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자정을 한참 넘은 시간, 고요한 저택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저택 내부에서 기사들이 감시하고 있던 곳은 아시카의 방 하나였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일은 사용인들의 출입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밖을 확인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설마 아시카가 야반도주를 할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밖으로 나온 뒤에야 아시카는 긴 숨을 토해냈다. 서늘한 밤공기에 간신히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일이 앞장서 걸으며 입을 열었다.
“머물 곳을 마련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근데 괜찮겠어요? 이그레인 공작께서 모든 권한을 회수해갔다고 들었는데.”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
성년이 되기 전부터 지난 5년간 이그레인 공작가의 내정과 사업 일부를 맡아서 처리해왔다. 개중에는 음지에서 진행되는 일도 있었고 투명하지 않게 처리되는 자금도 있었다.
그러니 웨이브가 아시카의 권한을 회수했다고 해서 당장 빈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의외네요.”
“이그레인은 돈을 굴리고 사업을 하는 가문이니까.”
이해될 법하면서도 차고 단단한 아시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서 나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 이런.”
샛길로 빙 돌아 도착한 담장 아래에서 나일이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왜?”
“낮에 만들어 둔 개구멍을 벌써 막았는데요?”
“나갈 길이 없어진 거야? 그럼 어쩌려고….”
“쉿.”
나일이 아시카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정원수 뒤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얼마 뒤 정원 울타리 너머에서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순찰 돌던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사라진 뒤에야 나일이 입을 열었다.
“열흘 전쯤부터 저택 경비가 강화됐어요. 아마 경마장 사고 소식이 들린 뒤부터였을 거예요.”
전염병 환자들의 소문이 무섭게 돌아서였을까.
‘하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아?’
소문 따위에 공작저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대편으로 가봐야겠어요. 북쪽 정원이 담장이 높아서 경비가 소홀한 편이거든요.”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아시카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나일의 뒤를 쫓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뒷덜미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리마저 어둠이 삼켜버린 것처럼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스산한 분위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 꾸며놓은 정원에는 소담스럽게 정리된 정원수가 어두운 실루엣을 그리며 멀리까지 이어졌다. 새카만 지상의 그림자가 하늘과 맞닿은 곳. 밤하늘에는 실금처럼 허공을 가르는 달이 희미하게 빛을 낼 뿐이었다.
‘그믐달이야.’
기시감이 든다. 어둠 가운데 곱게 휜 창백한 빛이 예리한 시선처럼 느껴져서 등줄기가 오싹했다. 두려운 동시에 그녀를 사로잡는 아득한 감각. 눈앞이 어찔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헉.”
아시카는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 정신을 차렸다.
“뭐야, 왜….”
멍해진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아시카는 머리를 털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비슷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나일?”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바로 앞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한가운데 자리한 그믐달만이 조금 전과 같은 모습으로 요요히 빛을 낼 뿐.
“아!”
등줄기에 전율이 일 만큼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
“그믐달이었어.”
약 한 달 간격으로 벌어진 기현상. 스쳐 가는 기억 속에는 매번 희미하게 빛을 내는 그믐달이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불안한 마음에 아시카의 걸음도 빨라졌다. 저택의 본채가 가까워지자 그제야 조금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왜 불이 모조리 꺼진 거야?’
밤에도 안전을 위해 드문드문 불을 켜둔다. 수도에 머무는 내내 온 집안의 불이 꺼진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시카는 원래 예정했던 북쪽 정원이 아니라 본채를 향해 달렸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본채 앞 어둠 속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발견했다. 도망쳐야 할지 앞으로 나서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상대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이 시간에 어디를 다녀온 게냐. 한참 찾지 않았느냐.”
수런거리는 기사들 사이로 누군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
아시카의 검은 눈동자가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벼락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리꽂힌 것처럼 충격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놀란 그녀를 보고 오히려 더 놀란 얼굴이었다.
“아시카, 놀랐느냐? 미안하구나.”
이해할 수 없었다. 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도, 그 말을 하는 상대가 오래전 가슴속에 묻어야 했던 그리운 얼굴이라는 사실도.
“…아… 버지?”아니, 조금 달랐다. 그녀의 기억보다 주름이 깊어진 얼굴은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버지, 로샤강의 댐은….”
“로샤강? 그 얘긴 갑자기 왜?”
뜬금없는 이야기에 부친 란체가 반문했다.
순간 그녀가 알지 못했던 기억이 밀려들었다. 행사가 취소되면서 가까스로 재난을 피했던 기억이.
먹먹해진 가슴에서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기억보다 더욱 선명해진 상실과 그리움이 아시카를 일깨웠다. 이 기억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달싹이는 입술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시카는 잰걸음으로 다가가 부친의 손을 잡았다. 어린 시절처럼 달려들어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갑자기 건너뛰어 버린 시간이 지독히 낯설었다.
“아버지….”
중년의 나이에 조금씩 탄력을 잃어버린 부친의 손은 여전히 보드라웠다.
‘아아, 이거였구나.’
로샤강 댐의 사고가 없어진 대신 드루쉬아와 아시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려 자랐다. 현실에서 샤프리가 있던 자리는 이곳에서 아시카의 자리였고.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불이 모조리 꺼진 저택 정원에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언제나 정복 차림을 하던 가문의 기사들이 모두 갑옷을 챙겨입고 무장한 상태였다.
“이그레인 공작님께서 영지로 가시던 길에 체포되어 수도로 이송되고 있답니다.”
“아버지,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예고 없이 몰아닥친 상황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설명할 시간 따윈 없었다. 란체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시카에게 미소 지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어. 아시카, 먼저 가거라.”
“안 돼요, 함께 가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곧 뒤를 따라가마.”
“아니요, 혼자 갈 수는 없어요.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시카는 란체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가짜 기억이라도 좋았다. 아버지가 살아있다. 겁먹은 어린 딸의 머리맡을 지켜주며 다정하게 안아주던 아버지가 살아있는 시간 속.
그러나 란체는 아시카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웨이브의 체포 소식에 그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탈리온 공작에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이리로 올 거다. 함께 가라. 너희 둘이 함께라면 괜찮을 거야. 잠시만 몸을 피해 있으면 연락하도록 하마.”
거짓말이다. 이 시간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시카는 알고 있었다.
가문의 멸족. 양쪽 가문의 직계는 모조리 살해당하고 이그레인과 탈리온은 끝내 멸문당하고 마는 절망적인 미래.
“싫어요, 아버지!”
“뭐 하고 있나. 어서 데려가지 않고!”
아이처럼 매달리며 떼쓰는 아시카를 기사들이 달려들어 안다시피 떼어놓았다.
“동쪽 별관에 침입자다!”
어둠을 가르며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란체는 아시카를 밀어내고 저택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란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펄번이 다급히 지시를 내리고 검을 든 기사들이 동료를 돕기 위해 달려갔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멀리서 무기 부딪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문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말을 끌고 오는 동안 정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그레인은 문을 열고 황명에 따라 순순히 체포에 응하라.”
견고한 문을 두드리는 소음과 병사들의 고함. 황실에서 보낸 병사들이었다.
‘뭐지? 저택 안의 침입자는 뭐고, 병사들은 뭐야?’
그녀가 정신없어하는 동안 호위 기사들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정문으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뒷문도 이미 막혔을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길로 나가야 합니다!”
멀리서 들리던 무기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급했던지 기사 하나가 그녀의 팔을 낚아채듯 당겨서 뛰기 시작했다.
“컥.”
바로 뒤에서 둔탁한 소음과 채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이 사그라들었다.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기사들의 등 뒤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아가씨, 도망치세요!”
아시카를 끌고 가던 기사가 팽개치듯 그녀를 앞으로 떠밀었다. 그러나 아시카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악!”
그녀를 지켜주던 기사가 바로 눈앞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솟구치는 피가 선명해서 아시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침입자는 이미 쓰러진 기사들에게 다시 검을 찔러넣으며 확실히 숨을 끊었다. 아시카가 혼자만 남은 걸 알고 상대는 여유롭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검은 옷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려 눈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생경한 눈빛에 살기를 내뿜는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드디어 잡았네.”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목전에 닥친 죽음을 느끼고 아시카의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왜….”
목 끝까지 치밀어오른 공포에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앞섰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네가 마지막이다. 원망하려거든 부정한 핏줄을 타고난 네 아비를 원망해라.”
부정한 핏줄. 그 말의 의미가 확연히 와닿았다.
‘그럼 탈리온은? 르쉬아는 어떻게 된 거야?“
더는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상대의 검을 피할 수도 없었다. 선연하게 날아드는 은빛 호선을 보며 아시카는 조금이라도 더 기억을 담아두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카랑, 캉.
순간 눈앞에 날아든 커다란 그림자가 검을 튕겨냈다. 더는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시카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부즈리?”
캉!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던 손이 파르라니 날 선 도끼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