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뺨에 휘감기는 간질거리는 감각에 아시카는 미간을 좁히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고 하얀 피부 위에 붓으로 그린 듯 까만 눈썹이 도드라졌다. 그 아래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속눈썹과 크고 둥근 검은 눈동자가 문서 위에 고정된 채 빠르게 움직였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아까부터 저에게 못 박힌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지 문서를 읽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이라곤 달랑 가운 한 장이 전부였다. 그것도 유려한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얇은 여름용 가운.
한 번쯤 돌아보기를 기대했던 드루쉬아는 혀를 차고 말았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아까까지 저와 뜨겁게 뒹굴어 놓고는 서류를 손에 드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니지, 원래 저런 얼굴이었지.’
침대 위가 아닌 공석에서 마주했던 차고 단정한 아시카의 얼굴.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낯익어서 묘하게 가슴이 설렜다.
‘약속은 약속인데…, 너무 철저하게 지키는 거 아냐?’
침대를 떠난 뒤부터 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불퉁한 마음이 튀어나온다.
‘저놈의 서류들, 확 다 뺏어버릴까. 아니면….’
저대로 테이블에 밀어붙이고 그대로 덮쳐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서류는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될 테고 정리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겠지.
드루쉬아는 비스듬히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더위 탓에 헐렁한 바지 하나만 입었을 뿐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못된 장난을 꾸미는 악동처럼 드루쉬아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막 아시카의 어깨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여기, 이것 좀 봐요. 작위가 올라갔던 시기가….”
아시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드루쉬아는 바로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드루쉬아는 그녀를 잡으려던 손을 얼른 거두었다.
“르쉬아, 뭐해요?”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는지도 모르고 아시카의 얼굴은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하는 표정이었다.
“음, 무슨 일이지? 서류에 문제라도 있어?”
“아, 여기 좀 봐요. 두 번째 기적이 있고 나서 한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요.”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당황한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이 부분, ‘비옥한 땅을 두고 이민족이 몰려들어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혼란이 종식되고 난 뒤 왕은 스스로 칭제하고, 공을 인정받아 탈리온은 후작에서 공작으로, 왕의 수족이었던 마이헬러는 후작위와 새로운 영지를 하사받았다.’라고 되어 있어요. 근데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거죠? 마이헬러는 기사의 가문도 아니잖아요.”
“그러게. 생각보다 오래된 가문이라는 건 아는데.”
마이헬러도 이그레인처럼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가문이었다.
“황족의 피가 섞여서 오드아이가 태어난다는 소문이 있었지.”
“그것도 이상해요. 황족과 피가 섞인 가문이 한둘도 아닌데, 황족에게는 명맥이 끊어진 황금안이 왜 마이헬러에서만 태어날까요? 그것도 반쪽짜리로?”
“뭔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타당하지 않겠어요?”
아시카의 의문에 드루쉬아는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초대 건국신화도 관심 없었고 마이헬러가 황족과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이유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시카가 이 문제를 파고드는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드루쉬아는 그녀를 잡아 둘 빌미가 필요해서 자료를 제공했을 뿐. 그런데 아무 상관 없다고 여겼던 이야기가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아시카는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같은 시기에 작성된 공식기록이 있는지 서류를 뒤적였다. 곁에 있는 드루쉬아는 이미 잊은 얼굴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한 드루쉬아는 빈정이 상했다.
“아시카.”
“으응? 왜, 르쉬아.”
서류 더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시카가 무심결에 대답했다. 문득 아시카는 제 말투에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불퉁한 표정을 한 드루쉬아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러워졌어.”
“아, 그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투가 낯설어서 아시카도 당황했다.
“가끔 느끼는 건데, 당신이 뭔가 헷갈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 같은 남자가 둘 일리는 없고.”
전 약혼자와 자신이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말까지는 꾹 참았다. 둘만의 공간에서 아시카가 전 약혼자를 떠올릴 어떤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다.
드루쉬아의 지적은 그녀의 혼란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혹여 속내를 들킬까 봐 아시카는 긴장했다.
“그만큼 익숙해지고 있다는 거겠죠. 그래서 싫어요?”
“내가 어렵지 않은가 봐.”
드루쉬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반대로 느꼈다. 드루쉬아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14년을 지인으로 지내왔던 샤프리조차 그를 마냥 편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아시카는 오래된 연인이나 가족처럼 그를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노골적으로 피하고 싶어 했던 태도와는 천지 차이였다.
“헐벗은 남자를 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는 건 달갑지 않아.”
드루쉬아는 한 손으로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등받이를,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잡고 상체를 기울였다. 탄탄한 근육질의 상체가 밝은 태양 빛을 받아 섬세한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아시카는 어깨를 움츠리며 데구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긴장… 해요.”
그렇게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다가오면.
“긴장한다는 사람이 고작 가운 하나 걸치고 서류만 들추고 있어? 내가 머릿속에서 당신 옷을 수십 번을 벗기고 또 벗기는 동안?”
당황한 아시카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기우뚱하자 드루쉬아의 손이 의자 등받이를 잡아 천천히 바닥에 밀어 쓰러뜨렸다.
“으앗, 르쉬아!”
아시카의 몸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이라고 해도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두 번째 왔을 때부터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이었다. 마치 온 방 안을 뒹굴기로 작정한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이후부터 드루쉬아는 침대와 바닥을 구분하지 않고 아시카를 쓰러뜨렸다.
드루쉬아는 의자를 멀찌감치 밀어버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아시카는 당황한 눈을 깜박이며 저를 짓누른 커다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쓰러지면서 가운이 말려 올라간 탓에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고 여며두었던 앞섶이 벌어져 설핏 가슴골이 보였다.
“르쉬아, 우리 약속했잖아요? 산장에 도착해서 세 시간은 당신 뜻대로,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쓰기로.”
“당신은 그게 마음대로 돼?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냐?”
“약속은 약속…, 흡.”
드루쉬아는 항의하는 작은 입술을 제 입으로 막아버렸다.
당황해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밀려들었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혀가 그녀의 혀를 휘감아 당기고 혀뿌리를 긁어댄다.
“흐응….”
간신히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화끈거릴 만큼 뜨거운 남자의 체온이 몸을 짓누르며 살을 비빈다.
짓눌린 하체 쪽에서 딱딱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천천히 덩치를 키우며 꿈틀거리는 그것이 그녀의 민감한 부위를 건드렸다. 자극받은 아랫도리가 움찔움찔 반응한다.
드루쉬아의 말대로였다. 정보를 캐묻는 것은 핑계일 뿐, 다 팽개치고 그와 함께 있고만 싶었다. 저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남자를 욕심껏 가지고 싶었다.
아시카의 숨결이 뜨거워진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 아래 깔린 다리가 그의 손길을 갈구하며 바르작거렸다. 욕심껏 입을 맞추던 드루쉬아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후. 정말이지….”
끈적하게 땀에 젖은 손이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쓸었다. 당장 이 다리를 벌리고 제 것을 쑤셔 넣고 싶은 욕구가 사납게 날뛰었다.
이제 드루쉬아는 아시카를 잡아 둘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았다. 뭐라도 좋으니 제게 요구해서 거래할 빌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
‘여자에게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날이 올 줄이야.’
나라를 팔아먹을 만큼 절세미녀도 아니고 천하의 요부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내가 미치고 있는 게지.’
처음에는 육체를 탐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두 사람의 몸은 놀라우리만치 잘 맞았고 매 순간순간 탐욕스러운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드루쉬아의 마음속에 사소한 욕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시카를 품에 안고 함께 잠들고 싶다는 생각. 같은 침대에서 함께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 꽃망울이 막 터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손을 잡고 목적 없이 함께 거닐고 싶다는 생각. 그런 사소한 바람이 말이다.
드루쉬아는 그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눈동자. 그것을 애써 밀어내며 드루쉬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산책이나 할까?”
“네?”
예상과 다른 제안에 아시카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 와서 한 번도 침실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
“아니, 그거야….”
방을 나갈 시간이 어딨을까. 만날 때마다 짐승처럼 침대를 뒹굴다 간신히 시간을 쪼개 탈리온의 기록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근방은 사유지라서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나무 그늘이 깊어서 한낮에도 시원해. 기분전환이 될 거야.”
드루쉬아는 흐드러진 까만 머리칼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당장의 욕구보다 함께 산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양.
지금까지 드루쉬아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 있었다. 이렇게 사소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요.”
“그래.”
느슨해진 얼굴에 미소가 깊어진다. 드루쉬아는 말없이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