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산책로 입구는 음영의 대비가 뚜렷했다. 파란 하늘과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살 아래 짙은 녹음이 우거진 숲. 그리고 그 속으로 동굴처럼 이어진 길은 생각보다 어둑했다.
“발 조심.”
아시카가 풀 무더기를 밟아 비틀거리자 커다란 손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주변 관리를 하지 않나 봐요?”
“꽤 오래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거든. 원래 아버지께서 사냥 가실 때 쓰던 산장이야.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올 사람이 없었지.”
“아.”
불편한 과거의 이야기. 아시카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두 분이 살아 계실 때도 아버지 혼자만 오던 곳이야. 어머니는 피 흘리는 사냥감을 산장까지 끌고 들어오는 걸 보고 놀라서 다시는 안 왔다고 해.”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드루쉬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문득 아시카는 궁금해졌다. 이 남자도 탈리온의 다른 가신들처럼 이그레인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태도가 돌변했다고 하기에는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싫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만날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던 이유는 뭘까.
‘탈리온을 대표해서 심술부리기로 작정이라도 했었나.’
태세전환이 너무 빨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그렇다고 왜 이제 저를 미워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아시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 구빈원에서 도망친 놈이라며?”
드루쉬아가 불쑥 말을 뱉었다. 아시카가 걸음을 멈추자 그가 돌아보았다. 그가 말하는 것이 나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 말을 전한 것이 미아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시카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 얘기가 벌써 거기까지 갔어요?”
“왜 그런 놈을 가까이하는 건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뿐이에요. 그리고 신분은 확인했어요.”
“신분이 그 사람을 보증해주는 건 아니잖아.”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드루쉬아의 표정에는 불신이 역력했다.
“네드로프 가문에는 아들이 둘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사서임을 받은 둘째 아들을 두고 기사도 아닌 장남이 파병군에 자원해서 가문을 떠났더군. 그게 벌써 4년 전이야.”
그 장남이 나일이었다. 장남이 후계자인 경우 나머지 자손이 기사가 되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파병군에 보내지는 것은 당연히 기사인 차남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기사도 아닌 장남이 파병군에 자원했다는 건 후계자의 자리도 팽개치고 뛰쳐나갔다는 의미였다.
‘뭔가 사연이 있구나.’
의심스러운 마음보다 미처 털어놓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을 줄은 몰랐는데.”
“제가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걸 잊었어요?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답니다.”
“그래서 계속 곁에 두겠다고?”
이건 드루쉬아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일보다 당신이 보낸 아이가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미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드루쉬아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그레인이 위험한 곳이던가?”
“물론 그건 아니지만.”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마. 제 앞가림은 하는 아이야. 여자아이가 성년식에 기사 서임 받기가 쉬운 줄 알아? 나이와 외모로만 판단하는 건 미아에게 실례야.”
아시카가 미아 때문에 불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드루쉬아는 오히려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사실 미아를 보낸 것은 불안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공작가의 귀한 레이디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어둠이 아시카를 채어갈 것만 같아서, 그래서 미아를 보냈다.
“곁에 두면 도움이 될 거야.”
실력 있는 여기사는 귀하다. 더구나 미아는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성격이라 누군가를 속이고 감시하는 역할에는 맞지 않았다.
‘나쁜 의도가 아닌 건 알겠는데.’
돌려보내면 그만인데 그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미아에게는 탈리온보다 잔느가 있는 내 곁이 나을 수도 있어.’
드루쉬아와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가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는 걸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책로를 가로질러 깊게 파인 곳이 나왔다. 물이 고인 가운데 습한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있었다.
“너무 오래 방치했더니 물길이 생겨버렸군.”
드루쉬아는 훌쩍 안으로 뛰어들어 커다란 돌을 밟고 섰다.
“손 이리 내.”
“어쩌려고요?”
꽤 폭이 넓은 웅덩이였다. 아시카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갸웃했다.
“내가 옮겨줄게. 아니면 업어줄까?”
“뭐예요?”
아시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남자에게 업혀 가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업히기 싫으면 손을 주고.”
드루쉬아는 천연덕스럽게 아시카에게 손을 요구했다. 머뭇거리던 작은 손이 그의 손 위에 올라가는 순간 아시카를 확 낚아챘다.
“으앗!”
그녀의 몸이 쏟아지듯 드루쉬아의 품에 안겼다. 정확히는 그의 양팔에 갇혀 대롱대롱 매달린 셈이 되었다. 드루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시카를 내려다보았다.
“내려줘요.”
“싫은데?”
“르쉬아!”
두 다리를 버둥거리는데도 커다란 체구의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시카는 여자들의 평균 키보다 조금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꼿꼿하고 단단해서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여자이기도 했다. 드루쉬아는 그런 여자가 제게만 여린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좋았다.
“아시카.”
“네, 르쉬아. 대화가 하고 싶으면 저부터 내려주세요.”
“내가 떨어뜨릴까 봐 무서워?”
“아뇨. 그건 아닌데.”
“몸에 힘 빼고 나에게 기대 봐. 그 정도 믿음은 있잖아.”
“이게 믿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믿음의 문제가 맞아. 좀 더 나에게 기대보라고.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거잖아.”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남자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한다.
더운 날씨 탓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 사위가 그늘져서 그의 얼굴에도 음영이 뚜렷했다.
검은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평온했던 심장이 격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 쿵 진동하는 심장의 반응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얼어버린 아시카의 표정을 보고 드루쉬아는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시카의 가녀린 체구가 그의 품에 폭 잠긴다. 날이 더워 땀이 나는 데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안은 채 웅덩이를 건넜다. 조금은 아쉬운 듯 등허리를 가볍게 쓸어주곤 가만히 땅에 내려놓았다. 한 손에는 그녀의 손을 꼭 쥔 채로, 두 사람은 산책을 이어갔다.
산책로 대부분은 잡초에 덮여 있었지만 드문드문 예전에 깔아둔 판석이 보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걷기 편한 길이었다.
또 그렇게 걸어가기를 얼마간, 드루쉬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오페라를 좋아하나? 다음 주쯤에 오픈하는 공연이 있는데, 어때?”
“네?”
아시카는 걸음을 멈추고 드루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왜 저에게 묻느냐는 듯 동그란 까만 눈동자가 깜박였다.
“뭘 못 알아듣는 척해. 함께 가자는 말이잖아.”
“왜요?”
“왜냐니….”
제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드루쉬아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만나는 장소를 바꿔보자는 거야. 가끔은 밖에서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아시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페라하우스의 개인실은 밀폐된 공간이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 좋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할 이유가 없잖아?’
“오페라, 별로 안 좋아해요.”
“아. 그건 몰랐군.”
드루쉬아는 말을 뱉으며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은 몰랐을 리 없었다. 그녀의 동선을 꿰고 있는 만큼 평소에 뭘 하고 다니는지, 아시카의 보좌관 다음으로 잘 아는 것이 드루쉬아였다.
“그럼, 얼마 전에 그랑제느 거리에서 오픈한 레스토랑이 있던데 거기에 예약을 해둘까 하는데….”
“미쳤어요?”
아시카는 기겁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단둘이 만나는 지금도 조마조마한데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만나자니.
아시카의 발작적인 반응에 드루쉬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게 미쳤다고 말할 일은 아니잖아? 내가 말한 건 프라이빗룸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예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드루쉬아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사소한 제안일 뿐이었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누리는 사소한 데이트.
“우리가 무슨 죄라도 짓고 있어? 멀쩡한 성인남녀가 오페라를 보러 가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다 추문에 휩싸이면 어쩌려고요? 우리에게 집중될 시선을 생각해봐요.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일이예요.”
“그게 겁나? 남들 눈이 그렇게 두려워? 탈리온과 이그레인이야. 제국의 양대산맥이나 다름없는 대가문이 뭐가 무서워서 남들 시선에 벌벌 떨어?”
“그러니까 더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화가 난 듯 드루쉬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시카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당신과 내가….”
그 순간 아시카는 말을 멈췄다.
짜증스럽게 목깃을 풀어헤치는 남자의 모습에서, 짜증보다는 상처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깨달음.
‘르쉬아는 이 이상의 관계를 원해.’
잠자리 파트너 이상의 관계.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시카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두려움 가득한 제 속내를 들킬까 봐서.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날 관계였다. 양쪽 가문의 적대관계보다 조부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고 그보다는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더욱 두려웠다. 사실이 밝혀지면 드루쉬아와 탈리온 전체가 휘말릴 수도 있었다.
함께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성의 소리도 높아져 갔다.
‘르쉬아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건 연인들이나 하는 것들이 아니냐고, 나는 연애를 할 마음 따윈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르쉬아.”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에 굳어진 얼굴이 돌아보았다. 굳어버린 그의 표정에 아시카의 가슴이 서늘해진다.
드루쉬아는 머뭇거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거절의 뜻을 읽었다.
“그만 가지.”
어쩐지 맥이 빠진 듯한 목소리. 드루쉬아는 왔던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시카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르쉬아.”
드루쉬아가 앞서간 것은 불과 서너 걸음. 저를 부르는 가녀린 목소리에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애칭 참 잘 지었어.”
그녀의 입에서 애칭이 흘러나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마지못해 손을 내밀자 아시카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게 저를 움켜쥔 손을 확인하고 아시카는 활짝 웃었다. 그 환한 미소에 드루쉬아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음이 나와?”
그러나 아시카는 대답 대신 더 크게 미소지었다. 달리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조금 전처럼 차게 등 돌리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서.
드루쉬아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아시카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끌었다.
잔잔하게 가슴이 일렁인다.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 사람은 말없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 길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