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시카는 손에 든 서신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물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라앉도록 기다리기를 얼마간, 서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반에 놓인 은촛대에는 환한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시카는 손에 들린 서신을 촛불에 가져다 대었다. 얇은 종이 한 장이 타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까만 잿가루가 나풀나풀 흩어지는 걸 보며 미아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회신은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 조각까지 불타 까맣게 날리는 것을 확인하고 아시카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가씨?”
미아는 초조하게 아시카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서늘한 얼굴. 다른 이들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미아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편지가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심각해. 두 분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어?’
생각에 침잠해 있던 아시카가 입을 열었다.
“탈리온 공작님께 전해줘. 미안하다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지시였다. 뭔가 한참 모자란 대답에 미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간단한 쪽지 하나라도 적어주시지.’
빈손으로 돌아가면 제 주인이 도끼눈을 뜰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감히 이그레인 소공작에게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타들어 갔다.
“미아는 나가보고.”
“네, 아가씨. 내일 상황 봐서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결국 말 한마디 더 얹어보지 못하고 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미아가 있어서 다행이야.’
어떤 식으로든 드루쉬아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 아시카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미아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쥴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쥴마, 경마장 건은 어떻게 됐어?”
“정신착란을 일으킨 환자들의 난동이라고 결론 내렸답니다.”
“말도 안 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보고는 아시카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지만 하나는 분명히 기억했다. 환자들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한꺼번에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났겠어. 중간에 동선이 뚝 잘렸는데 그걸 조사도 안 하고 넘어갔다고?”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일에게 들었어. 그 병은 말기쯤 되면 고통으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그런 사람들이 거기까지 어떻게 몰려왔겠어?”
구빈원 화제와 경마장의 난동 모두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대공령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고 벌인 일이 분명했다.
“그렇지않아도 귀족들이 대공령 일부를 황제의 직할령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분할 해서 영지가 없는 귀족들에게 하사하자고 했답니다.”
쥴마의 보고에 아시카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이건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쥴마는 한숨 고르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대공령을 노리는 모양입니다. 그동안에도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대공령을 독점한 것에 대해 귀족들 간에 말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신 나갔네. 대공령이 무슨 숨겨둔 보물창고라도 되는 줄 알아?”
“봉쇄로 인해 지금은 황폐해졌지만, 과거에는 트렐린에 맞먹을 만큼 부유했던 영지입니다. 탐이 날 수도 있죠.”
“그 전에 쏟아부어야 하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은 빼고 말이지.”
대공령을 노리는 귀족들에게 1년 치 회계 장부를 던져주고 싶었다. 직접 봐야 현실을 깨닫게 되려나.
“일단 귀족원이 개입하면 탈리온은 발을 빼겠다고 했고 이그레인 공작께서도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당분간은 황제 폐하께서도 대공령을 직접 건들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조부님께서?”
“공작님께서 나선 게 의외이긴 합니다.”
그동안 웨이브는 대공령에 먼지 한 톨 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는 돈을 아까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러 살폈던 적도 없었다.
‘기회가 되면 바로 손을 떼실 줄 알았는데.’
대공령에서 나오는 세수는 미미했고 들어가는 돈은 끝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의 통제가 풀린다 해도 앞으로 발전을 기대하기엔 요원한 곳이었다.
“조부님은 어디 계셔?”
“퇴궁 후 저택으로 들어오지 않고 정원 쪽으로 가셨답니다.”
“정원에?”
평소의 웨이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웨이브는 일을 핑계 삼아 제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수도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저택에 머물 때는 침실과 집무실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로지 일밖에 모르는 삭막한 삶. 하나뿐인 아들조차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시카는 진작에 포기했다.
‘그런 분께서 정원에는 왜?’
아시카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가로질러 저택을 나서는 발걸음이 초조하다.
사용인들을 채근해 찾아간 곳은 본채에서도 한참 떨어진 사냥용 별채였다. 이제는 관리하는 사람조차 없어서 버려지다시피 한 건물 앞.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뭘 하시는 거야?’
아시카는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다. 온갖 도구가 쌓여있는 공간에는 작은 등롱 불빛만이 너른 실내를 비췄다. 어둑한 탓에 멀리 구석에 있는 사람은 형체만 아른거렸다.
“누구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쪽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조부님, 저예요.”
상대의 움직임이 멎고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기물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기를 잠시, 웨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털어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요? 넘어지셨어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시카의 걸음이 빨라졌다.
“아니, 아니다.”
웨이브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시카의 손에는 등롱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둠 속에 잠겨있던 웨이브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다음 순간 아시카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조부님…?”
웨이브는 반듯한 귀족의 표본이었다. 언제나 격식에 맞게 옷을 갖춰 입고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포마드를 발라 깔끔하게 빗어넘겼다.
어떤 순간에도 빈틈 하나 내보이지 않던 사람이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은 낯설다 못해 이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하인을 부를까요? 아니면 부즈리에게 들어오라고 할까요?”
“됐다. 어쩌다 보니 발을 헛디딘 것뿐이야.”
어느새 웨이브의 목소리는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보다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왔느냐?”
그 질문은 아시카가 하고 싶었다. 본채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어째서 먼지 가득한 폐건물에 와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웨이브는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묻는다고 대답해주실 분도 아니고.’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오늘 황궁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낮에 참석했던 회의를 떠올리고 웨이브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별로 큰일도 아니었다. 황제가 변덕을 부린 것뿐이지.”
“대공령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면서요.”
“그렇지않아도 내일 사람을 보낼 생각이다.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들을 알아.”
내부 인력이 아닌 외부에 일을 의뢰하겠다는 말이었다. 예상대로 웨이브는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형식만 갖추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몇 달 전부터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대공령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대로 가볍게 지나쳤다가는 더 큰 일이 벌어질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탈리온과 함께 대공령 전반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요. 저에게 전권을 주세요. 제가 이 일을 지휘할게요.”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가!”
버럭 내지르는 고함에 아시카는 놀라 얼어붙었다.
살갑지는 않았어도 그녀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는 사람이었다. 소리를 질러놓고 웨이브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네가 아니어도 대공령에 갈 사람은 많아. 굳이 탈리온에게 도움받을 필요도 없고. 그러니 더는 이 문제에 관여하지 마라.”
웨이브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러나 단단하게 벼려진 얼굴과 달리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넌 그보다 다른 문제가 우선이야.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결혼 준비를 해야지.”
“조부님, 저는 아직….”
갑자기 결혼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당황스러웠다. 아시카의 결혼이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싱클라델트 공작가에서 온 무도회 초대장을 거절했다지? 참석하겠다고 서신을 보내라. 경마장 행사나 이스나 남작부인의 살롱 같은 쓸데없는 곳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교활동을 해.”
아시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딴에는 피한다고 골라 다닌 곳이 그런 곳들이었다. 그것도 웨이브가 눈감아 줬을 때나 통하던 방법이었다.
“더는 결혼을 미룰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결정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리 알아.”
결혼을 종용하는 웨이브의 시선은 매서웠다. 하나뿐인 손녀를 바라보는 시선치고는 퍽 차가운, 그러나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 * *
탈리온 공작저는 소리소문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드루쉬아가 중독으로 의식이 없었을 때만큼 보안을 높이고 출입자를 제한했다.
“마이헬러 영지에 사람을 보내. 가신들의 가문과 혼맥으로 연결된 다른 가문까지 싹 다 털어와.”
드루쉬아의 지시는 명확했다. 지난 한 달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문제들이 이제야 방향을 잡은 것이다.
당장은 드러난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 의심스러운 구석이라고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꺼림칙한 기분이 전부였다.
비록 파혼했을지언정 샤프리에게는 미약한 믿음 같은 것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마이헬러 후작을 만나는 순간 휘발되었다. 그것은 본능이 외치는 경고였다.
‘사지에서 굴러먹던 감각이 수도에서 몇 년 지냈다고 무뎌졌어.’
대공령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른 지금, 드루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감을 느꼈다.
‘수십 년 동안 양쪽 가문의 발목을 잡더니만.’
어쩌면 대공령이 그 이상의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계륵조차 되지 못하는 대공령 문제에서 이제 발을 뺄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부님께서는 어찌 생각하려나.”
충직한 무인인 네오렌은 한 번도 불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드루쉬아는 달랐다. 공도 이득도 없는 골칫덩이를 계속 끌어안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드루쉬아의 지시에 따라 수도 저택에 머물던 기사들이 각 지역으로 급파되었다. 경마장 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 뒤, 네오렌에게서 영지로 돌아오라는 서신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