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아시카가 사라진 지 벌써 일주일.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그녀를 찾는 이들은 소리소문없이 움직였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서재에는 희미하게 약초 향이 배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던 에르윈이 본능적으로 손을 입에 올렸다가 슬쩍 내렸다.
어둑한 안쪽에서 권태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찾고 있느냐?”
“네. 이그레인과 탈리온 양쪽에서 찾는 모양입니다.”
에르윈은 커튼이 쳐진 창가를 흘깃 보고는 마이헬러 후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레이디 이그레인의 실종에 탈리온 공작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확실해?”
“직접 만나려고 이그레인 저택까지 찾아갔다가 외려 이그레인 공작에게 잡혔었던 모양입니다.”
“경마장에서 레이디 이그레인을 위협했던 건?”
부친의 추궁에 에르윈이 바짝 긴장했다. 아시카가 위험에 빠지면 드루쉬아가 어떻게 반응할지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을 시켜 등을 떠밀었을 뿐인데 부친의 반응이 묘하다.
“그 여자가 떨어지는 걸 보고 탈리온 공작이 눈이 뒤집혀서 쫓아가더랍니다. 보통 관계는 아닌 모양입니다.”
언제 그렇게까지 깊어졌을까. 둘의 만남이 워낙 은밀하게 이뤄져서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청혼서까지 보냈다고 하니, 이제 확인할 필요도 없겠구나.”
마이헬러 후작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여유로운 모습이지만 에르윈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어느 쪽도 가망이 없는 건가.”
탈리온이든 이그레인이든.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눈치 보던 에르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납치… 는 어떻겠습니까?”
피식, 마이헬러 후작의 입에서 조소가 흘렀다. 언뜻 질책하는 듯이 보였지만 진한 청록빛 눈동자는 무감하고도 권태로웠다.
“겁이 없구나.”
에르윈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떨궜다.
그래 봐야 여자 하나. 겁낼 일이 뭐가 있다고 조심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면 내가 왜 그리 오래 기다렸을까.”
단순하기 짝이 없는 아들을 질책할 마음은 없었다. 마이헬러 후작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당겼다.
“그보다는 일을 더 크게 벌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생각에 잠긴 표정이 언뜻 즐거워 보였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흥분에 에르윈의 등골이 오싹했다.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자신의 부친이건만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한 핏줄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종소리를 듣고 온 하인은 외출 지시를 받고 다시 서재 밖으로 달려나갔다.
“모주의 궁전으로 가십니까?‘
저택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는 마이헬러 후작이었다. 그가 불편을 무릅쓰고 외출하는 경우 목적지는 대부분 황궁이나 모주의 궁전이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뭐에 쓰려고? 쓸모가 다하지는 않았으나 그 연에 끌려가지는 마라. 네가 연을 만들어야 할 상대는 황태후나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다.”
황제의 치세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모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것이 가상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무능력한 자였다.
“네, 아버지.”
오늘의 행선지는 황궁이다. 에르윈은 생각을 멈추고 고분고분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마차 위로 늘어진 차양은 햇빛을 가려주지만 먼지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건조한 날이 계속되면서 달리는 마차에는 간간이 먼지가 날아들었다.
에르윈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부친의 표정을 살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 몸이 흔들릴 뿐, 거리로 향해있는 후작의 시선은 무감하기만 하다.
세상에서 한발 물러난 듯 초연하기까지 한 얼굴. 최소한의 욕구조차 드러내지 않는 모습은 제 부친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 아버지.”
아들의 부름에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라는 의미였다.
“샤프리의 결혼 말입니다. 황태후 폐하께서 요구하시는 겁니까?”
그제야 마이헬러 후작이 제 아들을 돌아보았다.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에르윈은 흠칫 놀라 고개를 떨궜다.
거죽만 남고 속이 비어버린 죽은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진 시선.
질책이나 고민 같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감정조차 사라진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마이헬러 후작에게 이미 샤프리의 존재는 잊혀졌다는 것을.
그러니 에르윈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아들에게 머물렀던 시선은 무심하게 다시 거리의 풍경으로 옮겨갔다.
마차는 아마노이아 거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전과 사제원, 약재상이 주로 밀집해 있는 거리가 오늘따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늦여름 햇살과 흙먼지 냄새가 나는 메마른 대기. 단조로운 색상의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에 돌풍이 일었다. 동시에 마른 먼지가 부옇게 일어 시야를 가렸다.
에르윈은 눈을 감았고 마이헬러 후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흙먼지 바람을 피해 무심히 돌리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세워.”
“예?”
“당장 마차를 세워!”
당황한 마부가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아버지? 왜….”
에르윈은 난생처음 보는 부친의 격한 표정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마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마이헬러 후작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아버지, 위험합니다!”
“윽.”
성급한 몸짓에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생전 한 번도 거칠게 써본 적이 없던 몸이었다. 후작은 뻣뻣한 다리를 놀려 사람들이 무리 진 곳을 향해 달렸다. 그를 부르는 에르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비켜, 비켜라!”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거칠게 잡아채고 귀부인들의 비명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흙먼지 바람이 일어난 거리를 가로질러 길 끝에 다다랐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분명 봤는데. 착각인가?’
마이헬러 후작은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설마, 살아있어? 그런 건가?’
어쩌면 이라는 가정만으로도 심장이 떨릴 만큼 충격과 희열이 밀려들었다. 그의 영혼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았던 단 하나의 존재, 그것을 향한 강렬한 열망과 탐욕.
“으하, 하,”
실로 긴긴 시간을 건너 이제야 살아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아하하하!”
마이헬러 후작은 광기 어린 눈동자를 번뜩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놀라 달려온 에르윈의 시선도, 겁먹어 비껴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 * *
“주문하신 약재는 모두 준비했소만, 이번에도 직접 확인하시려우?”
약재 상인은 문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부인?”
“아.”
이븐은 몸서리를 치며 진열장을 향해 다가갔다. 등 뒤로 따라붙는 오싹한 감각을 애써 떨쳐내면서.
“이 날씨에 그렇게 껴입고 춥기라도 한 거요?”
약재 상인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이븐을 보았다. 온통 새카만 옷차림에 검은 모자, 모자에서 늘어뜨린 검은 베일로 얼굴까지 가렸다. 종종 보는 상대지만 볼 때마다 신기한 여자였다.
“아닐세. 약이나 이리 내주게”
“에잉. 하루 이틀 거래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사람을 못 믿어?”
“자네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약재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걸세.”
“이거나 그거나, 원.”
상인의 핀잔에도 이븐은 꿋꿋이 늘어놓은 약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조금 전 느꼈던 기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대로 포장해주게.”
“직접 들고 가시게? 양이 제법 많은데.”
“마차까지만 옮겨주면 돼.”
오늘따라 서두르는 것이 영 불안해 보였다. 상인은 계산을 끝내고 점원을 불러 포장된 물건을 나르게 했다. 이븐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한참 시간이 늦은 오후였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모든 일은 리네를 통해 처리하지만 유일하게 직접 나서는 것이 약재 구입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같은 곳을 다녔구나.’
반복되는 동선은 언젠가 꼬리가 잡히기 마련. 오래도록 위협 없이 생활하다 보니 경계가 느슨해진 모양이다. 거래처와 거래방식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마차가 아트샵에 도착했다.
이븐은 건물 앞문이 아닌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나일이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물론 이븐이 반가워서는 아니었다.
“오늘도 안 깨어나잖아요.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초조한 표정과 염려가 가득한 목소리. 이븐은 리네를 부르며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말을 그리 못 믿어?”
“일주일째 의식이 없는데 괜찮다는 말만 하니까 누가 믿겠어요?”
나일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으며 답을 구했다. 걱정 가득한 나일의 얼굴을 보고 이븐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주술사들이 겪는 무아지경의 혼수상태에 대해 알아?”
“주술사? 무아지경? 그게 다 무슨 소리죠?”
“그것과 비슷해서 강제로 깨우면 안 된다는 말이야.”
“레이디 이그레인이 주술사가 되는 건가요?”
나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건 아닌데.”
이븐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여간 그런 줄 알고 저리 가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지 말고.”
“살펴보기라도 해줘요. 저렇게 내버려 두다 탈이 나면 어떻게 해.”
아이처럼 떼쓰는 것 같지만 나일의 표정은 심각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지금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그레인 저택에서 나오던 그날 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던 어느 순간 아시카가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시카를 쫓아 달리면서 나일은 한순간도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찰나였지만 그녀가 사라졌다. 마치 공기 속에 스며드는 것처럼.
어쩌면 착시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놀라 걸음을 멈춘 순간 그녀는 사냥용 별채의 문을 열고 있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아시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비밀통로를 찾아 열고, 빛 한점 없는 공간을 달려 밖으로 나설 때까지 아시카는 한 번도 나일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저택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아시카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에 예정되었던 안가가 아니라 이븐에게 온 것이다.
이븐은 걱정 가득한 나일을 뒤로하고 리네를 불렀다. 어쩐지 이유 없이 지치는 하루였다.
건물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침실 안. 은은하게 감도는 허브향이 코끝을 찌른다. 테이블에는 약초 냄새를 지우기 위해 가져다 놓은 허브 다발이 꽃을 대신해 화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븐은 화병 옆에 얌전히 놓인 목걸이를 손에 들었다.
“보석이 언제부터 이랬는지 혹시 알아?”
“벗겨낼 때부터 금이 가 있었습니다.”
리네의 대답에 이븐이 미간을 찡그렸다.
펜던트에 박힌 다섯 개의 청보라빛 보석. 그중 세 개가 금이 가 있었다. 거미줄처럼 실금에 뒤덮인 보석을 손끝으로 긁어보기도 하고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이상하구나.”
이븐은 고개를 갸웃하며 목걸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테이블 너머 침대에는 목걸이의 주인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리네가 의자를 끌어다 침대가에 놓아주자 이븐은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다른 변화는 없었고?”
“악몽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악몽이라.”
잠들어 있는 아시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핏기가 사라져 다소 창백하지만 일주일씩이나 의식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은 것이 맞습니까?”
나일에게는 티 내지 않았지만 리네조차 의문이 들었다.
“실은 나도 잘 모른단다. 추측만 할 뿐이지.”
“깨어나기는 할까요?”
“그건 의심의 여지도 없을 테지. 이 아이는 쉽게 죽지도 못해.”
그건 너도 알지 않으냐고,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리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말의 의미는 축복이 아닌 저주. 핏기없는 이븐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창백했다.
리네의 시선이 이븐의 안색을 빠르게 확인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언제부턴가 이븐은 제 얼굴을 보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그것은 오래도록 함께한 리네에게도 해당되었다.
“불안하시면 수면 향을 피울까요?”
“필요 없네. 괜찮아진 지 꽤 되었다는 걸 알잖아.”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신기하기도 하지. 막연하게 나를 괴롭히는 것보다는 더 직접적인 방법을 찾았나 보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걸 다행이라고 여길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끝나갈 때가 된 게 아닐까.”
침잠한 어조는 기쁘지도, 기대에 차 있지도 않았다. 그런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기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삭아버린 심장이 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직 지켜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방 안이 덥지 않은데도 식은땀을 흘렸는지 아시카의 얼굴에는 검은 머리칼이 휘감겨있었다. 이븐은 잠들어 있는 아시카의 얼굴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었다.
혹시 몸이 차게 식지는 않았는지 목과 어깨를 쓸어보고 얇은 여름용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주었다.
이븐은 아시카에게 머물던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탈리온 쪽에 있는 애들은 어찌 됐고?”
“저희가 가지고 있던 증거 대부분을 넘겼습니다.”
리네를 돌아보던 눈동자가 허공 언저리에서 멈췄다. 달싹이던 입술에서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한단 말이지.”
머뭇거리던 리네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솔직한 속내를 입에 올렸다.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현재를.
“이대로 덮으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들 겁먹은 쥐새끼처럼 땅굴에 처박혀 숨기 급급해. 먹이를 던져줘도 그 모양이니 어디다 써먹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 탓을 할 것도 못 되었다. 진실을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이븐의 시선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아시카에게로 향했다.
“결국 이용할 것은 이 아이밖에 남지 않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