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토독, 톡. 창문틀을 두드리는 손마디가 초조하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지만 꼬박 하루 넘게 손님방에 갇혀있으면서 드루쉬아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불러낼 줄 알았더니.’
무슨 꿍꿍이인지 웨이브는 드루쉬아를 별채에 가둬놓고 침묵 중이었다.
‘아니란다고 그 말을 믿어? 내가 어지간히도 꼴 보기 싫은가 보네.’
아니면 이미 예상되는 바가 있었던지.
웨이브와 담판을 지을 생각으로 남았는데 정작 만나지도 못하고 시간만 죽이는 꼴이 되었다. 답답한 상황에 속이 타들어 갔다.
온 저택에 소문이 파다해서 이제 와서 도망쳤다가는 제 꼴만 우스워질 테고. 그걸 알고 방치하는 걸 수도 있었다.
‘이그레인 공작은 모욕하는 방법도 지능적이군.’
“들어가겠습니다, 공작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드루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펄번이 점심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막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제 내 식사 시중까지 들어주려고? 기사단장 체면이 말이 아니야.”
“공작님만 하겠습니까? 사고 치는 방법도 다양해서 매번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드루쉬아는 팔짱을 끼고 펄번이 식사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걸 바라보았다.
“식사를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잔소리야?”
별채에 감금된 뒤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속이 타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공작님. 아니 분단장님, 이러지 맙시다.”
펄번이 긴 한숨을 토해내며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분단장이라. 그거 말 한번 잘 꺼냈네. 콜테른 경, 동료의 의리를 생각해서 한 번만 도와주지?”
“제 현재의 동료는 이그레인에 있습니다만.”
“내가 자네 목숨을 구해준 것만 해도 몇 번이지? 은혜를 갚을 줄도 몰라?”
“‘적해(赤海)에서의 인연은 적해에서 끝난다.’ 모르십니까? 그리고 저도 몇 번은 신세 갚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파병지에서 복무했다. ‘적해’라고 불리는 위험지역. 란탈이 관리하는 지역 중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해역이었다.
펄번이 처음 파병지에서 드루쉬아를 만났을 때만 해도 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고국의 이해관계는 파병지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이그레인이나 탈리온의 이름 따위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여기는 파병지가 아니지 않은가.
“옛정 운운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짓을 저질렀지 않습니까. 공작님께서 이렇게 무모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 알아. 나도 나에게 새삼 놀라는 중이니까.”
“그러게 어쩌다가….”
펄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드루쉬아는 스스로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았다. 철저히 계산해서 제 이득을 최우선으로 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아시카를 빼돌린 건 내가 아니야.”
“그 말 믿습니다. 그보다 무슨 속셈으로 아가씨를 꼬여낸 겁니까? 이그레인과 탈리온 사이에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은 바로 하지. 자네 아가씨가 꼬여낸다고 넘어올 인물이기는 해? 왜 그 반대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펄번이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하는 의구심과 반신반의하는 표정.
“그… 아가씨가 얼마나….”
“얼음꽃이라고? 철벽이라고? 내가 뭐라고 불렸는지는 기억하지?”
드루쉬아 역시 만만치 않게 벽이 높은 사내였다. 적해의 철옹성이라는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이런 걸 두고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공작님, 그걸 말이라고….”
펄번이 말을 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구구절절 이유를 따져봐야 당장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엄청나다. 탈리온 공작이 레이디 이그레인의 침실에서 붙잡혔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펄번 도와줘. 이그레인 공작은 나를 가둬두고 골탕 먹일 심산 인가 본데, 내가 그렇게 여유롭지가 않아.”
“정말 아가씨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십니까?”
“그걸 가장 알고 싶은 게 나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드루쉬아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스스로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드루쉬아는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펄번은 굳어진 표정으로 문가로 향했다.
“탈리온 공작님과 제 인연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일단 이그레인 공작님을 만나 뵐 수 있도록 보좌관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나머지는 직접 대면해서 해결하십시오.”
드루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브는 반드시 만나야 할 상대였다. 그를 뛰어넘지 못하면 둘의 관계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기에.
그러니 지금이어야 했다.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든, 이 문제로 아시카가 얼마나 화를 내든 드루쉬아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 * *
아시카의 침실에서 탈리온 공작이 잡혔다는 소식으로 이그레인 저택 사람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충격의 여파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사용인과 기사들에게는 함구령이 떨어졌다.
감금된 지 이틀째에야 드루쉬아는 웨이브를 만날 수 있었다. 웨이브가 그를 불러들인 곳은 집무실이 아닌 접견실이었다. 상석의 의자에 앉아있던 웨이브는 드루쉬아가 들어온 걸 알고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상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손님을 위한 의자조차 치워버린 것을 보고 그저 웃음만 나온다. 안내를 빙자한 기사들의 감시도 더는 필요 없었다. 드루쉬아는 성큼 안으로 들어서서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웨이브의 뺨이 실룩거렸다.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억눌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노인네가 저렇게 감정적으로 굴 때도 다 있군.’
여러 사람 미치게 하는 여자가 아닌가. 거기에 휘둘리는 자신도 제정신은 아닐 테고. 웨이브가 입을 열면 얼마나 화를 쏟아낼까 하는 생각에 잠시 고민했다.
‘나이가 있는 상대니만큼 속을 긁는 건 참아야겠지.’
아무리 밉다 해도 아시카에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었다. 저와 함께 있다 탈이 나는 건 곤란하다. 웨이브가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걸 보고 드루쉬아는 태도를 결정했다.
“말했듯이 아시카의 가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공대해도 되지만 그래도 아시카의 가족이라는 생각에 드루쉬아는 예의를 갖췄다.
“아시카? 감히 누구 마음대로 내 손녀의 이름을 입에 올려!”
“본인이 허락한 이름입니다. 설마 이그레인 소공작은 자기 이름조차 뜻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콰당, 하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웨이브가 거칠게 일어난 탓이다
“네 놈이, 정녕!”
아시카가 허락한 이름. 그 대목에서 평정을 잃고 말았다. 짐작했으면서도 둘 사이를 입에 올리는 드루쉬아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제가 참는 건 이그레인 공작께서 아시카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예의를 지키고 있는데도 드루쉬아에게서는 특유의 오만함이 배어났다.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푸른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었다.
그러나 웨이브 역시 한치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주름 가득한 뺨이 실룩거리다 못해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웨이브는 으득,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청혼서는 무슨 의미였나?”
“청혼서가 청혼서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시카를 제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는 구애 편지 말입니다. 한 번도 안 해보셨습니까?”
빈정거리는 어조에 웨이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 손녀에게서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탈리온이라 해도 그냥 두지 않아.”
“이그레인 공작께서 융통성이 없다는 건 익히 들었습니다만,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만 양쪽 가문이 타협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의미였다.
“여태껏 아무 문제 없이 살아왔어. 나도, 내 손녀도.”
“그게 언제까지 가겠습니까? 당장 대공령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귀족원이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났습니다. 조만간 황실도 움직일 텐데, 양쪽 가문에 피해가 없을 거라고 보십니까?”
드루쉬아의 지적은 뼈아픈 현실이었다. 대공령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귀족들에게 양쪽 가문의 다툼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그러니 해묵은 감정으로 인한 소모전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옳았다.
웨이브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열 오르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더니 조금은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탈리온 공작의 말이 옳아. 그러나 그 수단이 혼맥이어야 할 이유는 없네.”
“가장 좋은 방법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걸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누가 그따위를 최선이라고 해! 내 손녀에게는 아니야.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지켜왔는데!”
버럭 고함을 내지르던 웨이브가 입을 닫았다.
드루쉬아는 웨이브의 말에서 미묘한 간극을 느꼈다. 푸른 눈동자가 그 차이를 놓치지 않고 번뜩였다.
“제가 탈리온이라서 반대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웨이브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쳐 간 것은 찰나였다. 그는 노련하게 속내를 감췄다.
“…당연한 게 아닌가? 네놈이 탈리온이니까!”
접견실이 쩌렁 울릴 정도로 큰 고함이었지만 조금 전 같은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가만히 웨이브를 바라보았다. 묵직한 시선이 그의 면면을 뜯어보고 조금의 빈틈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살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양쪽 가문의 해묵은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은 14년 전이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재난으로 경황이 없었던 그때, 이그레인 공작은 수색을 원하는 탈리온에게 접근 금지령을 내리면서 어마어마한 원성을 사게 되었다.
당시에는 계속되는 폭우로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다. 분노하면서도 봉쇄 조치를 납득 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런데 이후에도 이그레인 공작은 비협조적이었다. 분노한 가신들과 함께 탈리온을 맹비난하면서 조사는커녕 만남조차 거부하고 사건에서 아예 발을 빼버렸다.
‘마치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 사람처럼.’
네오렌이 직접 나서서 웨이브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끝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드루쉬아의 조부 네오렌은 이그레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이 네오렌이었다. 여동생 반느의 죽음도, 사고로 죽은 자식들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던 것도 모두 이그레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오렌은 가신들이 원망을 쏟아낼 때도 담담하게 들어줬을 뿐 함께 분노하거나 선동하지 않았다. 그것이 네오렌의 진중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아니었을까.
탈리온을 증오한다고 믿어왔던 이그레인 공작도 그를 싫어한다기보다는 극도로 피하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웠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가정이 불현듯 드루쉬아의 뇌리를 스쳤다.
“뭘 알고 계시는 겁니까?”
혼란과 의혹이 담긴 질문. 드루쉬아의 질문에 웨이브의 얼굴이 얼음덩이처럼 차게 굳었다.
“두 번 경고는 하지 않아. 내 손녀에게서 떨어져.”
그 말을 끝으로 웨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정보도 내주지 않겠다는 태도가 오히려 드루쉬아의 의구심을 키웠다.
“이그레인 공작, 당신의 손녀는 추도식에서 홀로 울던 어린 소녀가 아니고 온실 안의 화초처럼 마냥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여자도 아닙니다.”
저에게 왔다면 얼마든지 편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시카는 홀로 사라져 버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토록 서운하고 불안할 줄은 몰랐다.
“손녀를 귀하게 여긴다면 얼토당토않은 억지 결혼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아마도 아시겠지만, 아시카가 마냥 유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녀가 뭔가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과연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군요.”
평생 아시카를 지켜봤던 웨이브조차 최근에 깨달은 사실을 드루쉬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 사람을 풀겠습니다. 이그레인 공작께서 아시카의 손발을 묶어버리는 바람에 거리에서 홀로 방황하고 있는 건 아닐지 심히 염려되어서 말입니다.”
웨이브는 울컥하는 표정이었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움켜쥘 뿐 드루쉬아를 외면했다.
‘아마도 알고 있겠지.’
무리하게 몰아붙인 탓에 아시카가 더욱 극단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루쉬아는 저를 외면하는 웨이브를 두고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이그레인 저택을 나서는 동안 더는 아무도 앞을 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