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76화 (76/153)

#76.

아주 잠시, 드루쉬아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였고, 그다음에는 자신이 생각한 그것이 맞나 의구심이 들어서였다.

“그거 진짜 개소리인 건 알고 있나?”

“개소리인지 뭔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걸 회수해오라는 폐하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야.”

“이런 미친, 너희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순간 머리를 후려치는 깨달음. 황제가 왜 두 가문을 치는 데 동조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착각을, 다른 누구도 아닌 폐하께서 하셨나? 단단히 헛다리를 짚었어.”

그러나 기사단장은 드루쉬아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못 내놓겠다 이건가? 당장 이 자리에서 네 부인이 죽어도?”

아시카는 제 목에 닿은 검날보다 시선 너머 어둠 한가운데를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새카맣게 움직이는 그것은 또 다른 자객들이었다.

그녀에게 정신을 쏟고 있느라 드루쉬아는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급한 나머지 아시카는 제 목에 닿은 검날을 확 움켜쥐며 소리쳤다.

“르쉬아, 뒤에!”

외침과 동시에 드루쉬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기사단장의 검날이 아시카의 손을 가차 없이 가르고 빠져나갔다.

“흐윽.”

“이 겁대가리 없는 게!”

손을 타고 흐르는 격한 통증과 왈칵 쏟아지는 질척한 감각. 아시카는 검을 밀어내며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시에 등허리에서 허벅지를 가르는 작렬하는 통증이 이성을 앗아갔다.

“악!”

가녀린 몸뚱이가 맥없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검은 머리칼이 솟구치는 피와 뒤엉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시카!”

날카로운 금속음이 머리 위에서 부딪힌다. 그러나 눈을 뜰 수도 앞을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하반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뜨끈하고 비릿한 감각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녀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피가 울컥 쏟아지고 비명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드루쉬아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아시카를 인질로 잡았던 기사단장은 반쯤 잘려서 너덜거리는 목을 쥔 채 숨이 끊어졌고 더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드루쉬아가 앞을 가로막았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황실 기사들조차 그의 검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안돼….”

잔혹한 검날이 드루쉬아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는 것이 보였다. 그는 혼자였고 자객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 명의 자객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순식간에 왼손으로 검을 옮겨 잡고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가만히 쓰러져있는데도 숨이 차올랐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드루쉬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르쉬아….”

“안돼! 정신 놓지 마!”

너까지 잃을 수는 없다고. 그 절박한 외침이 가슴에 사무친다.

드루쉬아는 드레스를 찢어 상처 부위를 동여매고 외투를 벗어 아시카의 몸을 감싸 안았다.

지독한 피비린내 속에서도 땀에 젖은 습한 체향이 느껴졌다. 빠른 심장박동만큼이나 선연한 드루쉬아의 존재감. 미칠 듯이 두렵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네가 있어서…. 함께여서 다행이야.’

간신히 토해내는 숨결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그조차 힘들어서 더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안타까운 목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져간다.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면서 가늘어지는 제 숨결도, 하반신을 찢어버리는 듯한 통증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시카, 제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 잡고 싶지만 끝내 멀어져가는 애원을 뒤로하고 안도감과 함께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녀의 의식을 집어삼키는 어둠이.

* * *

새벽안개가 내려앉은 정원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사들이 밤낮으로 돌아다니는 탈리온과 달리 이그레인의 저택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드루쉬아는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경비가 허술하군.”

“그래도 일반 귀족 저택에 비하면 자주 순찰을 돕니다. 가문의 기사단이 저택에 상주하니까요.”

“이렇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드루쉬아의 핀잔에 미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몰래 남의 집에 숨어드신 분께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하는 표정이었다.

“각하께서는 제 도움을 받고 계시잖습니까.”

“이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해.”

“아가씨 방을 모르시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아시카를 만나려 해도 무작정 쳐들어올 방법은 없었다. 미아를 미리 보내놓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드루쉬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아는 그를 흘깃 돌아보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설마, 직접 달려오실 줄이야.’

최측근조차 아시카를 만나지 못해 초조해하던 즈음 나일이 움직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드루쉬아에게 보고했더니 아시카를 직접 만나야겠다는 통보가 온 것이다.

“새벽이라 해도 너무 조용한 것 아닌가?”

“그러게요. 평소에도 이 정도로 허술하진 않았는데요.”

사용인들의 문까지 다다르자 미아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의문은 3층에 있는 아시카의 침실 앞에서 풀리게 되었다.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들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있었다. 드루쉬아는 황급히 열려있는 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허.”

텅 비어있는 방 어디에도 그가 기대했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아는 당황한 시선으로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사람의 기척이 없으니 누군가 있을 리 없건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석구석을 살폈다.

정말로 방이 비었다는 걸 깨닫고 미아가 드루쉬아를 돌아보았다.

“근신령이 떨어져서 방 밖으로 못 나간다고 했는데요….”

“나일이라는 놈이 나섰다고 했지?”

“네. 베르트 경과 연결된 용병들이 있는데 그쪽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뭔가 준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시카의 최측근들이 머리를 맞대고 뭘 했을까. 뻔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도망치셨나 봅니다.”

말을 하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미아는 망연한 얼굴이었다. 듣는 드루쉬아마저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아시카가 도망을 갔다고?”

언제나 고고하고 후계자로서의 위신에 부족함이 없던 레이디 이그레인이, 조부의 근신령을 피해 야반도주를 했다고?

“하. 이 여자가 사람을 바보로 만드네.”

드루쉬아는 옷깃을 풀어 헤치며 기가 찬 듯 입바람을 훅 불었다. 흐트러진 앞 머리칼이 팔랑 올라갔다가 내려앉는다.

아시카가 원한다면 어떤 도움이든 줄 각오로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애당초 내 도움이 필요 없는 여자였지. 그래도 그렇지.’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아시카에게 화가 났다.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아시카가 이그레인 공작의 눈을 피해 갈 만한 데가 있나?”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그레인 저택에 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과도 이제 겨우 익숙해지려던 참이었고, 아시카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도 제한적이었다.

생각에 잠긴 드루쉬아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였다.

‘가문의 호위조차 없이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두려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아시카도 이 결혼을 원치 않아.’

웨이브의 뜻대로 순순히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가문을 위해 저를 등지겠다고 하면 드루쉬아로서는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시카는 모든 걸 팽개치고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무엇보다 확실한 의사 표현이지 않은가.

안심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다. 이그레인 공작이 급하게 결혼을 밀어붙이는 중이라고 들었다. 아시카가 잡히면 그대로 끌려가듯 결혼식을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아시카를 찾아야 해. 이그레인보다 먼저.’

그리고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 소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둘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문득 드루쉬아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했다.

“미아, 너는 지금 숙소로 돌아가라.”

“네? 무슨….”

“당장!”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명령이었다. 미아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벼운 발걸음은 소리 없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다들 일어나!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윽….”

머리를 얻어맞아 기절했던 기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교대하러 왔던 기사들은 쓰러진 동료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장 단장님께 보고해!”

동료의 채근에 한 명이 서둘러 계단으로 달려가고 나머지는 열린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아가씨, 안에 계십니까? 대답 안 하시면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막 정신을 차린 이들과 함께 기사들이 아시카의 방으로 발을 들였다. 동시에 기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방 한가운데 있는 것은 훤칠한 장신의 사내였다.

“누구냐! 아가씨는 어디로 갔어!”

당장에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비틀거리며 따라 들어온 동료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저기….”

“네가 빼돌렸어? 아가씨를 어쩐 거냐고!”

버럭버럭 소리치는 기사를 동료가 옆에서 쿡쿡 찔렀다. 동료는 상대를 알아보고 허옇게 질린 얼굴이었다.

“이봐, 그게 말이야….”

“뭐 하는 거야? 당장 저놈부터 잡아들여야지!”

눈치 없는 기사가 당장 드루쉬아에게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동료가 검을 든 손을 움켜쥐었다.

“잠깐만, 검은 좀 내리고.”

“이거 왜 이래? 잡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저놈이잖아.”

“진정들 하지?”

드루쉬아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아가씨가 사라졌는데 진정하게 생겼어?”

“충직한 건 좋은데 눈치가 없는 건 곤란해.”

이미 벌어진 일, 기왕이면 더 크게 벌리자 싶어서 도망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청혼서까지 보낸 마당에 더는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뭐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탈리온 공작님?”

기사들의 등 뒤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루쉬아를 앞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단장님, 저놈이 현장에서… 타, 탈리온이요?”

길길이 날뛰던 기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뒤늦게 달려온 펄번의 시선이 드루쉬아의 시선과 허공에서 부딪혔다. 크게 떠진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에서 펄번의 황망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장님?”

기사들이 채근한 뒤에야 펄번은 간신히 표정을 수습했다.

“탈리온 공작님, 먼저 검을 압수하고 상황 설명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펄번이 다가오자 드루쉬아는 상대의 표정을 슥 훑어보고는 순순히 검집을 풀어 건넸다.

펄번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다물었다. 기막힌 표정이 말을 대신하는 느낌이라 드루쉬아의 눈썹이 획 치켜 올라갔다.

“이게 무슨 소리야? 탈리온 공작이라니?”

“아가씨는?”

소란을 듣고 속속들이 다른 호위 기사들이 방문 앞에 모여들었다. 잠에서 깬 사용인들까지 나와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 앞을 가로막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 드루쉬아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요란하기도 하지.’

펄번은 기사들에게 저택을 수색하도록 지시하고 숙소에 있던 쥴마와 잔느가 불려 나왔다. 때 이른 새벽에 온 저택이 깨어나 발칵 뒤집혔다.

아무리 싫어하는 탈리온이라도 상대는 제국에서 단 네 명뿐인 공작 중 하나. 드루쉬아는 펄번의 안내로 손님용 별채에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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