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익숙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낯선 일들이 기억 언저리를 맴돌다 불쑥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또 그 꿈인가.’
자각몽. 그저 꿈일 뿐인데도 요동치는 심장이 다음에 이어질 일들을 예견했다.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이 피에 흠뻑 젖었다. 그의 것이 아닌 피. 온몸이 피에 젖은 채 제 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였다.
“아시카, 정신 놓지 마. 제발. 네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야.”
가문이든 뭐든 다 포기해도 좋으니 제발 그녀만은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믿지도 않았던 신을 찾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간절한 애원에도 제 품 안에 안긴 여자의 몸은 차게 식어갔다. 가늘어지는 숨결과 미약한 심장 고동. 죽음을 예고하는 모든 징후가 드루쉬아의 숨조차 끊어놓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버텨줘. 제발, 아시카.”
오열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굳게 닫혀있는 눈꺼풀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심장이 무너진다. 그를 지탱하고 있던 발밑의 세상이 무너져서 그조차 무너져내린다.
절망, 공포, 그녀를 앗아가는 세상에 대한 분노. 들끓는 감정들이 하나로 응어리져 심장을 틀어쥐었다.
“…각하, 정신을….”
아득하게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어깨에 닿는 감각을 단숨에 잡아채 꺾어버렸다.
“으아아악!”
“각하!”
털퍽, 하고 누군가의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드루쉬아는 멍한 시선으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미하일과 미간을 찡그리고 서 있는 칼프를 번갈아 보았다.
“가, 각하.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니까, 제발 제 손 좀….”
미하일의 등을 찍어 누른 것은 다름 아닌 드루쉬아였다. 불쌍한 보좌관의 팔을 뒤로 꺾어 부러뜨릴 것처럼 짓누르고 있는 것도.
“아, 이런.”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 깊이. 집무실 안으로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게 자는 걸 왜 건드려.”
드루쉬아는 미하일을 놔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하일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엎드린 채 끙끙거렸다. 칼프가 부축해주기 위해 팔을 잡자 미하일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악, 손대지 마! 아파, 아프다고.”
“쯧.”
드루쉬아는 자신이 저질러놓은 짓을 보고 혀를 찼다.
“각하, 아무래도 제 오른팔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미하일은 아픈 팔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울먹거렸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잘 훈련된 기사의 기습공격을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잠결이라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부러뜨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
“무슨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까?”
“칼프, 주치의 불러와. 미하일은 보고할 게 있었지 않아?”
드루쉬아는 진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슥 문지르며 말했다.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하일, 보고.”
“네? 네, 각하.”
가차 없는 채근이었다. 미하일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제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오늘 마이헬러 영지에 보냈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소문과 가신들의 가문에 대해 현지에서 직접 알아봤는데요.”
“그런데?”
“팜레드 거리에서 화재가 났던 구빈원 있잖습니까? 거기에 꽤 많은 지원을 하는 사람이 베일리 자작인데, 그 부인이 마이헬러 영지 출신이랍니다.”
“수도에서 제일 큰 구빈원이라 귀족들 지원을 많이 받는다면서?”
그 많은 귀족 중에 한 다리 건너 엮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의미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치료사 연합까지 줄을 대고 있는 귀족은 많지 않습니다. 베일리 자작이 그중 하나고요.”
“치료사 연합?”
“네. 구빈원 치료소를 운영하는 주축이 베일리 자작입니다.”
드루쉬아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저희가 쫓아온 단서 중 어느 하나 명확한 증거가 없습니다. 각각 따지고 보면 그냥 우연으로 치부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게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칼프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물증은 없는데 심증은 점점 더 확고해지는 상황.
모두가 잊고 있던 대공령 문제가 구빈원 화재 이후 수면 위로 떠 오르고 경마장에 난입한 대공령 환자로 인해 공포감을 조성했다. 결국 그로 인해 황제가 회의를 소집하고 귀족들이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거기다 드루쉬아를 표적으로 했던 습격 사건까지.
“당장 연관성이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만….”
칼프는 다음 이어질 말을 아꼈다. 그답지 않은 태도에 드루쉬아가 생략된 말을 뱉었다.
“왜? 마이헬러가 의심스럽다고?”
“헉.”
미하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칼프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비약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칼프의 표정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 혹시 샤프리가?”
드루쉬아가 의식이 없는 동안 샤프리는 내내 저택에 머물렀다. 다들 경황이 없었지만 칼프는 샤프리의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보고를 받았다.
칼프는 설명하기 모호한 샤프리의 행적 대신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마이헬러의 주치의가 제국 출신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마이헬러 가문에 속하게 됐는지, 출신지가 어딘지, 언제 수도로 왔는지 정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하군.”
“고위 귀족의 주치의씩이나 되는 사람이 과거 행적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드루쉬아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칼프는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과거 행적이 전혀 없는 사람은 마이헬러의 주치의만이 아닙니다.”
“마이헬러 후작도 그렇지. 제르뵈 마이헬러뿐만 아니라 전대 후작도 영지에 틀어박혀 한 번도 수도에 나타난 적이 없다고 들었어.”
“후작 부인이 병환 중이라 영지에 있다고 소문이 났지만, 막상 영지에 가보니 작년에 사망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허.”
거기까지는 드루쉬아도 알지 못했다. 형식상이지만 그래도 드루쉬아는 샤프리의 약혼자였다. 헤네시 남작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약혼자로서 예의를 다하라고 요구하던 샤프리가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모친의 장례식은 소리소문없이 치렀다고?’
칼프는 굳어진 얼굴로 드루쉬아의 의심에 힘을 실었다.
“마이헬러 후작이 의심스럽습니다, 각하.”
“혹시 대공령을 노리는 것 같아서?”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하일이 칼프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하고 있었는지 드루쉬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다물 뿐.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책상 위의 서류가 팔락였다. 그 사소한 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세 사람이 있는 집무실은 고요했다.
칼프와 미하일은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생각에 빠져 보좌관들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다.
“…각하.”
내내 기다리던 미하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드루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까칠했다. 어둡게 그늘진 눈가와 버석한 얼굴, 정리되지 않아서 흐트러진 머리칼까지.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하던 남자가 전에 없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드루쉬아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불면증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상한 꿈을 꿔서 더 그런가.’
언제부터였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처음에는 대공령으로 가던 안가에서 아시카와 첫날밤을 보낸 뒤부터였다. 종종 꿈속에 나타난 아시카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었고, 퍽 달콤한 꿈을 꾸었더랬다.
그러나 그가 꾸던 단꿈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시카가 사라진 뒤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꿈이 반복될수록 그것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미하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고,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드루쉬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손짓했다.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레이디 이그레인에 대해 추적해 봤는데요.”
드루쉬아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느슨했던 집무실 안에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미하일은 아픈 팔을 문지르며 보고를 이어갔다.
“최측근 호위 기사인 베르트 경이 예전에 용병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수도에 있는데 종종 의뢰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이그레인에도 유능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아시카가 외부의 힘을 빌렸다는 건 그만큼 조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디 있다는 건데?”
“비어있는 저택을 사들이고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게 다입니다. 급하게 준비한 모양인데 레이디 이그레인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증발이라도 했다는 건가? 어떻게 흔적이 없을 수 있어?”
“어쩌면 이미 수도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그편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었다. 수도에 없다면 과연 아시카는 어디로 갔을까.
“아시카가 관리했던 상단이나 다른 인맥들은 어때?”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대공령에 들어가는 상단은 지난 5년간 거의 변동이 없었습니다. 한데 최근 새로 추가된 상단이 있습니다. 그 상단이 며칠 전 대공령으로 출발했답니다.”
“지금이 정기 방문 시기는 아니잖아?”
“요즘은 작은 상단이 물량을 나눠 받아 조금씩 자주 들어가는 편입니다.”
드루쉬아의 의문에 칼프가 대신 대답했다. 평소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보니, 대부분의 상단은 번잡한 과정을 피하려고 대공령에 자주 들르지 않았다.
“관리하기가 까다로울 텐데. 이그레인측에서 그걸 허가했다고?”
“유통은 이그레인의 권한이니까요. 일은 늘었지만 대신 외부와 교류가 수월해진 점도 있습니다.”
“그걸 누가 관리했지?”
“제가 알기로는 레이디 이그레인이었습니다.”
불현듯 드루쉬아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상하군. 왜 하필 지금일까.”
대공령에 관한 온갖 소문으로 수도가 들썩이는 중이었다. 작은 상단이라면 더욱 몸을 사릴 시기가 아닌가.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만큼 마음이 초조한 탓이었다.
“대공령, 대공령이라….”
“지난번에 각하께서 대공령으로 가실 때, 레이디 이그레인이 쫓아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당시에 큰일이 연달아 터지면서 아시카가 왜 저를 쫓아왔는지 이유조차 묻지 못했다.
“모든 문제가 대공령으로 향하는 느낌이 드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미하일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고 칼프도 난해한 얼굴이었다. 드루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부님께 서신을 보내. 대공령을 거쳐서 영지로 가겠다고.”
“대공령… 말입니까?”
미하일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아픈 팔을 움찔거렸다. 말고삐를 쥘 수는 있으려나, 근심 어린 미하일의 얼굴을 보고 드루쉬아가 툭 뱉었다.
“칼프는 수도에서 내 일을 대신하고, 미하일은 나와 함께 대공령으로 간다. 그 팔은 의원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 손만 멀쩡해도 말고삐 쥐는 데는 문제 없지 않으냐, 드루쉬아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준비해. 오늘 안에 출발한다.”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한시가 급한 마음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어쩌면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사라져 버렸는지.
“허락 없이 청혼서를 보냈다가 호되게 뒤통수를 맞는군.”
뭐 하나 쉽지 않은 여자였다. 그래서 더 애가 타고 꼭꼭 숨어버린 아시카가 야속하기만 하다.
“찾기만 해봐, 아주 그냥.”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은 무럭무럭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