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아시카의 하녀 마릴린은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는데 홀로 겁먹은 얼굴이었다.
“아가씨, 저예요.”
아시카의 개인 서재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마릴린은 안에 들어선 뒤에야 긴 숨을 토해냈다.
“가져왔어?”
“네, 아가씨.”
마릴린은 앞치마 아래 숨겨놓았던 두툼한 장부 두 권과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이그레인 공작가 서기관의 물건이었다.
“본 사람은 없지?”
“네, 아가씨. 근데….”
마릴린이 머뭇거리며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아시카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두 번은 안 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에 마릴린은 노골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이 약한 사람에게 못 할 짓을 시켰네.’
아무리 수족처럼 부리는 하녀라도 두 번은 써먹기 어렵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릴린, 1시간 뒤에 다시 오겠니?”
“네, 혹시 그 전에 끝나면 사람을 보내주세요.”
자리를 오래 비우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마릴린은 바로 알아듣고 서재에서 나갔다.
아시카는 제 손에 들어온 장부를 쥴마에게 건네고 접혀있던 서신을 펼쳐 들었다. 페리도 백작가에서 가장 최근에 보내온 서신이었다.
“언제부터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대략 보름 이내에 한꺼번에 서신이 발송된 때를 기점으로 옮겨 적어. 수신된 것과 발신한 것 모두.”
마릴린이 가져온 것은 외부와 주고받은 공식적인 서신 목록이었다. 서신은 이미 분류해서 잘 보관되었을 것이기에 아쉬운 대로 목록이라도 확인하려는 것이다.
무도회에서 돌아올 때만 해도 당장 웨이브를 찾아가 물어보려고 했다. 저를 두고 대체 어쩔 심산인지. 그러나 아시카에게 웨이브는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사람이었다. 준비 없이 찾아갔다가는 몇 마디 하지도 못할 것이 뻔했다.
“이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잔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록을 옮겨적는 쥴마를 보았다.
“기존에 거래하던 가문이 아닌데 갑작스럽게 서신이 자주 오간 곳을 확인하면 돼. 페리도 백작가를 포함해서 어떤 가문이 후보가 됐는지만 알면 나머지는 외부에 의뢰해도 되니까.”
“최근 부쩍 서신이 많이 오간 곳이 페리도 백작가와 아르반테스 백작가, 마제스… 마제스 백작가는 폐황후의 가문이 아닙니까?”
“마제스 백작가에도 서신을 보냈다고?”
“비슷한 시기에 목록에 있습니다.”
현재의 황후는 싱클라델트 공작가 출신으로 황제가 두 번째로 맞이한 신부였다. 첫 번째 황후는 정치 기반이 없던 마제스 백작가의 장녀였는데 황태후의 모진 핍박을 받다가 끝내 쫓겨나듯 궁을 떠나고 말았다.
“마제스 백작이 본래 중립 세력이긴 했지. 회신은?”
“보낸 기록만 있고 회신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처음 아시카의 약혼을 진행할 때와는 뭔가가 다르다. 그때는 중립세력이면서도 수도 내에서 영향력이 큰 가문을 위주로 청혼서를 받았었다.
‘뭐가 달라진 거야? 마이헬러 후작가를 거절하고 왜 하필 페리도지?’
명망 있는 가문이지만 수도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페리도 백작가.
조건만 보자면 페리도 백작가와 마이헬러 후작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탈리온도 마이헬러와 정략혼을 진행했을 테고. 오클레인 후작가와 비교해도 한참 처지는 상대였다.
“페리도 백작가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있어?”
“수도에서는 별 볼 일 없는 가문처럼 취급받지만, 제국 밖에서는 다릅니다.”
쥴마의 대답에 아시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무역을 크게 하는 가문도 아니잖아.”
“대신 페리도 백작가가 외국 왕족의 혈통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외국 왕족?”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선대 백작 부인이 왕족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백작이 해외에서 꽤 오래 체류했다더군요. 아마도 외국에서는 왕가의 일원으로 대우받는 모양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 가문의 사업과는 상관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저도 공작님의 뜻을 헤아리긴 어렵군요.”
대답을 마치고 쥴마는 나머지 목록을 빠르게 옮겨적었다.
아시카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제국 밖에까지 신경을 쓰시지?’
사업을 해외로 확장한다 해도 굳이 다른 가문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조부님답지 않아. 너무 성급해.’
이유라도 말해주면 좋으련만. 언제나처럼 웨이브는 지시만 내릴 뿐,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아시카와 잔느가 침묵한 가운데 사각사각 빠른 펜 놀림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얼마간, 쥴마가 목록을 적은 종이를 아시카에게 건넸다.
“그런데 아가씨, 혹시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건네받은 문서를 살피던 아시카가 고개를 들었다.
“오클레인 후작의 장남이 마차사고를 당했답니다.”
“뭐? 오클레인?”
순간 아시카의 손에 있던 종이가 맥없이 떨어졌다. 얇은 종이가 책상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도 아시카는 멍한 얼굴이었다.
오클레인, 무려 석 달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불과 석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몇 년쯤 지난 양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게 왜?”
“쉬쉬하고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사망한 것 같습니다.”
아시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오클레인 후작가에… 혹시 다른 직계가 있었어?”
“아들 둘이 전부였습니다. 서자나 서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남이 사고로 죽었다면 후작위는….”
“네. 이변이 없는 한 차남이 소후작이 될 겁니다.”
머리가 띵해질 만큼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시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코랄이 소후작이 된다. 그 말은 쫓겨나다시피 수도를 떠난 코랄이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맙소사. 수도에서 코랄을 다시 봐야 한다고?’
별장에 침입해 저에게 매달리던 코랄이 생각났다. 광기 어린 눈으로 달려들던 남자의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아시카에게 최악의 기억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이야? 혹시 오클레인 영지에서 사람이 온다는 말도 있었어?”
“당장은 그게 전부입니다. 다른 정보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말해두긴 했습니다만 신경 쓰이시면 재촉해 볼까요?”
신경이 쓰이면? 이게 단지 신경이 쓰이는 정도일까?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불안하다. 코랄이 다시 수도로 온다는 사실이.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 다시 마주칠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했다.
“쥴마는 특이점이 없나 장부를 더 살펴보고 마릴린에게 넘겨줘. 잔느는 나를 따라와.”
“나가시는 겁니까?”
잔느의 질문에 아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쁘게 서재를 나섰다.
“나일은 어디 있어?”
“아까 나가는 걸 봤습니다. 저녁 식사 전에는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나일이 이븐의 아트샵에 갈 때가 됐는지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잔느의 인맥은 지금 도움이 되지 않아. 차라리 이븐을 이용하는 게 나을까.’
아시카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마음이 급해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외투만 몸에 걸치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2층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무심결에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지던 잔느가 걸음을 멈췄다.
“어.”
다소 황망한 듯 얼빠진 표정이었다. 아시카도 걸음을 멈추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헉.”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복도 창을 바라보고 얼어붙은 사이 마차는 빠르게 본채에 가까워졌다.
윤기 나는 검은색에 크기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커다란 사두마차. 고풍스럽게 새겨진 가문의 문양이 선명해서 착각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절대 이곳에서는 볼 일 없으리라 여긴 가문의 문양이었다.
“왜… 탈리온 공작가의 마차가 여기 있습니까?”
잔느의 황망한 물음은 아시카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카도 놀라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차 문이 열리고 집사의 마중을 받는 사람의 얼굴이 낯익었다.
“칼프 크라우니 남작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프였다. 공작의 보좌관쯤 되면 어지간한 가문에 심부름꾼으로 다닐 일은 없었다. 가문의 중대사를 전달할 때나 최대한의 격식을 갖춰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집사와 함께 밖으로 나온 사용인들이 탈리온 공작가의 문양을 보고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세상에, 탈리온 공작의 보좌관이야!”
누군가 칼프를 알아보았다. 탈리온 공작의 보좌관이라는 말에 사용인들이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칼프는 당황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맙소사.’
이대로면 수도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드루쉬아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어쩌자고 칼프가 여기까지 온 거야.’
아시카는 잔느의 옷소매를 잡더니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왜요?”
황망한 물음에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잔느를 이끌고 아시카가 향한 곳은 웨이브의 집무실 쪽 사용인들의 계단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계단 근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내 손님이 아니야. 조부님을 뵈러 온 거야.”
집무실 쪽에서 어수선한 움직임이 느껴지자 아시카는 기둥 뒤로 몸을 더 바짝 붙였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무실 문이 열렸다가 이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시카의 심장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박동했다. 제 심장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느껴질 만큼 사위가 고요하다.
‘무슨 일이야? 대체 왜?’
그동안 무책임하게 일을 벌이고 손을 놓았던 것은 아시카였다. 먼저 시작한 것도 그녀였고 드루쉬아를 이리저리 휘둘러댄 것도 그녀였다. 자신의 감정이 뭔지도 모른 채.
그동안 드루쉬아는 내내 아시카의 뜻에 따라주었다. 침실 파트너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판단을 미뤄두었다. 언제나 제 이익이 우선인 남자니까 적당한 때가 되면 관계를 정리하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당신이 시작했다고 해서 당신 마음대로 끝낼 수 있다는 착각은 하지 마.」
홧김에 내뱉은 말이 아니었나.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조차 아니었을까.
아시카가 기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이었다.
“무슨 정신 나간 짓이야! 탈리온 공작은 나를 희롱하는 건가!”
고요하던 집무실에서 쩌렁하는 고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