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수도의 마이헬러 저택은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마이헬러 가문이 후작위를 받을 때 지어져서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후작이 오랫동안 은둔하면서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에르윈과 샤프리가 수도에 왔을 때 잠깐씩 방문했을 뿐.
폐쇄적이던 이곳이 변한 것은 마이헬러 후작이 영지에서 수도로 옮겨오면서부터였다. 대대로 마이헬러 후작은 영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니 실로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수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때 처음으로 주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나마도 영지에 있다는 후작 부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후작가라고, 일하는 이들마다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사용인들 모두 주인 가족을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하녀는 오늘따라 유독 차디찬 샤프리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아가씨, 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답니다.”
망연하게 침실을 바라보던 샤프리는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을 나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인사하는 하녀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침실은 2층, 에르윈의 침실은 3층. 그 간극이 새삼스러워 샤프리의 마음도 차게 가라앉았다.
“오라버니.”
노크도 없이 불쑥 에르윈의 방문을 열었다. 하인이 무릎을 꿇고 에르윈의 부츠를 벗기다 말고 돌아보았다. 옷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하인도 불쑥 쳐들어온 샤프리를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할 얘기가 있어요.”
에르윈은 눈살을 찡그리곤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너는 어째 나이를 먹어갈수록 조심성이 없어지는구나.”
별것 아닌 핀잔이 샤프리의 가슴에 쿡 박혀온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않겠어요?”
“지금 뭐라고 했지?”
하인을 내보내고 직접 외투를 벗던 에르윈이 눈을 치켜떴다. 샤프리는 눈꼬리를 내리며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알고 계셨잖아요. 오늘 제가 왜 모주의 궁전에 불려갔는지.”
“아아, 그게 오늘이었구나. 아버지께서 바쁘다 보니 미리 언질을 못 주신 모양이다.”
마이헬러 후작은 샤프리에게 결혼을 직접 통보해주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황태후를 통하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할 소문만 무성하게 되었다.
“저쪽에서 서두르고 있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너를 예쁘게 본 모양이야.”
“오라버니.”
“그라나티 영지가 우리 쪽과 인접해있다는 거 알지? 탈리온과의 혼사가 무산된 마당에 이렇게라도 가문에 도움이 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야.”
에르윈의 태도는 심드렁했다.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훤히 보여서 샤프리의 속이 울렁거렸다.
“오라버니, 제발…. 이 결혼을 막아줘요.”
커프스 버튼을 풀던 에르윈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오라버니도 그 정도 의견은 낼 수 있잖아요. 결혼만 아니라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청록빛 눈동자가 습하게 젖어 갔다. 모진 말을 뱉으려던 에르윈은 그 처연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샤프리. 내 마음까지 무겁게 만드는구나.”
“제발요, 오라버니.”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샤프리는 그에게 다가가 옷깃을 잡았다. 눈물에 젖어 드는 뺨이 처연하고도 아름답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에르윈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는 부드러웠다.
“나라고 해서 아버지를 거역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애틋했다. 그러나 차게 빛나는 눈동자는 마이헬러 후작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샤프리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헤네시 부인, 네가 그랬다지?”
샤프리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무슨… 말이에요?”
“하필 그날 헤네시 부인이 구빈원에 간 것도, 다른 곳도 아닌 그 건물에서 깜박 잠이 든 것도. 모른다고 할 셈이야?”
“그걸 왜 저에게 물어요?”
동그랗게 커진 청록빛 눈동자는 무구해 보였다. 에르윈이 가늘게 뜬 눈으로 샤프리를 살폈다.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은 마이헬러 후작과 에르윈 둘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샤프리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헤네시 부인이 휩쓸려 사망했다.
마이헬러 후작은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자세한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네가 앙큼하게 군다는 건 알고 있었다만, 내게 비밀이 있으면 곤란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에 관해 오라버니가 모르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왜 믿어주지 않으냐는 소극적인 투정이었다. 샤프리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며 에르윈은 고개를 기울여 생각에 잠겼다.
“그렇긴 해.”
묘하게 만족스러운 웃음. 기다란 손가락이 샤프리의 뺨을 지나 귓불을 쓸고 목 언저리에 미끄러졌다.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느릿한 손길에 솜털이 곤두선다.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와 신비롭고도 차디찬 시선. 샤프리의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긴장감에 눈꺼풀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매끄러운 살결을 매만지던 손길이 뚝 멈추더니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얌전히 있어. 또 아버지 눈 밖에 나지 말고.”
에르윈은 여상하게 말을 뱉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샤프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일 뿐이라도 매달릴 사람은 에르윈밖에 없었다.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는구나, 오라버니는.’
드루쉬아의 마음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 마이헬러의 두 부자가 원한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는데.
쓸모가 다해버린 소모품. 그것이 제 처지였다. 예견된 미래였는데도 어째서 기대했던 걸까.
에르윈의 방을 나서는 발길이 무거웠다. 샤프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직접 방문을 닫는 그의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쿵, 하고 샤프리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면서 이제껏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왔던 마음 한 자락도 함께 잘려 나간 느낌이었다.
저택을 밝히던 불이 거의 꺼지고 한참 뒤 샤프리는 눈을 떴다.
깊은 새벽인데도 잠기운 하나 없는 눈동자가 자신이 누운 공간을 살폈다. 저 혼자뿐인데도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양 눈치 보는 것은 습관이었다.
샤프리는 미끄러지듯 이불을 빠져나와 침의 차림으로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발소리조차 숨기기 위해 맨발로 방을 나섰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본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서고였다. 언제나 잠겨있던 서고는 샤프리가 지닌 열쇠 하나로 간단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발을 들이는 동시에 샤프리의 몸이 굳어졌다. 바로 정면, 벽 한가운데 걸린 커다란 초상화 때문이었다.
진한 녹색 눈동자를 지닌 금발의 여인. 양손으로 들기도 버거울 만큼 묵직한 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여자는 마이헬러 가문의 초대 가주였다.
마이헬러 가문의 시조는 기사, 그것도 여자였다. 먼 이국땅에서 건너와 메마른 땅에 가문을 일궜다고 전해진다. 기사로서 이 땅에 정착했으나 기사의 길을 던져버린 이국의 여자가 몰래 숨어든 침입자를 굽어본다.
“후….”
잠시 긴장되었던 숨을 토해냈다. 샤프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지만 망설임이나 두려움 따윈 없었다. 커다란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샤프리는 어둑한 가운데에서도 익숙하게 길을 찾아 걸었다.
테이블이 놓인 중앙을 둘러 빼곡하게 서 있는 책장들. 넓은 서고의 공간은 커다란 기둥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었다.
어릴 때 헤네시 부인에게 얻어맞은 뒤 우연히 열려있는 서고로 도망친 적이 있었다. 이곳은 마이헬러 후작과 에르윈만의 공간이었기에 사용인조차 함부로 다니지 않았다.
헤네시 부인은 샤프리가 서고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체벌을 피해 달아난 샤프리를 혼쭐낼 심산이었다.
헤네시 부인의 예상대로 샤프리는 한겨울 난로조차 없는 서고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온기를 찾아 구석구석을 헤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꺾여있는 서재의 구조상 있어야 할 공간이 실제보다 작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샤프리는 그렇게 벽과 벽 사이에 비좁게 나 있는 비밀통로를 찾아냈다.
그러나 통로 너머 자리한 철제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 열쇠를 소지한 것은 이 저택에서 단 두 사람, 마이헬러 후작과 에르윈 뿐. 에르윈에게서 열쇠를 훔쳐 본을 뜨기까지 또 한참이 걸렸다.
비밀통로를 발견하고 1년여가 지나서야 샤프리는 비밀 서고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창문 하나 없이 완전히 밀폐된 공간. 샤프리는 검은 벨벳 천으로 싼 야광석을 꺼내 손에 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후작가에 발을 들였던 일곱 살 때부터 샤프리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마이헬러 후작의 손을 잡는 순간부터 자신이 맹수의 아가리 속에 던져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늘한 대리석벽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창백한 제단상이 있었다.
제단상 앞에서 샤프리는 자신이 들어온 입구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두려움을 느꼈다.
망설임은 잠시뿐, 샤프리는 제단상 위로 손을 뻗었다.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검게 변색 되어 버린 양피지 위로. 아름답지만 차가운 설화석고 조각처럼 창백한 하얀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