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망할! 이 새끼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기술보다 힘의 우위가 분명했다. 당황한 상대의 검이 몇 차례 반격으로 밀리는 것이 보였다. 아시카는 주저앉은 채 멍하니 저를 가로막은 커다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부즈리의 덩치가 이렇게 큰 줄 처음 알았다. 언제나 구부정했던 몸을 펴고 맹수처럼 상대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날렵하고 위협적이던 상대의 검이 둔탁한 도끼질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억!”
흉흉하게 휘두르던 도끼가 인정사정없이 상대의 가슴에 박혔다.
빠각.
목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소리. 내리찍을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 도끼가 바로 뒤이어 달려드는 적을 후려쳤다.
아시카를 쫓던 침입자 셋이 순식간에 붉은 살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부즈리는 다른 적이 없는지 빠르게 주위를 확인하고 도끼 든 손을 내렸다.
피가 튄 흉흉한 얼굴을 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았을 때,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묻고 싶은 것이 가득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부즈리는 아시카의 어깨를 감싸 들다시피 일으켜 세웠다. 다급히 이끄는 힘에 아시카는 말할 새도 없이 부즈리를 따라 달렸다.
정문 쪽에서 요란한 충돌음이 연이어 들렸다. 저택 내부에서 무기 부딪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쾅, 하는 파열음이 울렸다. 병사들에 의해 정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저택 안에는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이, 정문에서는 병사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저택을 빠져나갈 수나 있을까. 부즈리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아득해졌다.
‘왜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을까.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왜.’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처지에 화가 났다. 두려움에 가슴이 벌벌 떨리는데도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아가씨, 이쪽입니다.”
정원을 가로질러 부즈리가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사냥용 별채였다. 부즈리는 별채 안으로 뛰어들어 안쪽구석으로 달려갔다.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던 별채에는 사냥도구와 무기, 잡동사니를 넣어둔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그 한가운데 벽면 선반을 밀자 커다란 구멍이 드러났다. 비밀통로였다.
“이대로 쭉 길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탈리온 공작님께서 오고 계시니 머지않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나 혼자 가란 말이야?”
“저는 소공작님을 도와야 합니다. 그분을 지키는 것이 제 소임입니다.”
아시카는 저를 밀어 넣으려는 손을 거부했다. 잘게 떨리는 검은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 절박한 감정이 가득하다.
“누구야? 누가 그걸 시켰는데!”
그 오랜 시간 본색을 숨기고 죽은 듯이 살아온 부즈리였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적이 누구인지 하나라도 알기 위해 아시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제 주인님의 마지막 소망이셨습니다. 늙은이가 나설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끝내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긴 세월의 회한이 담긴 얼굴이 쓰게 웃었다.
“국경을 넘으세요. 복수할 생각도, 가문을 되찾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지 말고 살아남으세요. 아가씨와 탈리온 공작님이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복수의 기회가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가씨는 고귀하고도 죄 많은 대공가의 후손입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셔야 합니다.”
“부즈리!”
“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더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부즈리는 들고 있던 가방을 아시카에게 안기며 새카만 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잠깐만, 기다려. 부즈리!”
부즈리는 재빨리 벽 선반을 당겨 통로를 다시 막아버렸다.
쿵, 하는 둔탁한 충돌음. 아시카는 새카만 어둠만 남은 공간에 홀로 떨어졌다. 요란했던 소음조차 사라져서 귀가 먹먹할 만큼 고요하다.
“생각을, 생각을 해야….”
그러나 온몸이 덜덜 떨려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르쉬아가 오고 있다고 했어.”
드루쉬아가 온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그녀를 움직이는 희망이었다.
“어두워.”
눈을 떴다는 사실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새카만 어둠 속. 부즈리가 건네준 가방 속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야광석?”
처음부터 아시카를 여기로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정원사 부즈리. 아시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그레인에 있었고 성장하는 내내 영지에서, 수도 저택에서 가장 오래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흙투성이 정원사의 모습과 육중한 도끼를 휘두르던 피투성이 전사의 모습이 뒤엉켰다. 그녀가 모르는 일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 걸까.
‘내가 알고 있는 게 있기나 해?’
그녀야말로 온실 안의 화초였다. 소중한 이들이 위협적인 비밀을 짊어지고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 아시카는 가장 안전한 곳에서 공작가의 위명을 등에 업고 살아왔다.
아시카가 모르는 곳에서 그녀의 부친이, 조부가, 또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모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울컥거리는 목울음을 삼키고 뜨끈해지는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아시카는 야광석을 꺼내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고 건조한 통로는 벽돌을 쌓아 견고하게 지어졌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길에는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허락될지 모를 일. 통로의 바닥이 잘 다져졌다는 걸 확인하고 걸음이 빨라졌다.
종국에는 발밑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등 뒤의 새까만 어둠이 저를 집어삼키려는 괴물 같아서. 어둠 속에서 제 숨소리만이 가쁘게 귓가를 울렸다.
마침내 멀리 희미한 빛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한 순간, 발밑이 푹 꺼졌다.
“아악!”
아시카는 그대로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졌다. 미끄러지던 몸이 멈추는 순간 눅눅한 흙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져서 그제야 밖에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
“저기다!”
통로가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어두운 숲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그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다. 아시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누군가 아시카의 뒷덜미를 확 낚아챘다. 몸이 기울면서 강한 힘에 끌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놔! 이 악랄한 것들!”
“누가 할 소리. 수십 년 동안 황실을 기만한 반역도가 할 소리는 아니지!”
엄중한 목소리에 아시카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네 사람은 검은 복장이 아니었다. 갑옷 위에 새겨진 선명한 문양이 낯익었다.
“황실 기사단? 어째서 황실이….”
망연하게 중얼거리는 아시카를 보고 상대가 헛웃음을 흘렸다.
“웬 헛소리를 하는 거냐. 여기까지 잘도 도망친 주제에.”
“단장님, 어떻게 할까요? 탈리온 공작은 놓쳤다고 합니다. 우선 죄인을 이송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탈리온 공작은 혼자 도망치지 않아. 반드시 부인을 찾기 위해 올 거다.”
기사단장의 신호에 무장한 황실 기사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짧은 순간 아시카는 고민했다. 그녀를 죽이려던 자객과 체포하려는 황실 기사들.
‘어느 쪽이 더 위험한 적일까.’
무자비했던 기사단장에 비해 기사들은 조심스러웠다. 레이디 이그레인이자 탈리온 공작부인으로서 그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시카는 제게 다가오는 손을 매섭게 쳐내며 화드득 일어났다. 다가오던 기사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항해봐야 서로 곤란할 뿐입니다, 공작부인.”
“하나만 묻지. 이그레인은 그렇다 치고 탈리온은 왜인가? 탈리온이 무슨 죄를 지었어?”
“그걸 몰라서 물어? 황명을 어기고 수십 년 동안 대공령을 지원해온 것이 이그레인과 탈리온이다.”
“뭐?”
“처음에는 도의적인 지원인 줄 알았지. 그런데 남아있던 아크펠라의 가신들과 결탁해 반역을 도모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발고가 없었다면 까마득히 속아 넘어갔겠지.”
“발고? 그게 누군데?”
“허, 지금 누가 누구를 추궁하는 거지?”
“무고해. 탈리온은 무고하다고!”
아시카는 절박하게 외쳤다. 반역으로 멸문한 아크펠라의 핏줄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드루쉬아의 죄라면 죄였다. 그런 그가 빠져나갈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좋았다.
무고하다는 주장에 기사단장은 차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반역도의 핏줄을 숨기고 황실에 대적하기 위해 오랜 세월 비밀을 은닉해온 죄가 있는데.”
“비밀? 무슨 비밀?”
“단장님!”
빠르게 접근하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어두운 밤 속에 녹아든 새카만 그림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적들이 달려들고 이내 전투가 벌어졌다.
“그놈들이야! 인질부터 확보해라!”
달빛이 어두워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검이 부딪칠 때마다 생생하게 튀는 불꽃이 보일 뿐.
‘도망을, 지금이라면.’
맥이 빠져버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적과 적이 싸우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아시카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아악!”
강한 힘이 아시카의 팔을 잡아챘다. 기사들이 싸우는 동안 기사단장이 아시카를 반대편으로 끌고 가려 했다.
“놔!”
그러나 가녀린 몸으로는 우악스러운 기사의 힘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체념하려 할 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거리를 좁혀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말 위에서 누군가 기사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내렸다.
“탈리온 공작이다!”
“저놈부터 처리해!”
기사들과 싸우던 적들이 방향을 바꿔 드루쉬아에게 달려들었다. 드루쉬아는 빠른 시선으로 아시카의 위치를 확인하고 날아드는 검날을 받아쳤다.
아시카는 비명이 나오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드루쉬아의 주의가 흐트러져 위험해질까 봐. 저를 끌고 가는 기사단장에게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공격이 드루쉬아에게 집중되자 기사들이 옆으로 빠졌다. 드루쉬아는 비릿하게 실소하며 단창에 가까운 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의 검은 그에게 닿기도 전에 육중한 장검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컥!”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대로 밀어붙여 내리찍는 검이 나머지 한 사내에게 쇄도했다.
“망할! 다른 놈들은 왜 아직 안 와!”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검은 무게만큼이나 파괴적이었다. 상대를 몰아붙이면서도 드루쉬아는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서늘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가차 없이 검을 휘둘러 끝내 상대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끅….”
목을 꿰뚫은 검이 으득, 소리를 내며 쇄골과 가슴뼈를 잘랐다. 드루쉬아는 피를 뿜어내는 상대에게 사납게 발길질하며 검을 뽑아냈다.
한쪽에 빠져있던 기사들이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굳었다. 기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적들이 불과 수 분 만에 모조리 시체가 되어 발밑에 나뒹굴었다. 싸우게 된다면 자신들도 같은 꼴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드루쉬아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기사들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만! 더 이상 다가오면 공작부인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다.”
“흐윽.”
아시카의 목 끝에 서늘한 감각이 닿았다. 겁먹지 않기 위해 안간힘 썼지만 드루쉬아를 마주한 순간부터 반가움과 두려움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약한 꼴을 보여 그의 마음을 뒤흔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눈가에 힘을 주었다.
드루쉬아의 시선이 아시카에게 머무는 찰나, 채 삭이지 못한 염려와 울분이 번뜩이다 사라진다. 검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미미하게 떨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분노를 참기 위함이었다.
“네가 함부로 잡고 있는 여자가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은 기억 하나 보지?”
“그래 봤자 이제는 대역죄인이다. 너와 마찬가지로.”
“그래도 이건 너무 치졸하잖아. 황실 기사단은 실력이 아니라 줄서기로 뽑는다더니 진짜였나 봐?”
황실 근위대장은 황제의 가장 최측근으로 정치적 입김이 막강했다. 황실 기사단 대부분이 그 영향력 아래 있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이….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란 말이야. 인질이 내 손에 있는 게 안 보여?”
기사단장은 울컥하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아시카의 목에 검을 바짝 들이밀면서 움츠러드는 목소리를 더욱 키웠다.
“열쇠는 어디 있지?”
“무슨 개소리야?”
드루쉬아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대공성을 열 수 있는 열쇠. 탈리온이 지닌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