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둔탁한 충격음과 이어지는 말소리. 칼프의 목소리였지만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아시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드루쉬아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속이 타들어 갔다.
얼마 뒤, 문이 열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가문의 기사들이 칼프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설마, 크라우니 남작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칼프는 손수건으로 까맣게 젖은 앞섶을 털어내고 있었다. 옷을 적신 것은 검은 잉크였다.
‘조부님께서 잉크병을 던진 거야?’
평소 점잖던 웨이브로서는 상상도 못 할 무례였다. 당황스럽기는 칼프도 마찬가지일 텐데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아시카는 놀란 나머지 기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도 잊었다. 문득 고개를 든 칼프와 시선이 마주쳤다. 동요 없던 시선이 탐색하듯 아시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문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호위 기사의 목소리에 아시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기 전, 그대로 사용인들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본채 밖으로 나온 뒤에는 뛰다시피 정원을 가로질렀다.
“아가씨, 이대로 나가실 겁니까?”
잔느가 황급히 뒤를 쫓아오는데도 아시카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심상치 않아.’
당장 무슨 일이든 터질 것만 같은 예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에 바삐 걸음을 놀렸다. 그러나 얼마 뒤 아시카와 잔느는 가문의 기사들에게 앞이 가로막혔다.
“아가씨께서 외출하시는데 이 무슨 무례야.”
“베르트 경, 그게….”
잔느의 호통에 기사들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공작님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아가씨를 모셔오랍니다.”
기사들 뒤에서 기사단장 펄번 콜테른이 빠르게 다가왔다.
“콜테른 경,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는 길이야. 조부님께 저녁때 뵙겠다고 전해줘.”
“죄송합니다만, 바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짙은 갈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지닌 펄번은 키가 큰 잔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만큼 장신이었다. 파병군으로 보낼 사람이 없는 이그레인을 대신해 대리파병을 다녀온 사내였다.
제국의 모든 귀족 가문은 기사가 있든 없든 한 세대에 한 명씩 파병군을 보내야 한다. 펄번은 이그레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파병을 다녀온 뒤 기사단장이 되었다. 뼛속 깊이 웨이브에게 충성하는 사내였다.
평소와 달리 착잡한 펄번의 표정에 아시카의 등줄기에 불길한 예감이 흘렀다.
“아가씨, 일단 공작님을 뵙고 나가시죠.”
한 걸음 나서려는 잔느의 앞을 펄번이 가로막았다.
“베르트 경은 지금부터 아가씨의 호위 업무에서 제외된다. 검을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서 대기해.”
“단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날벼락 같은 지시에 잔느가 언성을 높였다.
“경마장에서 아가씨를 홀로 방치했다고 들었다. 크게 사고가 날 뻔했다지?”
“아니, 그건….”
변명의 여지도 없는 실책이라 잔느는 말을 잃었다.
“그걸 이제 와서 징계를 내린다고?”
불길한 예감은 기어이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아시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내 호위 기사를 데려간다는 건 외출도 하지 말라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공작님을 만나보시는 게 우선입니다.”
예의 바르면서도 강경한 기사단장의 태도는 말로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브론이 주춤거리며 잔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잔느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런, 씨….”
“잔느, 나는 조부님께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
아시카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가주가 내리는 명령에 잔느라고 버틸 도리는 없었다. 튀어나오는 욕설을 삼키며 잔느가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리브론에게 넘겼다.
최측근 호위를 떨어뜨려 놓는 의미는 명확했다. 그걸 알기에 검을 건네는 잔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참에 쉬면서 애들하고 시간도 좀 보내고 그래. 리온과 레아가 놀러 온 지도 오래됐잖아. 안 그래?”
차분한 어조에 잔느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시카는 힘이 잔뜩 들어간 잔느의 손을 토닥이고 물러났다.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본채로 걸음을 옮겼다.
“애들이 아가씨를 뵌 지 오래되기는 했지.”
잔느는 긴 한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아시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집무실 안에는 금세 터질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시카가 들어온 뒤부터 웨이브는 무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을 삭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아시카의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웨이브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폭발할 것 같은 표정과 달리 웨이브는 서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탈리온 공작과는 어찌 아는 사이냐.”
해마다 협의 테이블에서 만나는 걸 묻는 게 아니었다. 아시카의 손이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어 든다. 내리깐 눈꺼풀에서 바르르 경련이 일었다.
“지난번 경마장 사고 때 크게 다칠 뻔한 걸 탈리온 공작이 구해줬어요.”
“그것뿐이냐?”
아시카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번뜩였다.
“고작 그 정도만으로 탈리온 공작이 내게 이런 서신을 보내?”
웨이브의 손에서 종이 한 장이 거칠게 흔들렸다. 탈리온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공문서였다. 오늘 사달을 낸 문제의 원인이기도 한.
“무슨 서신이길래….”
“청혼서다! 그 정신 나간 공작이 네게 청혼서를 보냈어!”
노호와도 같은 고함이 집무실을 쩌렁 울렸다. 아시카는 놀란 나머지 그대로 혀를 깨물뻔했다.
“청혼서라니! 어찌 감히 탈리온이 네게 청혼서를 보낼 생각을 해!”
웨이브는 체면도 평정도 잊었다. 폭발적으로 내지르는 고함 소리에 집무실뿐 아니라 공작가 전체가 들썩였다.
아시카는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렵기보다 황망한 마음에 말을 잃었다.
‘미쳤어. 어떻게 청혼서 보낼 생각을 해?’
행여 누가 볼세라, 들킬세라 전전긍긍하며 비밀리에 이어온 만남이었다. 둘의 관계가 드러날 경우 양쪽 가문에 미칠 파장과 뒤따라올 추문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상의 한마디 없이, 어떻게 이런….’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두려웠어야 할 웨이브의 질책도 두렵지 않았다.
‘르쉬아가 청혼서를 보내왔어.’
그녀보다 계산이 빠른 남자였다. 청혼서가 일으킬 파장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웠고 다음에는 황망했다. 그리고 복잡미묘하게 혼란스러운 기분.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어째서 그놈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웨이브의 눈에는 혼란스러워하는 아시카의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탈리온이라는 이름을 달고 날아온 청혼서에 기가 막혀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아시카,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놈이 청혼서 따위를 보낼 리 없잖느냐!”
아시카는 황급히 시선을 떨궜다. 미처 숨기지 못한 속내가 다급한 표정 속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왜 부정을 안 해? 정말로 그놈하고 무슨 관계라도 되는 거냐?”
아니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변명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변명하는 순간 정말로 드루쉬아와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아시카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받아들인 감정이었다. 드러내놓지는 못했어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웨이브는 제 손녀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을 터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기가 막혀서 또다시 노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네가 어찌 이런 짓을 해! 네 아비로도 모자라서 너까지!”
고함이 뚝 끊겼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말을 웨이브는 간신히 억눌렀다.
‘뭐?’
아시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조부의 입에서 부친이 언급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버지가 왜요?”
저를 꼭 닮은 검은 눈동자를 보고 웨이브가 시선을 돌렸다. 긴 숨을 토해내며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악연이다. 탈리온과 이그레인은 지독한 악연이야. 아주 징글징글하구나.”
“조부님.”
“오늘부터 네 결혼문제가 마무리될 때까지 근신해라.”
결혼문제가 마무리될 때까지. 그것이 언제를 말하는 걸까. 아시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런 식으로 결혼을 진행할 수는 없어요.”
“네가 감히 내 뜻을 거역해!”
탕,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거칠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아시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웨이브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시간을…,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생각할 시간을 줬더니 네 멋대로 파혼하고, 말도 안 되는 놈하고 사랑놀음이나 하고. 그러고도 네가 정녕 이그레인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어!”
“조부님, 저는….”
“닥쳐라. 가문보다 제 안위를 우선으로 하는 후계자 따윈 필요 없다. 네가 이 결혼을 거부하면 더는 소공작도 뭣도 아니야!”
아시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온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제게 그런 말씀을….”
손끝이 차게 식고 호흡이 빨라진다.
여덟 살 때부터 지난 14년간 오로지 웨이브의 뜻대로 살아왔다. 소공작의 지위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기 위해, 당연히 누렸어야 할 희로애락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왔다.
그런데 웨이브는 결혼을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힘겹게 버텨온 시간을 간단하게 부정해버렸다.
“펄번!”
아시카가 더 대꾸하기도 전에 웨이브가 기사단장을 불렀다. 문이 열리고 대기하고 있던 펄번과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시카를 침실로 보내. 내 지시가 있기 전에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내보내지 마.”
아시카는 말없이 웨이브를 바라보았다. 충격을 갈무리한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웨이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카를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아가씨.”
펄번이 조심스럽게 아시카를 불렀다.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
아시카는 웨이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기다리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차디찬 표정에 펄번이 시선을 피했다. 웨이브와 꼭 닮은 검은 눈동자가 시리게 가라앉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아시카는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붓한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