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달의 초대-60화 (60/153)

#60.

웨이브가 제 아들의 배우자를 직접 고르면서 왜 고아나 다름없는 여자를 데려온 것인지도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웨이브는 이 사실을 알고 외부 혈족이 개입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던 건지도 모른다.

과연 드루쉬아는 이 사실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만약 목걸이의 출처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한가지 다행인 것은 목걸이가 왜 아시카의 손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녀 본인 외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목걸이의 원래 주인은 정인인 웨이브에게조차 끝까지 이것을 숨겼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간신히 정신 차렸을 때는 짙푸른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드루쉬아의 양손이 언제부터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얼굴에 닿는 숨결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대체 왜 그래? 응?”

놀라 달아나려는 아시카를 드루쉬아의 손이 더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진지하게 염려가 담긴 눈동자. 차디차던 시선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걸까. 어째서 이 남자가 이런 얼굴이 되는 걸까. 이제 겨우 몸을 몇 번 섞었을 뿐인데.

왈칵 겁이 났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남자의 태도가 점점 꿈속을 닮아가는 것만 같아서. 끔찍했던 악몽마저 닮아가면 어쩌나 두려워서.

그러면서도 이 남자 곁에서 생생하게 뛰는 심장 고동을 느끼고 체온을 나누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든다.

아시카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목걸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모르는 척 흘려넘기는 것이 나을까. 괜히 말을 꺼냈다가 의심만 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시카?”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답을 내릴 수도 없었다. 아시카는 드루쉬아의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무슨 말이든… 흡.”

겹쳐진 입술 사이로 작은 혀가 밀려들었다. 드루쉬아는 당황하면서도 아시카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답을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부드럽게 감겨드는 혀가 사랑스러웠다.

“으음… 이건 좋은… 데.”

엉겨있는 혀와 부드럽게 감겨오는 여체가 진정되었던 감각을 일깨운다. 온몸의 감각이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지독히 강렬한 쾌감의 수렁. 이걸 멈추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드루쉬아는 아시카의 등허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밀착했다. 질척하게 혀를 섞으며 저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는다. 아득해지는 쾌감에 몸을 맡기면서 드루쉬아는 짧은 상념을 던져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여자를 원했고 아시카 또한 그를 원했다. 그 열렬한 탐닉만이 서로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 *

아시카는 거울 속에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살피고 또 살펴봐도 윤기 도는 검은 눈동자에는 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황족이나 탈리온도 혈족이라고 해서 모두 특징이 나타나는 건 아니었어.’

그러니 외형만으로는 판단할 길이 없었다.

드루쉬아에게 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온 뒤부터 아시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반역으로 멸문한 대공가의 문제였다.

‘내가 착각하는 걸 수도 있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목걸이 하나만으로 그녀의 출생을 멸문한 대공가와 연결 짓는 건 지나친 비약이지 않은가.

‘조부님은 알고 계실 테지.’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웨이브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진실을 말해주실까.’

어떻게 알아냈는지 묻는다면 목걸이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랬다간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이 어디에 있든 웨이브는 아시카가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말할 수 없어. 절대 말해서는 안 돼.’

웨이브가 작정하고 나서면 아시카의 발이 묶이게 된다. 지금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수 있었다.

착각이라고, 지나친 비약이라고 외면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겪은 환각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고 목걸이의 존재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막 잠에서 깨어나 몽롱하던 의식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그보다 강렬해서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감각이 곤두섰다. 자석처럼 들러붙어서 점점 더 그녀를 각성상태로 몰아가는 것만 같았다.

아시카는 옷 속에 숨겨놓은 펜던트를 꺼내 손에 들었다.

투박한 펜던트 속의 보석은 햇빛 아래에서 오묘한 청보라빛을 내었다. 실금에 뒤덮여 당장 바스러질 것 같은 두 개의 보석은 여전히 깨어지지 않았고 남은 세 개의 보석에서는 차디찬 은회색의 피막 같은 것이 보였다.

아시카는 손끝으로 가볍게 보석을 문질러보았다. 스르륵 미끄러지는 느낌이 묘하다.

‘물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아.’

반사되는 빛만 독특한 게 아니라 만지는 느낌도 남달랐다.

‘보석처럼 보이지만 보석이 아니야.’

빛을 가두어 단단한 형체로 만들어 둔 느낌이랄까. 드루쉬아로부터 신물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 물건이 남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겪은 세 번의 환각이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는 사실도.

그런데 그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시카는 초조하게 창문틀을 두드리며 펜던트를 보고 또 뜯어보았다.

‘첫 번째는 황궁 연회에서였고, 두 번째 꿈은 팜레드 거리에서였어. 그리고 세 번째는 수도 밖에서.’

정확히 한 달 간격이었다.

‘시기가 있는 건가? ’

세 번째 환각이 있었던 시점으로부터 한 달이 훨씬 넘었지만 환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조건이 있는 것 같은데.’

첫 번째와 세 번째 환각에서는 드루쉬아와 함께 있었다. 두 번째 팜레드 거리에서는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거기 있었다는 걸 나중에 확인했다.

‘분명히 르쉬아와 연관되어 있어. 그리고, 아….’

탈리온의 신물이 어떤 형태인지 묻는다는 걸 잊었다. 어쩌면 황궁에서 발견했던 기묘한 액자가 신물일지도 모른다.

‘사라졌다는 황족의 신물은 아닐 거고, 황제가 갈취해갔다는 탈리온의 신물일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신물들끼리 연결되어 있는 걸까. 같은 보석이라서 같은 힘을 갖는 걸까. 아니면 같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기능을 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의문은 노크 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아가씨, 교체할 커튼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라는 아시카의 말에 방문이 열리고 하녀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뒤에는 세탁실 하인들이 새 커튼을 켜켜이 안아 들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원하신 색상이 이게 맞지요?”

“그게 맞아. 가구 수리공들도 도착했지?”

“네, 아가씨. 목공실의 공간이 부족해서 후원도 일부 사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어제오늘 온 집안이 들썩였다. 심란했던 아시카가 하녀장과 집사를 불러 뜬금없는 일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본래 1, 2년에 한 번 하는 가구 수리와 봄가을 두 번에 걸쳐 하는 커튼과 소파 세탁을 한꺼번에 지시한 것이다. 한여름 땡볕에서 일을 벌이자니 사용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정원에 나가 있을 테니까 다 되면 사람을 보내.”

“예, 아가씨. 예쁘게 달아 놓을게요.”

어린 하녀 하나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시카가 방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쥴마가 다가왔다.

“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추가 인원을 고용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들인 거 확실하지?”

“저와 베르트 경이 보증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동선과 접점이 있는 사람 중에 조부님 밑에서 오래 일했던 사용인들을 우선으로 별관 쪽에 배치해.”

“네, 알겠습니다.”

쥴마는 이유를 묻지 않고 대답했다.

최근 들어 아시카는 생전 하지 않았던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조부 웨이브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일도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드루쉬아와의 관계였다.

그래서 저택을 크게 뒤집어 사람을 고용할 빌미를 만들고 그 틈을 이용해 사용인들을 재배치했다.

‘조부님 몰래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언제나 웨이브의 뜻에 순종하는 손녀이자 후계자였다. 그랬기에 웨이브는 아시카의 생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뭐 그냥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웨이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카도 알지 못했다. 한없이 어렵고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최대한 조부님 눈을 피해야 해.’

가족이라 해도 마냥 믿기만은 어려운 관계. 아시카는 웨이브를 떠올리며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후원이 있는 방향으로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온 저택 안의 커튼과 쿠션, 소파까지 다 꺼내어 펼쳐놓는 바람에 넓은 후원이 북적거렸다.

“공작님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글쎄. 내가 파혼한 뒤로 내내 이상했잖아. 이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실 거야. 기분이 상해서 집안 분위기 좀 바꿔보겠다는데 어쩌시겠어.”

저택 규모가 크다 보니 동원되는 사람의 수가 많아서 그렇지. 아시카는 분주한 후원을 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문득 쌓여있는 세탁물과 가구 너머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어, 하는 순간 상대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꺄아아악!”

조금 전 하녀가 달려간 방향이었다. 놀란 사용인들이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세탁실 쪽이잖아?”

좀처럼 큰소리가 나는 법이 없는 저택이었다. 사용인들을 따라 아시카도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렸다.

세탁실에는 사람 열 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나무 수조가 있었다. 물과 거품과 빨래감이 가득 찬 그곳에서 축 늘어진 빨랫감처럼 건져 올려진 여자가 있었다. 남자의 손에 멱살이 잡힌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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