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64화 (64/153)

#64.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의 물결에 아시카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넋이 나갔다.

“초대받으신 손님께서는 이쪽입니다.”

잔느가 건네는 초대장을 받아들고 하인이 안내를 자처했다. 잔느는 멍하니 서 있는 아시카의 주의를 환기했다.

“아가씨, 말 목장으로 가는 모양입니다.”

“아, 그래.”

“사람이 많아서 놀라셨죠? 경마대회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관람객이 많습니다.”

하인이 길 안내를 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멀리 보이는 경마장은 좌석과 입석 모두 사람들로 가득했다. 구름 낀 하늘에는 태양이 사라져서 날이 뜨겁지 않았다.

“구경하기 좋은 날이네.”

“오늘을 위해 란디에르 자작님께서 특별히 영지의 말들을 선별해두었답니다.”

경마장의 반대편, 하인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높은 울타리가 쳐진 안쪽으로 열 마리가 넘는 말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경마장을 소유한 란디에르 자작은 혈통 좋은 명마를 키워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제에게 진상하는 종자이니 귀족들도 탐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마장보다 경기 전 말을 선보이는 것 때문에 이 자리를 찾은 귀족도 많았다.

“아가씨,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울타리 주변이 다소 어수선했다. 바닥에는 채 치우지 못한 부자재들과 건초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어서 드레스가 조금만 길어도 엉망이 되기 쉬웠다. 쿱쿱한 냄새에 귀부인들은 부채를 흔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문득 아시카는 방향을 바꿨다.

“말을 보려고 참석하신 게 아닙니까?”

잔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경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니 승마용 말이라도 보려나 싶었다.

“글쎄.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사실 아시카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사교활동을 재개하라는 웨이브의 지시 때문이었다. 티파티나 무도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보다 차라리 경마장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울타리를 따라 걷던 아시카가 걸음을 멈췄다. 말 시승을 하는 곳도 아닌데 유독 여자들이 많이 모인 곳을 발견했다.

“저기, 탈리온 공작님이 아닙니까?”

잔느의 말대로 보통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 반은 큰 키가 불쑥 튀어나와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빗어 넘긴 짧은 금발과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또렷했다.

형식을 갖춰 입은 얇은 셔츠와 몸에 딱 붙는 베스트 아래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도드라졌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였다.

‘르쉬아가 어쩐 일이지?’

반가운 마음과 의아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드루쉬아는 평소 무도회나 연회에 잘 나타나지 않는 데다가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탁 트인 장소와 열띤 분위기에 편승한 여자들이 기회를 노려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시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탈리온 공작님께선 이런 자리를 안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여기서 여자들을 몰고 다닐 줄은 몰랐네.”

차분한 말투 속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나는 말 한마디 붙이기도 어려운데.’

두 사람은 이런 자리에서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만한 사이도 못되었다. 둘이 마주쳤는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잊고 있던 현실이 확연히 와닿았다. 날씨만큼이나 꾸물꾸물하던 감정이 더욱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레이디 이그레인, 이런 자리에서 뵐 줄 몰랐습니다.”

목장 쪽으로 가던 남자 한 명이 아시카를 발견하고 방향을 바꿨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 그러나 반가워하는 남자와 달리 아시카는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를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황궁 연회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저는 데이란 페리도라고 합니다.”

“아, 페리도 공자였군요.”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남자는 페리도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몇 년 전에 청혼서를 보내온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도회에서는 보기 어렵더니, 이런 곳을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볼 걸 그랬습니다.”

남자의 눈에는 호감이 그득했다. 아시카는 마주치기도 어렵거니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상대였다.

아시카가 피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상대는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드루쉬아에게 향해 있느라 남자가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루쉬아는 뒤늦게 아시카를 발견하고 눈을 획 치켜떴다.

‘저 새끼는 뭐야?’

공개 석상에서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던 여자 옆에 낯모르는 남자가 따라붙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너무 흔해서 기억조차 못 할 얼굴이었다. 아마도 결혼에 목매고 있는 무수히 많은 귀족 중 하나일 테지. 재잘대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공작님도 말에 대해 잘 아시겠어요.”

“탈리온 영지에서도 직접 말을 키운다죠?”

여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드루쉬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드루쉬아의 얼굴에서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걸 확인하고 칼프가 대신 대답했다.

“탈리온에서 키우는 말은 군마입니다. 워낙에 덩치도 크고 다루기 까다로워서 레이디가 타기는 어렵습니다.”

기사들에게 말은 중요한 장비이기 때문에 탈리온은 오래전부터 직접 군마를 키우고 훈련해왔다. 반면 지금 전시되는 말들은 군마가 아닌 경주마와 귀족들의 취미를 위한 혈통 좋은 준마들이었다.

여자들 중 하나가 드루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한껏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럼 어느 쪽 말이 더 좋은 건가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종자도 다르고 훈련법도 다르니까요.”

“덩치 큰 군마를 다루시면 여기 있는 승마용 말들은 쉽겠어요. 그렇죠?”

“기사님들은 기마술도 뛰어나다면서요? 한번 시승해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드루쉬아가 대답하지 않아도 여자들은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지더니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칼프, 레이디들을 위해 멋진 시범을 보여주면 좋겠어. 나는 옷이 불편해서 말을 타기가 어렵거든.”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불편하기로 치면 정복을 갖춰 입은 칼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보좌관의 항의를 드루쉬아는 날카로운 눈빛과 손짓으로 털어버렸다.

“안 가고 뭐 해? 레이디가 원한다잖아.”

“아니, 저… 공작님.”

드루쉬아를 채근하려던 여자는 싸늘한 시선과 마주하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단칼에 내치고 자리를 떠났을 텐데 받아주는 것이 용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드루쉬아는 자신이 움직이는 대신 불청객들을 쫓아내는 쪽을 택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란디에르 자작님이 계신 곳으로 이동하시죠.”

칼프는 충직하게 드루쉬아의 지시를 수행했고 여자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루쉬아의 신경은 아시카에게 향해 있었다.

‘저런 꼴을 보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게 아닌데.’

아시카가 경마 행사에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미뤄두었던 초대장을 뒤져 급히 참석을 알렸다. 부랴부랴 경마장으로 달려왔더니 아시카는 다른 남자와 어울리고 있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상대와 함께.

‘원래 낯가림이 심했는데, 뭐가 저렇게 편해졌어?’

그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생경하다.

아시카는 저에게 못 박힌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한 번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신이 난 남자의 목소리만이 드루쉬아의 귓가에 불쾌하게 파고들 뿐이었다.

“본래 말은 군림하는 기질이 강한 짐승입니다. 거기다 란디에르 자작이 키우는 말들은 호승심도 강하죠. 뒤처지는 걸 참지 못하는 놈들이 경주마로 좋은 말이거든요.”

아시카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남자는 말을 멈추지 않고 보조를 맞춰 옆걸음질을 쳤다.

울타리 주변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바닥에는 건초뿐 아니라 팔뚝 길이로 잘라놓은 둥근 통나무가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장작용 나무를 운반하다 떨군 것으로 보였다.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던 드루쉬아가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란디에르 자작이 선보이는 말들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드루쉬아는 성큼 그 옆을 지나치면서 토막 난 둥근 나무를 툭 하고 발로 차버렸다. 나무토막은 정확히 남자의 발치를 향해 데구르르 굴러갔다. 남자는 아시카에게 정신이 팔려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문득 아시카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굴러오는 나무토막을 향해 움직였다.

‘저게 왜?’

시선 끝에 싸늘하게 남자를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했다.

‘르쉬아?’

“제가 이곳 지리를 잘 압니다. 말에 관심이 없으시면 저와 함께 관람석으로….”

“아, 저기. 뒤를….”

아시카가 주의를 주기도 전에 성급한 남자의 발이 나무토막 위로 미끄러졌다.

“으억!”

남자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뻑, 하는 소음과 함께 남자는 뒤통수를 울타리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어머, 세상에!”

“사람이 쓰러졌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

비명을 듣고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시카는 황망한 얼굴로 드루쉬아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드루쉬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심술궂은 악동 같은 미소에 아시카는 말을 잃었다.

‘세상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망연해하는 사이 드루쉬아는 쓰러진 남자를 지나쳐 여유롭게 경마장으로 향했다. 뒤늦게 칼프가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시카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충격받은 남자는 하인들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야 했다. 경마장으로 향하던 드루쉬아는 슬쩍 뒤돌아 남자가 끌려나가는 걸 확인하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맙소사. 르쉬아!’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아시카는 한 손에 얼굴을 묻고 곤란한 표정을 간신히 감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