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세상에.”
아시카는 황망한 얼굴로 거품을 뒤집어쓴 두 사람을 보았다. 사용인들과 쥴마, 아시카까지 모여들었는데도 나일은 여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흉흉한 청회색 눈동자가 상대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너 아주 잽싸게 도망부터 친다?”
“도망 안 갈게요. 놔줘요.”
“너 뭐야? 뭔데 여기까지 기어들었어?”
“일단 놓고 얘기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여자라기보다는 앳된 소녀의 얼굴이었다. 흠뻑 젖은 상태에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나일의 손을 잡았다.
“살살 웃고 다닌다고 모두 속일 수 있을 줄 알았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거 본인 얘기인가요?”
두 사람은 대형 세탁 수조 속에서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너어….”
“나일, 지금 뭐 하는 거야?”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두 사람에게 아시카가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란 눈이 더욱 커지고 말았다.
나일의 손에 잡힌 여자의 얼굴이 낯익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상대도 그제야 아시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유순하게 생긴 얼굴에 동그란 연갈색 눈동자, 아직 어린 소녀의 얼굴을 탈리온 저택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나일, 일단 그 아이부터 놔줄래?”
나일은 인상을 확 찡그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원에서 일하던 사용인 수십 명이 몰려와 있었다.
“너, 나중에 보자.”
“나중에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하나도 없더라.”
“요게 아주!”
“나일!”
아시카의 목소리에 나일은 결국 상대를 놓아주었다. 나일은 허리께까지 오는 수조를 가뿐히 넘어 밖으로 나왔고 뒤에 남겨진 소녀는 물에 잠긴 다리를 질질 끌며 간신히 밖으로 나왔다.
아시카는 황망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둘 다 씻고 나 좀 봐.”
“네, 아가씨.”
거품을 뒤집어쓴 상태에서도 여전히 발랄한 미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 * *
저녁 무렵, 아시카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나일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의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을까.’
독특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나일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한동안 쥴마를 괴롭히는데 재미를 붙이더니만.’
실수를 빙자해 서류를 망가뜨리거나 시키는 일을 엉뚱하게 처리하는 등 심술 난 악동처럼 굴었다. 미움받으려고 작정한 건지 아니면 쫓겨나고 싶어 안달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그렇게 싫으면 차라리 나가라고 해도 그건 또 싫다고 버텼다. 약 먹은 청개구리처럼 날뛰는 통에 쥴마와 잔느 모두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갑게 웃었다. 그나마 아시카의 말은 들으니 다행이랄까.
하는 짓을 봐서는 진작에 쫓아냈어야 마땅한데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앳된 스물의 나이. 심통 난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화가 나기보다 그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이 죄 그를 피해 다니자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세탁실 하녀와 엮여있을 줄이야.
아시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일, 왜 애랑 싸우고 그래?”
“아가씨 눈에는 얘가 애로 보여요?”
미아는 뭐가 좋은지 해맑게 웃고 있었고 나일은 여전히 사납게 미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가 아님 뭐겠어. 괜히 어린애 괴롭히지 마.”
나일이 미아의 손을 획 잡아채 아시카에게 내밀었다.
“이 거친 손 보이세요? 일해서 생긴 굳은살이 아니라 검을 만지는 손이라고요. 어디서 이런 의심스러운 애를 집에 들여요?”
한량처럼 놀러 다니는 줄만 알았더니 나일의 눈은 꽤 예리했다. 세탁실 하녀들 속에 섞여 있는 소녀가 이상하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눈썰미가 대단하구나.’
새삼스럽게 나일이 다시 보였다. 아무래도 나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아이야.”
“아는 사람이라고요?”
세탁실에서 아시카의 반응을 보고 이상하다 싶었다. 나일은 눈살을 찡그리며 아시카와 미아를 번갈아 보았다.
“아가씨가 데려다 놓은 사람인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나일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아시카는 놀라는 동시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살피는 나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어디서 온 첩자인가요?”
“첩자라뇨! 저 그런 거 아니거든요?”
미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나일을 돌아보는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간다.
“조그만 게 벌써 첩자질이야? 누가 시켰어? 어떤 나쁜 새끼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를 첩자질 하라고 등을 떠밀어?”
아시카와 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일은 두 사람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미아의 이마를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검을 잡았으면 정도를 걷던가, 그 몸놀림이면 어디든 갈 수 있을 텐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다니냐고.”
“저 내년에 기사 서임 받아요! 아무 데서나 굴러다니는 거 아니라고요!”
미아가 바락 소리치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너 어디 소속이야?”
나일이 눈꼬리를 휘며 사악하게 웃었다. 미아가 울상을 하자 상냥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독설을 뱉었다.
“어린애 이용해먹는 놈치고 좋은 놈 못 봤어. 그러니까 넌 진짜 나쁜 새끼 밑에서 일하는 거야. 알아?”
“아니에요, 그런 분 아니란 말이에요.”
“나쁜 새끼가 자기 나쁘다고 소문내고 다니는 거 봤어? 네가 아무리 변호해도 소용없어. 그게 아니라면 누군지 말을 해주던가.”
“진짜 아닌데, 좋은 분들인데… 흐윽….”
누구라고 말은 못 하겠고, 억울하기는 하고. 생기발랄하고 씩씩했던 소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시카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소녀가 우는 동안에도 나일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미아를 훑어내렸다. 빈틈이 보이는 건 아닌지 살피는 눈이 매서웠다.
“세상에, 나일. 내가 아는 아이라고 했잖아.”
“아가씨,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죠.”
“…으응?”
나일이 돌아보자 아시카는 움찔 놀랐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시선에 저도 모르게 밀리는 느낌이었다.
“혹시 탈리온인가요?”
순간 아시카는 입을 다물었고 미아는 울음을 뚝 그쳤다. 딸꾹질하는 입을 틀어막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일을 보았다.
“맞군요.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거기.”
혼잣말처럼 툭 뱉는 어조가 가차 없었다. 불손하게 들릴법한 말이 거만하게 잘 어울려서 그것 또한 이상했다.
“기사단장이라는 놈이 레이디를 공격해서 말에서 떨어뜨리지를 않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를 첩자질 하라고 내돌리지를 않나.”
“첩자질이 아니라 아가씨를 보호하라고 보내주신 거예요!”
“아가씨가 네 보호가 왜 필요해? 여기가 이그레인 공작가인 거 잊었어?”
“그, 그게 공작님과….”
“미아.”
아시카는 조용히 미아를 불러 둘의 대화를 끊었다.
‘제대로 휘말렸네. 내버려 두면 아주 다 불어버리겠어.’
나일의 수완이 좋다고 해야 할지, 미아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뒤늦게 깨달은 미아가 입을 닫았다.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시카도 탈리온 저택에 사람을 심었으니 반대도 예상은 했다. 하지만 드루쉬아는 몰래 사람을 심는 대신 부러 눈에 띄는 아이를 보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해.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미아는 아시카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아가씨께 들키면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어차피 저택에 들어온 이상 언제고 마주칠 일이었다. 하지만 불과 이틀 만에 들켜서 내부사정을 익히지도 못했다.
“‘거부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레이디 이그레인의 뜻대로 하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
뻔뻔한 남자의 전언에 기가 막혔다.
언뜻 들으면 아시카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아시카가 제일 잘 알았다.
‘미아를 돌려보내면 그 뒤에는 들키지 않을만한 사람을 보내겠지.’
실상은 선택을 빙자한 압박이었다.
“나일, 미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샵에 좀 다녀와 줄래?”
여기서 말하는 샵은 이븐의 아트샵을 가리켰다.
나일은 가까스로 미아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대략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까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나요?”
“내가 지난번에 부탁해 둔 것도 있고.”
“네, 그럴게요. 그리고 이 꼬맹이는.”
꼬맹이라는 말에 미아의 눈꼬리가 획 치켜 올라갔다.
“잔느에게 던져주면 딱 맞겠네요.”
“잔느…, 베르트 경 말이에요?”
매섭던 미아의 눈이 동그랗게 반짝였다.
평민 출신으로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뒤 기사 서임을 받은 잔느 베르트. 황실 기사가 되라는 제안을 걷어차고 이그레인 공작가로 들어간 그녀는 혈혈단신 역경을 이겨낸 기사의 표본이었다.
웃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또 좋아하는 변화가 참으로 다채로운 소녀였다. 나일도 기가 찬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전 다녀올게요. 아가씨.”
나일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유유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평소처럼 느긋해진 모습에 아시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었던 거야.’
불편함일까 두려움일까. 드루쉬아 앞에서조차 이런 긴장은 느껴본 적이 없어서 생소했다.
“이 일은 제가 자원한 거예요. 공작님이 등 떠민 게 아니라고요.”
나일이 몰아붙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미아가 슬그머니 변명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영지에서 왔다고 했지?”
“네.”
“계속 탈리온 영지에서 지낸 거니?”
“네. 제가 기사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렸어요.”
“부모님도 영지에 계셔?”
밝게 웃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씩씩하게 대답했다.
“전 이민족 출신이에요. 국경지대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마을 여럿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보육원으로 보내려는 걸 제가 안가겠다고 버텼어요. 그렇게 탈리온 본성에 들어가게 된 거고요.”
“나일이 경계하는 걸 보니 보통은 넘는 모양이구나.”
“물론이에요! 무려 전대 탈리온 공작님께 배웠다고요. 그분이 훈련 때마다 얼마나 엄하게 가르치셨는데요.”
“전대 탈리온 공작께서는 국경지대에 계신 게 아니었어?”
미아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시카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왜지?’
무심결에 던진 질문이었다.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을 텐데 미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미아가 입을 열었다.
“기사단장님 두 분과 번갈아 오가고 계세요.”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놀래?”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더욱 수상하다. 대외적으로 네오렌은 국경지대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네오렌은 영지에서 뭘 하는 걸까. 왜 굳이 작위를 미리 넘겨주고 드루쉬아를 수도에 머물게 하는 걸까.
켜켜이 쌓여있는 문제 위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