하는 미래는 제게 오지 않을 행운이었다.
‘처음부터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저로 인해 가문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는데 사랑 타령이라니. 제게 주어진 현실이 너무 가혹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한없이 가라앉는 아시카의 상념은 노크 소리에 중단되었다.
“각하, 깨어 계십니까?”
“아니, 조금 있다가 와.”
꽉 잠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시카는 그가 깨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단단한 팔이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다시 눕혔다. 아시카의 시선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
“또 어딜 가려고.”
드루쉬아는 그녀의 양팔을 잡아 누르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잠기운이 하나도 없는 눈동자였다.
“여기저기 내 흔적이 잔뜩이야.”
그의 시선이 붉은 자국이 나 있는 목선과 탐스러운 가슴살을 훑었다. 뜨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아시카는 고개를 돌렸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채 가리지 못한 하얀 나신과 바르작거리는 미약한 몸짓. 그것이 미치도록 아름답게 느껴져서 심장이 들들 끓다가도 어제까지의 기억을 생각하면 피가 차게 식는다. 번번이 그를 놀라게 하던 여자는 이번에도 그의 심장을 진창에 처박고 말았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쫓아 왔을 것 같아?”
아시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그를 마주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드루쉬아는 어제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왜 도망치려고 하는 거지?”
움찔, 그에게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앙다물어진 입술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사소한 반응이 숨기고 싶어 하는 속내를 드러냈다.
아시카는 당황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그러니 어젯밤 그녀를 덮친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드루쉬아는 새삼스럽게 안도했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놓아줄 줄 알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요.”
“청혼서를 보냈잖아. 탈리온이 이그레인에게. 그게 어떤 각오로 가능했겠어?”
“확실히 그게 이득이라고 생각했겠죠. 피할 수 없는 추문으로 우리 사이를 공식화하기 위해 청혼서를 보낸 걸 테고.”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드루쉬아의 계산을 짚어주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죠?”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아시카가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그런 계산속으로 청혼서를 보낸 것은 맞다. 하지만 선후 관계가 다르지 않은가.
“그래, 나는 원래 계산이 분명한 놈이야. 하지만 단지 그뿐이겠어? 내가 이득을 위해 자존심까지 팽개칠 만큼 부족한 인간은 아니거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말 대신 몸으로 표현하잖아. 그걸 왜 몰라.”
까만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드루쉬아가 답지 않게 빙빙 돌리는 탓에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어떤 놈인지 알잖아. 이렇게까지 정신 못 차리고 날뛰는 이유가 뭐겠어? 그게 내 진심이라고.”
아시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드루쉬아는 지금 고백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진짜라고. 단지 가문의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시카를 마음에 두고 있노라고.
아시카는 잡혀있는 팔을 빼내기 위해 비틀었다. 그러나 그녀를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거… 놔요. 아직 어제 못다 한 얘기가….”
“이것 봐. 또 빠져나가려고 하지. 내가 말했잖아. 이 관계에서 당신이 멋대로 할 수 있었던 건 시작뿐이야. 더는 당신 뜻대로 휘두르게 놔두지 않아.”
“내가 언제 당신을 휘둘렀다고.”
“그럼 아냐? 느닷없이 입을 맞추지를 않나, 몸으로 덮쳐서 사람 혼을 쏙 빼놓지를 않나. 그러고도 멋대로 연락을 외면하고, 아닌가 싶으면 또 열렬하게 나와 침대에서 뒹굴고. 그래놓고 나 몰래 딴 놈하고 결혼 준비나 하고. 청혼서를 보냈더니 아예 가출해서 잠적해버리고. 하, 말하고 보니 기가 막히군.”
그동안 아시카가 저질렀던 만행이 줄줄이 흘러나오자 검은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느 것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당신이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지? 이쯤 되면 내가 미쳐 날뛸 만도 하지 않겠어?”
“…같이, 좋았잖아요.”
“그래, 같이 좋았잖아. 그러니까 못 놔주겠다고. 이젠 알아들어?”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짙푸른 눈동자에서 집요한 열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내주지 않겠다는 집요한 의지가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아시카는 눈을 감았다.
드루쉬아가 필요하다. 그러니 그를 거부하는 것도 당장은 할 수 없었다.
“부탁이 있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 문제가 더 급해요.”
드루쉬아의 눈꼬리가 획 치켜 올라갔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어째 나보다 더해.”
불퉁한 어조였지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녀가 예전처럼 단칼에 자르거나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느낌이랄까.
아시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시선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랫도리에 단단하게 와닿는 감각을 느끼고 아시카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얘기하기로 했잖아요.”
“시간이 너무 이르지 않아?”
은근한 목소리에 담긴 의미가 노골적이어서 아시카는 있는 힘껏 팔을 비틀어 빼냈다. 이번에는 드루쉬아도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마. 진심도 아니면서.”
툭 내뱉는 말이 뻔뻔하게 정곡을 찔렀다. 정말로 할 말 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아시카는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피하며 시트를 몸에 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루쉬아가 또 달려들기 전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내내 아시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