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사흘째였다. 평소 아시카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은 모두 본채 밖으로 쫓겨났고 문 앞에는 기사 두 명이 밤낮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잔느가 아시카를 만나려고 애쓰다가 명령 불복종으로 추가 징계를 받았다. 쥴마는 아시카가 해오던 일들을 떠맡는 바람에 꼼짝없이 저택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고 어쩐 일인지 나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일은 뭐 하는 거야.’
이그레인에 속한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시키기 위해 나일을 고용한 게 아닌가. 이제쯤은 나서줘야 하는데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설마 떠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
이븐에게 가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일이 이븐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뭘 내주기로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뛰어난 약제사이자 연금술사인 이븐을 두고 아시카의 곁을 지키는 이유는 아마도 대공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그녀의 곁을 떠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후계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면, 그래도 내 곁에 남아있을까.’
웨이브의 한마디에 모든 권한을 몰수당하고 방에 갇혀버린 제 처지가 한심했다. 창문 아래에도 수시로 기사들이 오가는 바람에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3층에서 뛰어내릴 것도 아닌데 아래는 왜 지키는 거야.’
눈 부신 햇살마저 야속하게 느껴져서 창문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깟 결혼이 뭐라고.’
해 오던 대로 말 잘 듣는 손녀이자 후계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모든 일이 순조로워진다.
‘그냥 이대로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래야 하는데….’
지독한 악몽을 겪으면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건 아닐까. 그 때문에 드루쉬아와의 만남이 더욱 운명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두 달 가까이 더 이상의 환각도 없었다. 그 모두가 기이한 경험일 뿐 처음부터 숨겨진 의미 따윈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 출생에 대한 비밀과 환각 속에서 마주쳤던 비극 따위도.
이대로 드루쉬아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추문은 가문의 힘으로 틀어막으면 된다. 그러면 이제껏 꼬여버린 일들도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테고.
“아….”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에 숨을 멈췄다. 눈앞에 쉬운 답이 있는데 저도 모르는 자신이 그 답을 극렬히 거부했다.
‘나더러 어쩌라고.’
찰나의 유희에 스물두 해 동안 쌓아왔던 삶을 던져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르쉬아, 어쩌자고 일을 크게 만들었어.’
요령껏 피해갈 수조차 없게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드루쉬아는 분명 웨이브가 어떻게 나올지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무모하고 충동적인 성격이었나 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도 나는 웃음이 나네, 르쉬아.”
그녀는 숨기기 바빴는데 드루쉬아는 모든 문제를 던져버리고 과감하게 제 마음을 드러냈다. 물론 거기에는 탈리온과 이그레인이 결합했을 때의 이익도 계산에 넣었을 테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
어쩐지 이번만큼은 계산보다 더 강한 진심이 일을 크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원하는 대로 끌려가 주고 싶은 바람이 일었다.
‘아직은 아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렇게 끌려가듯 제 인생을 휘둘릴 수는 없었다. 지금 이 결혼이 가문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판단이 서자 마음을 잡기는 한결 쉬워졌다.
판단력을 상실한 건 그녀가 아니라 웨이브였다. 무엇이 웨이브를 그토록 다급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상황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뭘 알아야 조부님을 설득하지.’
갇혀있는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최측근 사용인들마저 접근이 금지되어서 아시카는 완전히 손발이 묶여버렸다.
아시카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문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조용조용 어르는 목소리에 이어 와앙, 하는 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누구?”
사용인들의 아이가 본채에 왔을 리는 없었다.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원.”
“흐어엉, 아가씨 보려고 왔는데….”
이제 여섯 살 된 리온은 아시카의 허리께 정도로 작은 아이였다.
“잘 타이르면 될 걸, 왜 애를 울리고 그래?”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시카는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 보자 언제 울었냐는 듯 리온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엄마는 만나고 왔니?”
“네, 레아랑 같이 계세요.”
아이는 아시카의 눈치를 보며 제 손을 맞잡고 꼬물거렸다.
“저어….”
“왜, 할 말이 있니?”
“한 번만 만져봐도 돼요?”
“아.”
귀족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것은 자칫 큰 처벌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부유한 상인 계층이 늘어나면서 하위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는 줄었지만 고위 귀족은 여전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아이는 그걸 알기에 고사리 같은 손을 움켜쥐고 눈치를 보는 것이다.
“괜찮으니까 이리 와.”
그녀가 손을 내밀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아시카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조그맣고 여린 몸이었다. 이렇게 작은데도 오밀조밀 사람의 형체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라….’
문득 꿈속에서 걷기조차 힘든 다리를 끌며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를 갖고 싶어 했었지. 르쉬아와 나의 아이를.’
하지만 제 몸 하나 운신하기 어려워서 아이는 꿈도 꾸지 못했다. 만약 지금이라면 어떨까.
드루쉬아를 닮은 파란 눈동자와 햇살을 담은 머리칼을 지닌 작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안겨 온다면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를까. 생각만으로도 가슴께에 뭉글뭉글한 감정이 차오른다.
“리온, 잠깐 내 방에서 놀다가 갈래?”
“와아, 좋아요! 레아에게 자랑해야지!”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아시카가 리온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기사가 리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시카의 눈초리가 절로 뾰족해졌다.
“뭐지? 아이도 안된다는 거야?”
“아가씨 방에는 허락받은 인원 외에는 출입이 불가합니다.”
“이 조그만 애가 뭘 하겠다고.”
“죄송합니다.”
융통성 없는 기사는 명령에 충실했다. 아시카와 기사의 대치를 보고 아이가 슬그머니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물러났다.
“엄마가 이 저택에서는 기사님이 하지 말라는 건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 잔느가 참 잘 가르쳤구나.”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아시카는 아쉬워하면서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리온은 고사리손을 배꼽 위에 올리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엄마랑 레아랑 손잡고 또 찾아올게요.”
“여긴 다시 오면 안 된다, 꼬마야.”
리온의 인사에 기사가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어린 소년은 지그시 기사를 노려보고는 팩 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호위 기사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허, 맹랑한 녀석.”
“아가씨, 방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문 닫겠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여섯 살 꼬맹이밖에 없는 곳이라 내가 다 미안하네.”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어조가 되었다. 기사들은 죄가 없지만 지나치게 충실한 것도 야속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시카는 미련 없이 방으로 돌아섰다.
등 뒤로 편히 쉬라는 인사가 들리고 문이 닫혔다. 아시카는 재빨리 침대 쪽으로 움직여 움켜쥔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얇은 종이가 돌돌 말려 있었다.
‘조그만 아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리온은 영특한 아이였다. 제 엄마의 지시로 주인 아가씨에게 쪽지를 몰래 건네줄 만큼.
아시카는 몰랐지만 그간 끊임없이 그녀에게 연락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최측근 사용인들이 모두 실패하자 마침내 잔느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온 것이다.
아시카는 쪽지를 펼쳐 들고 느슨하게 미소 지었다. 쪽지를 적어 보낸 사람은 예상대로 나일이었다.
* * *
저택은 평소보다 더욱 조용했다. 공작과 소공작의 다툼으로 사용인들이 눈치껏 숨을 죽인 탓에 삭막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아시카는 평소에 잘 입지 않는 노란 드레스로 갈아입고 창문가를 서성였다. 언제 어디에서 나일이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서 다리가 뻐근해질 때까지 방안을 배회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봤겠지.’
초조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시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녀가 다녀간 뒤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면 좋으련만 긴장으로 신경이 곤두서서 침대에 누워있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움켜쥔 손에서는 땀이 차올랐다.
바지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숨을 가다듬기를 얼마간, 문밖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이어 미끄러지듯 고요하게 방문이 열렸다.
“많이 기다렸어요?”
“나일.”
아시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처럼 나일이 반가웠던 적이 또 있을까. 만개한 꽃처럼 피어오른 미소에 나일이 흠칫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웃지 마요. 정들잖아요.”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안 보였던 거야?”
“내가 궁금하긴 했나 보네요. 잔느의 부탁으로 이곳저곳 뛰어다니느라 바빴죠.”
아시카의 손발이 되어주던 잔느와 쥴마가 모두 저택에 갇히면서 나일이 대신 밖을 오갔다. 대충 그림이 그려져서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나일의 재촉에 아시카는 챙겨두었던 짐을 들고 방문을 나섰다. 그러나 문 앞에 기절해 있는 기사 둘을 보고 아시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탈리온만큼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밀리는 실력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기사들보다 훨씬 호리호리한 체구의 나일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안 가요?”
“…가야지.”
왜 이런 실력으로 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떠오르는 의문을 이내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