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해가 저물어가는 숲에는 붉은빛이 나른하게 번져갔다. 산장 입구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은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말에서 내렸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기다린 지가 두 시간이 넘었다. 그 시간 내내 드루쉬아는 길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멀리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시야에 나타난 이는 그가 고대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미아?”
“각하, 아가씨께서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미아는 급하게 말을 멈추고 내려서 예의를 갖췄다. 빈손으로 온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드루쉬아는 말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미아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며. 그러나 더해지는 설명이나 변명 따윈 없었다.
“그게 다인가?”
“…네, 각하.”
드루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언제나처럼 만나자는 제안에 돌아온 짤막한 대답. 서신을 직접 써서 넘겨주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야박하게 느껴질 만큼 성의 없이 돌아온 ‘미안하다’는 한마디는 뭘 의미하는 걸까.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어서, 그나마 만나자는 요청조차 거절해버려서, 혹은 앞으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서.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함축하는 의미는 아닐까.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여자가 진짜.’
아무렇지 않은 듯 냉한 얼굴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하. 이건 뭐.”
드루쉬아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주인의 불안정한 기분을 느끼고 가만히 서 있던 말이 투레질을 해댔다.
“각하,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숲을 나가야 합니다. 영지까지 갈 길이 멉니다.”
보다못해 미하일이 나섰다. 명령을 기다리던 기사들도 모두 드루쉬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대공령을 거쳐 탈리온 영지까지 가려면 못해도 열흘. 지금 떠나면 한 달가량은 수도를 비우게 된다. 갈 길이 바빴지만 한 번이라도 아시카의 얼굴을 보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거절이라.’
분명 서신을 통해 상황을 설명했는데도 가타부타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아시카는 지금 저택에 있는 건가?”
“저, 그게.”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미아는 답을 망설였다. 저택을 나오기 전에 갑작스럽게 부티크에서 사람들이 방문한 것을 보았다. 아시카가 예정에도 없던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싱클라델트 공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뭐?”
드루쉬아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내 서신은 무시해놓고, 어딜 갔다고?’
미혼인 귀족 여성이 즐기지도 않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목적이 뭐가 있을까.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결혼 상대를 찾는 것.
군더더기 없는 짤막한 한마디, ‘미안하다’는 건 그런 의미였을까.
“미치겠군.”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치솟았다. 그토록 열렬하게 저와 침대에서 뒹굴던 여자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가 수도를 떠나있겠다고 서신을 보내자마자.
지난 한 달 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그가 떠나있는 앞으로의 한 달 동안은 또 무슨 일이 생기게 될까. 감히 예측도 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 수도를 떠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
“영지로 가는 일정은 미룬다. 수도로 복귀해.”
“각하!”
미하일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렵사리 출발한 길이었다. 장거리를 오가는 만큼 단시간 내에 준비하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수도 저택 또한 칼프가 드루쉬아를 대신하기 위해 일을 인계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문제 있나?”
돌아보는 드루쉬아의 낯빛이 싸늘하다.
문제가 있냐니, 드루쉬아의 일정이 바뀌는 것 하나로 줄줄이 따라올 문제가 어디 하나둘이던가.
‘대체 뭘 어쩌시려고.’
미하일은 하고 싶은 말을 가득 눌러 담고 입을 다물었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나는 먼저 출발할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들 따라와.”
지시를 내리기가 무섭게 드루쉬아는 말을 출발시켰다. 단숨에 박차를 가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버려지다시피 남게 된 미하일과 기사들은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각하께서 왜 저러시는 거야? 네가 말한 아가씨가 설마 레이디 이그레인은 아니겠지?”
미하일의 질문에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영지와 대공령을 오가느라 바빴던 미하일은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몰랐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울 만도 하다.
“누가 설명 좀 해줘. 나도 알건 알아야 하잖아!”
상황을 아는 기사들은 미하일의 외침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탈리온 공작께서 여자에게 미친것 같다는 말을 누가 꺼낼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상대가 이그레인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 * *
‘결혼, 결혼이라.’
이미 한 번 엎어졌던 결혼이다. 지켜보는 눈이 많은 만큼 당분간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줄 알았다.
‘왜 이렇게 서두르시지?’
대공령의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안팎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황실까지 개입해 문제가 커지고 있는데 당장 결혼부터 하라니.
한미한 귀족의 딸이나 명망 있는 고위 귀족의 딸이나 결혼 시장에 나온 이상 똑같은 처지가 된다. 가치를 평가하고 값을 매겨 최적의 상대와 결합하는 것.
‘숨 막혀.’
가문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수하리라 마음먹었던 일이 지금은 숨통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아시카는 제 손에 들린 잔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값비싼 크리스털 잔은 사방에 난무하는 빛을 반사해 보석만큼이나 화려한 빛을 내었다. 아름답지만 손안에 들어온 시린 냉기는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는 9월에는….”
아까부터 곁에서 열심히 떠들던 남자의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겨 들렸다. 무도회장을 가득 채운 음악 소리마저 아득한 느낌. 남자는 아시카의 정신이 딴 데 팔려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백작가라고 했나? 아니 후작가였나?’
아시카에게 다가오던 무수히 많은 남자들을 제치고 옆자리를 차지한 남자였다. 그런데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꾸조차 하지 않는데도 남자는 끈질기게 제 할 말을 떠들어댔다.
“다음 달 축제에 파트너로 모시고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시카는 멍한 눈을 깜박이다 지나가는 시종을 불러 잔을 넘겼다.
“레이디 이그레인?”
“오랜만에 나왔더니 눈이 어지럽네요. 저는 잠시 쉬었다 올게요.”
“그럼 대답이라도….”
“죄송해요.”
황망한 표정의 남자를 뒤로하고 아시카는 걸음을 서둘렀다. 두 사람을 주시하던 귀족들이 그녀가 혼자 된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시카는 방향을 바꿔 남녀가 춤을 추고 있는 홀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아무도 더는 다가오지 못하도록 도망치듯 홀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무도회가 한창인 연회홀의 2층과 3층은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이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앞뒤 따지지 않고 문을 열었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헉.”
반쯤 헐벗은 남녀는 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뒤엉켜 있었다. 아시카는 다급히 문을 도로 닫았다.
‘맙소사!’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일 년에 손에 꼽을 만큼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부분 연회홀을 지키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얘기는 들은 적 있지만, 세상에!’
무도회에서 눈이 맞은 남녀가 은밀하게 찾아드는 공간. 오로지 그럴 목적으로 무도회를 찾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공작가의 무도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시카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며 가까운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누가 알아보고 말을 걸까 봐 재빨리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후우….”
들고 있던 부채가 무거워서 난간 위에 손을 늘어뜨렸다. 아마도 무거운 것은 부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아닐까.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드레스와 풍성하게 끌어 올린 가슴골, 하얀 목선을 강조하도록 틀어 올린 머리칼과 보석 장식. 아침부터 공들여 단장한 옷차림이 무색하게 이 자리가 낯설었다.
열기를 식혀주는 여름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1층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발코니 창을 통해 들려왔다. 그 속에는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봤어?”
“2층으로 가는 것 같던데. 누구 만나러 간 거 아냐?”
“설마. 얼음꽃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었겠어?”
남자들이 태우는 궐련의 연기가 2층 발코니까지 흘러들었다. 매캐한 냄새에 아시카는 미간을 찡그렸다.
‘르쉬아는 궐련을 태우지 않았는데.’
드루쉬아뿐 아니라 아시카와 가까이 지내는 이들 중에는 궐련을 태우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냄새 때문에 더 조심하는 걸지도 모르고.
‘르쉬아는 잘 가고 있을까.’
시기가 좋지 않아서 만남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의 말을 서신에 남기는 것조차 미안해서 짧은 전언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시카의 짧은 상념은 이어지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중단되었다.
“얼굴만 봐줄 만하지, 그런 목석을 어찌 데리고 살아? 그러니 오클레인 공자도 바람이 났지.”
아시카는 그제야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상대가 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에서 찬바람 쌩쌩 도는 거 봐. 어휴. 부인에게 충성 맹세하고 평생 복종하며 사는 게 어디 쉽겠어?”
“영지를 내주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여자를 꼭 부인만 보라는 법이 어딨어. 예쁘고 나긋한 여자 하나 애인으로 두면 되지.”
“어이쿠. 큰일 날 소리. 그 여자가 오클레인 공자의 정부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못 들었어? 모주의 궁전에서 납치해 가뒀다잖아. 임신했다는 말에 눈이 돌아서. 결혼 전에도 그 정돈데 결혼하고 바람피우다 들키면 뭔 짓을 할 줄 알아?”
당사자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자들은 아시카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하, 기도 안 차네.’
가만히 듣자 하니 헛웃음이 난다.
아시카는 본 적도 없는 남자들이었다. 아마도 한미한 가문 출신에 작위조차 받지 못하는 차남이나 삼남쯤 되지 않을까. 감히 청혼서조차 넣지 못하는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비루한 자격지심을 충족시키곤 했다.
남자들의 목소리는 돌연 커지는 음악 소리에 파묻혔다. 1층 발코니의 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가고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저런 생각을 하는 게 저들뿐만은 아니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략혼의 이면을 본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이 바보 같기도 하고.
귀족들의 결혼은 철저한 정략에 의해 이뤄졌고 주고받는 것이 분명한 만큼 깔끔한 거래라고 여겼다. 그런데 남녀가 얽히는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당장 그녀만 해도 드루쉬아와 얽힌 뒤부터 정신 나간 짓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이대로 결혼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드루쉬아가 아닌 다른 남자와?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로 기분이 한없이 곤두박질쳤다.
“레이디 이그레인, 거기 계셨습니까?”
문을 가렸던 커튼이 거둬지며 복도의 밝은 빛이 쏟아졌다. 뒤돌아본 자리에는 며칠 전 본 적 있는 얼굴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리도 공자?”
“이번에는 기억해주시는군요. 반갑습니다, 레이디 이그레인.”
경마장에서 마주쳤을 때 만큼이나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호감을 보이는 상대는 불편했다. 그런 눈치를 읽었는지 데이란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회신은 잘 받았습니다. 부친께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기로 했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아시카는 상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에 의아해하는 것은 오히려 데이란이었다.
“청혼서에 대한 회신 말입니다. 공작님께서 그렇게 빨리 제안을 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청혼… 서요?”
이게 무슨 말일까. 아시카는 본 적도 없는 청혼서 이야기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데이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갔다.
“설마 모르고 나오신 겁니까? 이그레인 공작가에서 청혼서를 받겠다는 서신이 얼마 전 각 가문에 전달되었는데요.”
창백해진 아시카의 얼굴을 보고 상대도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