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모르셨나 보군요. 그것 때문에 요 며칠 수도의 귀족 가문들이 들썩였었습니다.”
청혼서를 보내면서도 회신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아시카는 그제야 생각난 것이 있었다.
“혹시 경마장에도 그래서 오셨던 건가요?”
“결정되기 전에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데이란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시카는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어제 이그레인 공작님을 뵈었는데 가을쯤에는 자리를 잡기를 원하시더군요.”
아시카는 너무 놀라서 말을 잃었다. 청혼서를 받는다는 말도 듣지 못했는데 웨이브는 이미 후보자까지 만났다. 거기다 급박한 결혼 일정까지.
‘지금이 여름인데 가을에 결혼을? 말도 안 돼!’
고위 귀족의 결혼이었다. 통상적으로 약혼 기간은 1년 이상, 결혼 준비만 해도 반년은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두 달 만에 결혼까지 밀어붙이시겠다고?’
어젯밤 단호하게 결혼을 종용하던 웨이브가 떠올랐다. 강행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반발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결혼 해야 한다고? 조부님께서 골라주는 아무나하고?’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진다. 아시카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아시카의 표정을 살피던 데이란은 그녀가 정말로 몰랐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정략이라도 당사자가 과정조차 모를 수는 없지 않은가.
“제가 섣부르게 말을 꺼낸 것 같습니다. 양쪽 가문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진척되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죠.”
놀란 나머지 숨이 차올랐다. 아시카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며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그럼 다음에 만날 약속이라도….”
“죄송해요.”
그녀를 부르는 상대에게서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얼굴을 마주했다가는 감정을 숨기기 어려울 것 같아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실 생각인 거야.’
순탄하다고 여겼던 코랄과의 관계도 2년이나 약혼 기간을 거쳐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만에 예정에도 없던 남자와 결혼하라니.’
처음으로 웨이브에게 화가 났다. 공작가의 가주이기 전에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인생을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아니, 그건 핑계일 뿐이다. 코랄과 약혼할 때도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소공작이라는 위치는 선택의 권리보다 짊어져야 할 책임이 중요하다는 걸 아시카에게 끊임없이 일깨우는 자리였기에.
지금 화가 나는 건 그녀가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함께 있고픈 사람이 생겼다.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그런 사람을 두고 생판 낯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고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 잠자리를 해야만 한다. 그 모든 과정이 몸서리쳐지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냉정을 가장했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분노인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뛰다시피 빨라졌다. 다급한 발걸음은 어딘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움직였다. 어둑한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악!”
상대는 넘어지려는 아시카를 재빨리 잡아챘다. 바로 코앞에는 가파른 계단이 아래로 뻗어있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계단에 굴러떨어질 뻔했다.
휘청이던 몸은 잡힌 팔과 함께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이런, 조심성 없게.”
귀에 설지만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아시카의 시선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하얀 손에서 차츰 위로 올라갔다.
유려한 선을 가진 남자의 실루엣. 어둑한 조명에도 남자가 입은 연미복이 눈에 거슬릴 만큼 화려하다.
“마이헬러 공자.”
“또 뵙습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에르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이번에는 인사는 듣는군요. 지난번처럼 또 도망가시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 핀잔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저를 도와준 사람을 팽개치고 도망친 것은 사실이니까.
“죄송해요. 그때는 제가 경황이 없었어요.”
사과하면서 아시카는 잡혀있는 두 팔을 당겼다. 놓아달라는 뜻을 분명히 밝히는 몸짓이었으나 에르윈은 놓아주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은데 홀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아시카는 저도 모르게 잡혀있는 팔을 강하게 뿌리쳤다. 순간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에르윈은 재빨리 아시카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그것 보세요. 도와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시카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몸이 밀착한 탓에 빠르게 진동하는 심장박동을 숨길 수가 없었다.
“놓아… 주세요.”
“왜 저를 보면 경기라도 일으킬 것처럼 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더 단단하게 팔에 힘을 주었다. 뼈대가 가는 남자인데도 밀어내기가 어려웠다.
“청혼서도 매정하게 거절하시더니. 제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마이헬러 후작가의 청혼서라니. 아시카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아마도 웨이브의 선에서 처리된 모양이었다. 처음 듣는 얘기지만 왜 그랬을지 이해가 되었다.
“탈리온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유는 알만하지 않나요?”
“그 문제를 생각하면 오히려 저만큼 조건에 맞는 상대도 없을 텐데요?”
에르윈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파혼으로 관계가 어그러졌기에 이전과 사정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오랜 관계가 그렇게 쉽게 정리될 리가요. 그리 단순하게….”
아시카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인 양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이 남자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다는 본능의 소리.
문득 그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이질적이고도 선명한 빛을 내었다.
‘눈이….’
순간 아시카는 숨을 멈췄다. 놀란 나머지 상대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숲의 녹음을 그대로 담은 청록색의 눈동자. 그 주위로 희미하게 번져가는 녹색이 어둑한 가운데에도 또렷하게 보였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입니까? 제 눈을 처음 보시는 것도 아닐 텐데요.”
“아!”
아시카는 있는 힘껏 상대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에르윈도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무례라니요. 안색이 좋지 않아서 살펴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아시카의 몸에서는 힘이 쭉 빠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아무도 몰랐던 거야?’
오로지 탈리온만이 알고 있다는 비밀. 드루쉬아가 말해준 대로라면 탈리온의 혈족에게서만 나타난다는 특징이었다.
“지난번의 충격으로 아직 힘드신 모양입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수도에 정치 중립인 가문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너무 노골적인 태도가 아닙니까? 레이디 이그레인답지 않군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아시카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상대를 적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난감한 가운데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말은 이제 탈리온과의 관계는 정리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나?”
아시카와 에르윈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상대를 확인하고 에르윈의 표정이 굳어졌다.
“탈리온 공작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아시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수도를 떠난 게 아니었어?’
분명 오늘 떠난다던 사람이 연미복까지 갖춰 입고 눈앞에 나타났다. 드루쉬아의 시선은 짧게 아시카를 스쳐서 다시 에르윈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지? 왜?’
“초대장을 받았으니 왔을 뿐이지. 그나저나 마이헬러가 이렇게 태세 전환이 빠를 줄은 몰랐어.”
“부친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자식 된 도리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요.”
“궁금한 게 있으면 후작에게 가서 따져라, 뭐 그런 의미인가?”
빈정거리는 어조에 에르윈의 표정이 구겨졌다. 드루쉬아는 느릿하면서도 단호한 걸음으로 아시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샤프리는 아직도 파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공작님께선 퍽 여유로운 모양입니다.”
“아, 그렇지않아도 그 건으로 궁금한 게 많은데 후작이 하는 일이라 소후작께선 아는 바가 없을 테지?”
“저나 샤프리의 일은 공작님께서 관여할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왜 이러십니까?”
“상관이 없다고? 정말 그런가?”
드루쉬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뱉었다.
화난 얼굴보다 빈정거리는 미소가 더욱 사나워 보이는 남자.
내내 예의 바른 신사처럼 굴어서 잊고 있었다. 드루쉬아는 집무실의 책상보다 거친 고함이 난무하는 기사들의 싸움터가 어울리는 남자였다.에르윈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유려해 보였던 체형은 건장한 검사의 그것 앞에서 한없이 빈약하게 보였다. 태생적으로 맹수와도 같은 사내 앞에서는 에르윈의 귀족적인 얼굴도 화려하게 꾸며 입은 옷차림도 빛이 바랬다.
그녀를 몰아붙이던 기세가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고 아시카는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저렇게 속내가 빤한데 내가 왜 겁을 먹었을까.’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시선이 에르윈에게 향해 있는 것이 못마땅한 듯, 한 걸음 더 움직여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마이헬러 후작께서 한번 방문해달라고 초대해 주시더군.”
“그럼 조만간 다시 뵐 수 있겠군요.”
에르윈은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포식자를 피하고 싶은 짐승처럼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아마도 그렇게 될 거야.”
대화를 끝내고자 하는 단호한 어조였다. 의도를 알아차리고 에르윈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드루쉬아는 에르윈이 복도를 벗어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복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아시카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었던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아시카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드루쉬아가 뒤돌아서면서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팔이 잡히는 순간 갸우뚱하던 몸이 그대로 그의 품으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