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66화 (66/153)

#66.

경마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수도를 떠들썩하게 뒤집어놓았다. 구빈원 화제 이후 암암리에 떠돌던 소문이 완전히 수면 위로 떠 오르게 되었다.

황제의 소집령으로 귀족원에 속해있던 귀족들 모두가 황궁에 모여들었다. 오래도록 언급조차 꺼렸던 대공령이 화두가 된 것에 모두가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두 개의 기다란 테이블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회의실 안. 수십 명의 귀족들은 긴장된 얼굴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했다.

“지난번 구빈원 화재와 경마장 사건은 대공령 관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방증입니다.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동안 대공령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은근한 위험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이그레인 공작 웨이브는 상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회의실 가장 앞쪽 다섯 개의 계단 위에 황좌가 있었다. 색이 탁한 은발에 청회색 눈동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중년의 사내. 오랜만에 회의를 소집한 황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건조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대공령은 너무 오랫동안 두 가문의 관리하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 관리자를 교체하거나 황실의 직할령으로 복속시키는 방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직할령으로 복속시킨다?”

“예, 폐하. 대공령의 규모가 워낙 방대하므로 일부는 직할령으로 돌리고 일부는 영지가 없는 백작위 이상에게 나누어 하사하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귀족들의 거침없는 발언에 드루쉬아는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땅따먹기할 심산이로군.’

무려 40년이다. 두 가문이 온갖 고생을 하며 대공령을 관리해 온 것이. 그런데 이제야 대공령에 대한 처분을 논하다니.

사소한 트집을 잡아 뒤늦게 숟가락을 얹겠다는 심사가 뻔히 보였다.

탈리온은 원래도 대공령에 욕심이 없었다. 땅을 넓히기보다 이민족을 막아내고 국경지대를 방비해야 하는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공령의 주민들에게는 영지를 쪼개고 새로운 영주를 맞이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판단하면서도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무려 40년이나 탈리온과 이그레인이 관리해오던 곳일세. 그게 마음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잖나.”

“일단 대공령에 시찰단을 보내 정황을 확인하고 봉쇄를 강화하거나 문제 지역을 처리해야 합니다. 대공령의 환자가 수도까지 올라온 마당에 병이 더 확산되기라도 하면 제국에 큰 재난이 될 겁니다.”

전염병 이야기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각화병은 전염병이 아닙니다. 치료법이 없는 희귀병일 뿐이지요.”

“그건 모를 일입니다. 당장 그 때문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 소문 말일세. 출처는 확인이 되었는가?”

황제의 질문에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대공성의 저주가 병이 되어 번지고 있다지?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지는데 소문의 출처조차 찾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황제는 웨이브와 드루쉬아를 차례로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의 책임자인 이그레인 공작과 탈리온 공작은 어찌 생각하는가?”

황제의 질문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드루쉬아였다.

“모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입니다. 경마장에 난입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가 없어서 어디서 왔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발 빠르게 내려진 명령으로 그 자리에서 모조리 살해되었다. 그 때문에 사건은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니면 조사할 의지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자들의 난입과 경비원들의 공격,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날뛰는 말들까지 더해져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잘 마련된 무대처럼.

다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전염병과 대공령이 한 단어로 각인되기에는 충분했다.

드루쉬아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경마장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이 커지기까지 치안대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지금 책임을 수도 치안대로 떠넘기는 건가?”

“범인들의 동선 중 하나라도 확인된 것이 있습니까? 파악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지금, 모두 추측이 아닙니까.”

반발을 예상했는지 황제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경마장이야 어찌 됐건 지금 화두는 대공령이야. 이미 병이 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폐하. 국경을 방비하는 탈리온의 병력이 대공령까지 완벽히 봉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소한 이탈은 예전부터 있었고 국법으로 죄를 물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허점을 보완코자 다른 가문이 손을 거들겠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개입을 원하는 가문들에게 전권을 넘겨주십시오. 저희 탈리온은 언제든 대공령에서 철수하고 본래의 역할대로 국경 방비에 전념하겠습니다.”

“허어.”

황제는 드루쉬아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은 다른 가문이 개입할 경우 아예 손을 떼겠다는 협박이었다.

“지금 나에게 항의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 탈리온은 본디 기사를 양성하고 싸우는 것에만 능할 뿐, 영지를 관리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는 걸 알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드루쉬아는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회의실에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내내 조용하던 웨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하게 넘긴 은회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고 단단했다.

“폐하, 저희 이그레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귀족원이 개입을 원한다면 대공령에 대한 지원 또한 귀족원에서 책임져야 옳습니다.”

귀족원이 개입하면 이그레인도 대공령에서 손을 떼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단호한 발언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박했다.

“그렇게 무책임한 발언이 어딨습니까?”

“독점적인 관리방법을 바꾸자는 거잖소. 그런데 아예 손을 놓겠다니요.”

“지난 40년 동안 대공령 관리에 들어간 비용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그 비용 중 국고에서 나온 것은 얼마이며 귀족원의 지원은 얼마였습니까?”

웨이브의 반문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모든 비용은 이그레인과 탈리온이 부담했고, 대신 두 가문은 대공령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한된 환경 탓에 이득보다 손실이 클 수밖에 없었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상황이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웨이브까지 나서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대공령이 탐나기는 해도 당장 관리를 떠맡기에는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큰 탓이다.

드루쉬아는 동요 없는 웨이브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의외로군.’

이그레인 공작이 그의 손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애당초 웨이브는 대공령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협의 테이블에서 탈리온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해서 모든 업무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상관하지 않았다. 아시카가 성년이 되던 열여덟 살부터 대공령 관리에 참여하게 된 것도 웨이브의 무심함 때문이었다.

‘하긴. 득보다 실이 많은 곳이니 이그레인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을 테지.’

회의는 결론 없이 현재 상황을 재확인만 하고 파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그레인과 탈리온 양측에 현지 상황에 대한 면밀한 보고서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황제는 대공령의 관리방법을 바꿀 의사가 없어 보였다. 두 가문을 대공령에 묶어둔 것이 단지 관리의 문제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그레인의 넘치는 재력과 탈리온의 여유 병력이 대공령에 묶이면서 두 가문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니 지금 와서 이그레인과 탈리온을 배제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회의를 소집한 건 경고로군.’

대공령에 관해 오래도록 외면하던 황실이 이제 이 문제를 주시하겠다는 경고 말이다.

황제의 퇴장 후 귀족들이 줄지어 회의실을 나섰다. 웨이브의 시선이 잠시 드루쉬아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그 차고 단단한 뒷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켜서 드루쉬아는 퍽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탈리온 공작께서는.”

드루쉬아의 상념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다가왔다.

“제 딸이 많이 부족해서 성에 안 차셨나 봅니다.”

마이헬러 후작이었다. 성년이 한참 넘은 자식들이 있는데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갸름한 얼굴과 느른한 분위기가 묘한 사내였다.

파혼 이후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혼을 진행할 때도 양측 보좌관이 오갔을 뿐. 파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황태후 폐하와 인연이 그리 깊은 줄은 몰랐습니다.”

드루쉬아는 서늘한 낯빛으로 응수했다.

“오래전에 들은 바가 기억났을 뿐입니다. 탈리온에서 진상한 가보가 쓸모없는 애물단지라 처치 곤란이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창고에 처박아 두느니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어떨지 언질을 준 것뿐입니다.”

“결혼을 빌미로 말입니까?”

“딸에게 최고의 혼처를 찾아주려고 했을 뿐이니 노여워 마세요. 공작님 댁에서 돌아온 뒤 그 아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릅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한 번쯤 살펴봐 주시면 더 좋고요.”

과연 그럴까. 적의도 호의도 없이 나른하게 웃는 마이헬러 후작에게서 불편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제 딸에게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마이헬러 후작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드루쉬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여유로우면서도 조금은 둔한 걸음. 드루쉬아는 후작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려서 낙마 사고로 다친 적이 있다고 했지.’

그가 기억하기로 마이헬러 후작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마이헬러는 원래도 공식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었는데.’

후작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영지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가문.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던 가문이 마이헬러였다.

‘그래서 조부님께서 샤프리를 별로 안 좋아하셨지.’

대대손손 은둔자에 가깝던 마이헬러가 샤프리와 에르윈을 앞세워 사교활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때 처음으로 마이헬러 후작을 보고 생각보다 젊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들었다.

한동안 묻어두었던 사건이 다시금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파혼 통보에 매달리던 샤프리와 딸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던 마이헬러 후작.

파혼 통보를 하고 얼마 뒤 황태후는 드루쉬아를 불러 은근히 결혼을 종용했다. 그걸 거절하고 난 직후 의문의 공격으로 독에 중독되었고.

때맞춰 나타난 마이헬러의 주치의가 그의 목숨을 구하고 샤프리가 내내 저택에 머물렀다. 이상하리만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다.

‘샤프리는 왜 내 방에 왔었던 거지?’

자객들이 침입해 전투가 벌어진 직후였다. 샤프리는 왜 위험을 무릎 쓰고 그의 방까지 찾아왔던 걸까.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여전히 단서는 오리무중이었다.

드루쉬아는 황궁 밖으로 나오면서 크라바트를 풀어헤쳤다. 해가 진 뒤에도 한여름 열기가 남아있어 가슴이 답답했다.

‘아시카는 괜찮을까.’

그날 드루쉬아는 내내 아시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었다. 관중석이 발칵 뒤집혔을 때 아래로 추락하는 그녀를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던지.

시야가 새카매지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녀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뒤늦게 아시카를 찾아서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했지만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젠장.’

그날 아시카를 제품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많이 놀라지 않았느냐고, 안심하라고 품에 안고 다독여주고 싶은데 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더 속이 쓰린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시카는 홀로 꿋꿋하리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두려워도 겁먹지 않은 척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할 터였다.

‘의지하란다고 날 의지할 여자도 아니고.’

그 와중에도 대공령이라는 소리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던 여자였다.

그날 이후 아시카에게서 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삼일 간격으로 만나다가 약속한 것처럼 서로 연락을 뚝 끊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둘 다 느꼈기 때문이다.

‘서신이라도 보내 볼까.’

아시카보다 대공령의 문제가 더욱 급하다. 그걸 알면서도 드루쉬아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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